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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 미술 극치를 만나다 ‘사경변상도展’

깜보입니다 2007. 7. 29. 14:47
불교 미술 극치를 만나다 ‘사경변상도展’
입력: 2007년 07월 23일 17:34:28
 
〈고려시대는 불교미술이 화려하게 꽃핀 시대였다. 통일신라의 불교미술이 안정감과 비례감이 뛰어난 조각과 건축물이 주종을 이룬다면, 고려시대는 특히 불화와 사경변상도 등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다. 화려했던 고려 사경변상도를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사경변상도의 세계, 부처 그리고 마음’전이 24일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뿐 아니라 국내 공·사립 미술관, 개인의 소장품을 모았고 일본 교토국립박물관과 나라국립박물관으로부터 40여점을 대여해 왔다. 100여점의 전시작 중 국보가 7점, 보물이 17점, 일본 중요문화재가 2점으로 지정문화재만 26점에 달해 전시품의 귀중함을 가늠할 수 있다.〉
일본 보적사 소장 ‘법화경 변상도(1294년)’.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는 경전을 필사한 사경의 첫머리나 책의 머리에 경전의 내용을 압축해 풀어 그린 그림을 말한다. 사경은 신앙심을 돈독히 하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경전을 보급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으로 권장됐던 불교수행의 한 방법이다.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고려는 국가적 차원에서 사경원을 운영했다. 각 사찰과 귀족들도 왕실의 허가를 얻어 사경소를 만들었다.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경판인쇄본이 일반에까지 보급되자 차별화를 위해 최고급 종이에 금물과 은물로 소중한 부처의 말씀을 보다 더 귀하게 새기기 위함이었다. 사경승(寫經僧), 화승(畵僧)은 이들의 발원을 받아 물을 들인 고급 종이에 아교에 금박, 은박을 개어 경전을 쓰고 변상도를 그렸다.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사경변상도 ‘대방광불화엄경’.
고려의 사경변상도는 수법이 치밀하고 예술성이 뛰어나 당시 중국 원 황실에서도 고려의 사경변상도와 사경승을 공물로 요구할 정도였다. 전시는 2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사경과 함께 이를 보관하던 경함과 경갑, 사경보 등 관련유물을 함께 선뵈고, 2부에서는 시대별로 사경변상도의 흐름을 훑어볼 수 있도록 한다. 비슷한 시기 원나라와 헤이안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사경변상도도 전시돼 한·중·일 삼국의 변상도를 한 자리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전시에 선보이는 ‘대방광불화엄경 사경변상도(754~755년)’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경변상도. 자색으로 염색한 닥나무 종이에 선묘기법으로 보살을 그린 부분이 남아있다. 사경변상도는 화엄경, 법화경 등 다양한 경전을 그림으로 그렸지만 특히 고려시대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설법한 경문인 화엄경을 그린 것이 많다. 화엄경을 그린 그림은 석가모니가 수미단 연화대좌에 앉아 여러 보살과 신장, 천부중에게 설법을 하는 도상으로 표현돼 있다. 일본에서 들여온 ‘대보적경(1006년) 권 32’는 고려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가 외족과 함께 발원한 변상도로 고려시대 금자경(금박으로 쓴 경전)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7권 1질로 된 일본 보적사 소장 ‘법화경’에는 두 폭의 변상도가 그려져 있어 전시기간 중간에 교체해 보여줄 예정이다.

1350년에 제작된 ‘화엄경 변상도’.
일반인에게 처음 선보이는 작품도 있다. 개성 남계원 석탑에서 출토된 ‘묘법연화경’은 고려 충렬왕 당시 승지였던 염승익이 발원해 제작된 것으로 보존처리를 거쳐 이번에 전시된다.

사경변상도가 가장 많이 제작된 시기는 13세기 말에서 14세기 말. 거란족과 몽골족 등 주변국의 침입이 잦고 무신정권 난 이후 분분했던 국내 정세도 활발한 사경 제작의 한 배경이 됐다. 어느 때보다 국가의 질서와 평안, 조상의 극락왕생과 개인의 구복 등을 기원할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김홍남 관장은 “고려 사경변상도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 후기는 불교미술의 르네상스 시기로 당시 동아시아 각국에서 고려의 사경변상도를 수집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9월16일까지.

〈윤민용기자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구본실(솔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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