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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괴산 김기응 가옥

깜보입니다 2007. 6. 5. 09:54
 
김기응가옥 평면도

 
김기응가옥전경

김기응 가옥(중요민속자료 136호)

 

이 집은 현재 살고 있는 종부의 시할아버지인 김항연(金恒然)이 1910년 지은 집이라고 한다. 고종때 공조참판을 지낸 김향연은 경술국치로 조선이 무너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였다. 원래 고향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소수면이라고 한다. 낙향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채는 원래 이곳을 관리하던 사람이 살고 있던 집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곳에 집을 증축하여 짓고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이유만으로 이곳에 정착한 것 같지는 않다. 집이 자리잡은 터는 이곳 괴산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들을 앞에 두고 있어 시원한 조망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풍광 때문에 당신의 고향을 놔두고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닌가 한다. 이 집은 예전부터 있었던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안채 전경

 

김기응가옥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안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다층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다층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집만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집이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나 나오고 사랑채 옆에 있는 중문을 통해 곧바로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김기응가옥은 사랑채 옆에 있는 중문을 지나 또 안행랑채에 있는 문을 지나야 안채로 들어갈 수 있게되어 있다.

 

이렇게 안채로 들어가는 과정을 복잡하게 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 심화된 남녀유별의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서구의 문물이 물밀 듯 들어 닥치자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흐름도 있었지만 반면에 보다 보수화하는 경향도 같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보수화 경향은 단지 보수화의 정도를 넘어서 수구화되기도 하였다. 수구화되는 경향이 김기응가옥에서는 내외의 정도가 더 심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사랑채 (별도의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음)

 

이 집의 두 번째 특징은 목재수급이 그리 원활치 않았던 시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은 새로 지어진 것이다. 새로 지은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사랑채를 제외한 행랑채의 재목은 그리 넉넉하게 쓰지 못하였다. 행랑채의 서까래를 보면 너무 가늘어 보기에도 불안할 정도이다. 종부의 말로는 재산의 분배와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기울기는 했지만 집을 지을 당시에는 1500석을 하던 집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는 꽤 알아주던 부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주던 부자도 중요한 건물인 사랑채를 제외하고는 목재를 넉넉하게 쓰지 못할 정도로 목재의 사정이 열악했던 것이다.

 

이 집의 세 번째 특징이자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랑채 뒤뜰의 담장이다. 사랑채의 뒤편은 안채의 행랑채와 마주하고 있다. 또한 간격이 넓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랑채에서 마주 보이는 행랑채 담을 아름다운 꽃담으로 치장하였다. 꽃담의 규모가 작을 뿐이지 그 품격을 마치 궁궐의 꽃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양쪽은 卍자문양이고 가운데는 팔각의 무시무종문양(無始無終紋樣)을 채워 넣고 네 귀퉁이에 두군데는 박쥐문양을 두 군데에는 당초문을 베풀었다.

 

이러한 꽃담을 일반집에서 설치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19세기말에 들어서면서 사회의 신분질서가 흐트러지면서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들이 발생한다.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1904년에 지어진 아산 윤보선생가의 사랑채에는 왕족의 건물에서나 사용하였던 물익공을 사용하였고 기단도 장대석으로 갖추었다. 또한 중인의 집이었던 무교동의 집은 1900년 초에 솟을대문을 설치하였다. 이곳 김기응가옥에서는 궁에서나 사용하였던 꽃담을 설치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바로 사회의 신분질서가 와해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집을 짓게된 계기도 <조선>이 망하고 낙향한 것 때문이니이제 신분의 상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사랑채 뒷뜰의 꽃담

 

사랑채의 선자서까래의 짜임이 재미있다. 추녀 주위의 서까래 짜임은 세 종류이다. 선자, 엇선자, 평연으로 구분되는데 우리의 경우는 기와집에서는 대부분 선자서까래가 주류를 이루고 수준이 떨어지는 집에서 엇선자를 사용한다. 평연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곳의 사랑채 추녀에서 밖에서 보이는 앞쪽은 선자서까래로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뒷편은 엇선자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의 짜임을 혼용하는 경우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다. 이러한 모습은 외부에도 그대로 나타나 부연의 짜임이 눈에 익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의 뒷산은 소나무로 우거져 있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이전에는 나무가 더 많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목재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산이 민둥산으로 변하고 만다. 1915년에 찍은 해인사 전경사진에서도 해인사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하지만 조금 떨어진 뒷산은 거의 민둥산으로 남아 있을 만큼 전국의 산이 헐벗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많은 양반집의 뒷산의 나무가 잘 보존된 것은 풍수적인 의미가 강하다. 집의 풍수적 환경을 보전하기 위하여 뒷산이나 비보적의미가 있는 곳의 나무는 잘 가꾸고 보존하였다. 이 집의 뒷산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보존되었기 때문에 수 백년된 장송長松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다.

