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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림원터

깜보입니다 2007. 10. 11. 16:13

나는 폐사지를 현대 설치미술작품의 전시장이라고 하였다.

그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작품의 다양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겸비한 최고의 전시장은 어디일까.

물론 각각의 특징과 의미가 다르겠지만 난 선림원터를 첫손가락으로 꼽고 싶다.

 

우선 강원도 깊은 산중에 자리잡아 주위환경이 뛰어난데다

사람이 범접하기 힘들어 세월의 이끼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오염원이 없어 아직 원시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상영되어 흥행한 한석규 김혜수 주연의 ‘닥터 봉’의 촬영장이기도 하였던 이곳을 찾아간다.

(주인공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자동차 부속을 하나 주머니에 감추는데,

눈 쌓인 빈 절터에서 신나게 놀다가 그것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걸어나오게 된다는 부분의 무대가 바로 여기이다.

겨울날, 차 없이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으리라는 것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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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터 가는 길을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잠깐 인용하자.

 

...(중략)...태백산맥 등줄기를 타고 높은 등고선만으로 가득 메워져 있는...(중략)...

그 한가운데 계곡을 따라 九折羊腸으로 뻗은 56번 국도가 보인다.

이 길 남쪽은 영동고속도로에서 대관령 못 미쳐 속사리재에서 꺾어들어

이승복반공기념관 쪽으로 가는 길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은 설악산 한계령 너머 오색약수 지나서 양양 가까이 있는 논화라는 마을에서 만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산은 험하고 계곡은 맑아 수려한데, 인적 드문 산촌 마을엔 스산한 정적이 감돈다.

비포장도로 흙먼지 날리는 길은 멀고멀기만 하며,

가파른 비탈을 넘어가는 버스의 엔진소리마저 숨이 차는데 거기엔 묵어갈 여관도 없다....(중략)...

 

그러나 권위 있는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사실이 아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촬영장으로 쓰일 만큼 아직 하늘아래 첫 동네로서의 풋풋함과 한적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때도 이미 56번 국도는 포장이 되어 있었다.)

올해 다시 찾았을 때는 거기에는 흙먼지도 정적도 물론 없었고,

56번 국도 가에는 ‘모텔식 민박’이라는 화려한 치장을 한 민박집이 50미터 간격으로 자리 잡아

‘묵어갈 여관이 없다’는 말은 옛 얘기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선림원터 훨씬 위에 있던 미천골휴양림 매표소를 선림원터 아래로 옮겨놓아

답사객들에게조차 휴양림 입장료와 주차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이미 있는 매표소를 다시 옮겨 세우므로 해서 드는 비용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선림원터를 향해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는 길은 정말 환상적이다.

특히 새벽이나 비온 뒤 그 길을 올라가 보라.

커다란 바위 사이사이를 누비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옥빛의 물줄기가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고,

비구름이 걸린 산중턱 위에 솟아오른 봉우리와 온갖 나무들이 내는 향기,

그들을 실어 나르는 바람 등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이러할까.

그리고 계단을 따라 절터에 올라섰을 때의 그 장쾌함이란...

 

선림원(禪林院)터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스님들의 수도처였다.

해인사를 세웠던 순응법사(法師)가 세운 절로 뒤에 홍각선사(禪師)가 중수하였다는데,

화엄종에서 선종으로 전환하는 최초의 선종사찰로서의 불교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좁은 산비탈 축대 위에 자리한 절터에는 삼층석탑과 부도, 석등, 부도비등

고색이 찬연한 신라시대 석물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온전히 남아 있는데,

이는 AD 900년을 전후한 어떤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완전히 매몰된 후

한번도 중수되지 않고 잊혀진 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948년에는 신라시대 범종과

우리 종의 특징인 긴 여운의 비밀을 밝혀주는 反響音筒의 실측도가 발굴되기도 했는데,

돌볼 사람이 없어 월정사로 옮겨 놓았다가 한국전쟁때 불에 타는 바람에

지금은 그 잔해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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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44호 선림원터 삼층석탑, 이중 기단 위에 삼층으로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힘이 느껴진다.

 

절터를 올라서면 마주하는 보물 제444호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비례미가 뛰어나고, 작지만 다부진 모습인데,

상층기단에 팔부신장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어 그 우아함을 더 한다.

탑 뒤로는 금당터가 온전히 남아있고 불상을 모셨던 불대좌의 흔적도 보인다.

금당터 뒤 산비탈에는 산중턱에서 옮겨다 놓은 보물 제447호 홍각선사 부도가 있는데,

탑신부와 상륜부는 없어졌지만 하대받침의 사자조각과 중대석의 용,

구름조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용과 구름무늬는 이것이 최초의 것으로 신라 말 고려 초 유행한 雲龍紋의 始原이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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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47호 홍각선사 부도, 홍각선사의 사리를 모셨던 부도로 기단부만 남아 있어 

허전한 감이 들지만 조각이 깊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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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46호 홍각선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있고, 비신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솜씨가 뛰어나 생동감과 긴장감이 있다.

 

부도를 지나면 조사전터와 함께 보물 제445호 석등과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 부도비가 있다.

조각이 화려한 석등은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특징을 따르면서

기둥돌등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변화의 모습을 읽을 수 있고,

용 조각이 화려한 부도비도 신라시대 전형적인 모습으로 작지만 힘이 철철 넘친다.

전체적으로 모든 석물들이 다른 절 같은 시기 작품보다는 왜소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협소한 터에 자리잡은 이 절터에 어울리게 조성하려 한 듯 하다.

요사이 크게 크게를 부르짖는 현대 사찰 불상들을 보면서,

주위와 어우러진 결코 자연을 압도하지 않는 범위에서 무리하지 않은 옛 선인들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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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445호 선림원터 석등, 기둥 돌이 특이한 신라시대 석등으로

상륜부가 없어졌지만 비례미가 뛰어나다.  

 

선림원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미천골휴양림이고 거기서 계속 올라가면 불바라기약수 가는 길이다.

온갖 약초들로 유명하고 정주영 회장이 대놓고 먹는다는 청정지역 토종 벌통들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차로는 휴양림 조금 위까지만 갈 수 있고 내려서 걸어가야 하는데 하루 산행코스로 잡아야 한다.

 

출처 : 선도회 영하산방
글쓴이 : 전원 조영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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