 

추녀 상세

김기현가옥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앉혀져 있다. 대지가 급하지는 않지만 뒷동산으로 완만한 경사가 지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게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완만한 경사 때문에 집 전체에 햇볕이 골고루 들어온다. 안채는 튼 ㅁ자형 집이다. 안채는 원래 있었던 집으로서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집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 지어진 사랑채나 행랑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은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의 부엌은 서쪽 4칸의 규모로 되어 있다. 다른 집보다는 큰 규모이다. 이러한 규모의 부엌을 유지하였던 것을 보면 처음 이 집을 지은 가문도 사회적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안방은 두 칸인데 모두 남쪽에 면하도록 되어있다. 햇볕이 잘 들도록 되어있어 안채가 그늘지지 않아 항상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가지도록 되었다.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는 아마도 그 혼란기에도 집을 유지하는데 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종부의 말로는 돌아가신 종손께서 손이 커서 주변에 베푸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혼란기와 한국전쟁통에도 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부의 말에 의하면 산에서 내려온 공비들도 많이 베푼 집이라고 하여 옷가지와 먹을 것만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은 종부와의 대화에서도 느껴졌다. 해방 후 토지개혁 때 많은 땅을 강제로 수용당하여 가슴아프지 않았는가 하였더니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되었는데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닌가 하신다. 부부가 일심동체라더니 마음씀씀이까지 한결같은 모습이다.

 

종부는 우리가 집을 돌아보는 내내 우리의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종부의 말씀에 의하면 많은 가보를 도둑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한 불신이 깊어 보였다. 우리가 대문을 벗어난 후에도 한참을 문가에서 서성이고 계셨다. 과연 누가 이러한 불신을 노종부에게 남겨주었는가. 우리의 욕심이 순박한 노종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가 아쉽기만 하다.

 

이 집의 사랑채에는 어약해중천魚躍海中天과 비학루飛鶴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魚躍海中天은 물고기가 바다 가운데에서 뛰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인재가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펴는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 飛鶴樓는 학이 날아다니는 평화로운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집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魚躍海中天이라는 문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퇴락하여가는 집에 노종부와 차종부 단 두 분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 집에서 다시 인재가 나와 이 가문을 다시 살릴 수 없을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 우리는 수많은 집을 짓고 있다. 그러나 지금 짓고 있는 그 수많은 집에서 魚躍海中天의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집에는 아취나 고고한 품격을 찾을 수는 없다. 단지 돈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집에서 과연 魚躍海中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의문이 간다.

 


후기 :

 

김기응 가옥은 현재 살고 계신 89세인 종부의 시할아버지가 한일합방 이후 낙향하여 지은 집이라고 한다. 원래의 고향은 소수면이었다고 하며 낙향할 때 1500석을 수확하는 부자였다고 한다. 처음 집을 지을 때 안채는 기존에 있었고 안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많던 재산은 시아버님 때 자동차회사가 망하고 당숙이 사업을 하면서 재산이 700석 정도로 줄었는데 다시 재산 분배를 하면서 300석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 후 해방되면서 토지개혁 때 재산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집이 살아남았던 것은 현 종부의 남편이 워낙 덕을 많이 쌓아 빨치산들도 많이 베풀어주었다고 하면서 옷과 음식만을 가져갔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공산당에게 명목상 부역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이 들어왔을 때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평소 때 많이 베풀었던 덕이었을 것이다.

 

뒷산에 소나무가 많아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옛날에는 더 많은 나무가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 많은 산들이 황폐해져갔지만 이곳에 소나무가 잘 보전된 것은 배산으로서의 역할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현재 집은 부분 부분 개수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 고쳐진 모습이 너무 눈에 띄어 불편하다. 새롭게 고치지만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노력이 아쉽기만 하다.

 

안채의 건넌방과 아랫방사이에는 반 칸 규모의 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다.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은의 선병국가옥도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어떠한 용도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이 지방의 만의 특징인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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