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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민의 벗 소주, 어디서 온 누구일까-연합뉴스 07.9.21

깜보입니다 2007. 10. 24. 09:09
<기획탐구> 서민의 벗 소주, 어디서 온 누구일까
 
전통방식으로 빚는 증류식 소주
고려시대에 몽골을 통해 한반도에 정착
병참기지였던 개성, 안동, 제주서 발전
2조5천억 시장 차지하며 서민사랑 받아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카~! 쥑인다, 쥑여!!"
퇴근길의 한 잔 술은 피로와 시름을 일거에 털어버리는 묘약이다. 비록 닭똥집 안주에 뒷골목의 허름한 포장마차일지라도 목젖 너머로 술술 흘러가는 액체의 맛은 천국이 따로 없다. 주당들은 그 짜릿한 쾌감을 잊지 못해 오늘도 술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댄다. "어이, 이따 쐬주 한 잔 어때?"
그런데 투명한 소주잔에 출렁대는 그 투명한 액체에 혹시 낙타 한 마리가 어른거리진 않는가. 뜨거운 열기 몰아치는 아라비아 사막의 낙타가 말이다. 그 낙타는 몇날 며칠을 물 한 모금 마지지 않고 걷고 또 걷다가 오아시스에 도착해 생명의 감로수를 꿀꺽꿀꺽 삼킬 수도 있다.

   물론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소주 이야기에 난데없이 낙타가 나오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 보면 소주와 낙타는 의외로 쉽게 연결된다. 퇴근길 샐러리맨이 포장마차 소주잔에서 위안을 찾는 것과 열사의 낙타가 오아시스 샘물에서 갈증을 더는 것의 유사점이 발견된다는 뜻이다.

   서민의 술인 소주는 한 해 매출액이 2조5천억원을 넘을 만큼 국내 주류시장의 대표주자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출고량은 무려 117만4천여 킬로리터. 도수가 4도밖에 되지 않는 맥주가 164만3천여 킬로리터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중주로서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나 짐작할 수 있다.

   주당들에게 소주는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친구다. 오죽하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소주 없이는 못 살아!"라며 꼬부라진 목소리로 주사를 부릴까. 그 유래를 헤아려본 바는 없으나 너무나 가까운 벗이어서 "당연히 우리 꺼 아니겠어?"라고 객기를 부리면서 말이다.

   문명교류사 연구가인 정수일 씨에 따르면, 원래 소주는 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빚어졌던 증류주였다.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꼽히는 기원전 3천년 전의 수메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처음 만들어져 이 곳을 중심으로 줄곧 전승돼왔다. 이런 소주가 어느 날부턴가 탁주, 청주와 더불어 한국의 3대 토속주로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이다.

   소주의 어원은 '증류'란 뜻의 아랍어 '아라끄'다. 이 아라끄가 나라 이름 '이라크'(아랍어 발음은 '이라끄')와 어근이 같음은 그저 우연일까? 지금도 서아시아에서는 '아락'이라는 이름의 우윳빛 소주가 팔리고 있다. 이 소주가 몽골어로 '아라킬'이 됐고, 만주어로는 '알키'로 불렸다. 중국에서는 '아랄길주(阿剌吉酒)'라고 표기한다. 신통한 것은 개성을 비롯한 북한의 일부 지역에서는 근래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아랍지역에서 즐겨 마시던 소주가 동쪽 끝 멀고 먼 한반도까지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 때라고 정씨는 '한국 속의 세계' 등의 저서에서 말한다. 1231년부터 고려를 수 차례 공격한 몽골제국의 원나라는 고려를 복속하고 수십 년 간 사실상 통치한다. 문화는 권력을 따라 전파되는 법.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세운 몽골제국은 동서의 문화를 교류케 한 고속도로 역할도 해냈다.

   몽골군은 1258년에 압바스조의 이슬람제국을 공략하면서 현지 농경민 무슬림에게서 소주의 양조법을 처음 배웠다. 그후 몽골군의 말과 수레에는 가죽 술통이 실려 있기 마련이었고, 이 소주는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애호가들을 만들어나갔다.

   한반도에 소주가 들어온 것은 몽골군의 주둔과 직접 관련이 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대규모 군대를 한반도에 보냈고, 이들의 주둔지에는 어김없이 소주 제조장이 생겨났다.

   당시 원정군의 본영이었던 황해도 개성을 비롯해 병참기지인 경북 안동과 제주가 전통적 토속주인 소주로 유명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개성이 아락주의 본고장이듯이 안동에는 안동소주(경북무형문화재 제12호)가 있고, 제주엔 고소리술(제주무형문화재 제11호)이 있다.

   몽골군이 물러갔지만 고려사회에서는 소주가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유행했다. 말발굽 소리는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긴 문화는 토속의 향취로 옷을 바꿔 입으며 생활 속에 정착한 것이다. 이를테면 귀화라고나 할까.

   조선시대에는 더욱 사랑 받아 약용 고급주로 쓰였다. 독하면서도 정갈한 소주의 맛에 궁중과 양반들이 푹 빠져버린 것이다. '단종실록'에는 단종이 몸이 허해지자 소주로 기운을 차리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종 때에 민가에서 소주 제조를 하지 못하게 하라는 상소가 있었던 걸로 미뤄 이미 보편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소주는 보통 25도를 넘는 독주여서 작은 잔에 마셨다. 이렇다할 소독약이 없던 시절에 소주는 피부 상처 부위에 발라 감염을 막고, 배앓이나 소화불량 등을 치료하는 약제 구실도 했다. 이런 방법은 근래까지도 농촌을 비롯한 서민들 사이에서 애용됐다.

   국내 대표적 소주 제조업체인 진로에 따르면, 증류식 소주 시대에서 희석식 소주로 넘어온 것은 20세기 들어서였다. 35도가 넘는 증류소주에 물을 타서 알코올 돗수를 낮춘 게 바로 희석식 소주다. 이로써 도수가 지금처럼 낮아졌고, 왕실과 양반의 술에서 서민의 술로 바뀌었다. 물론 안동소주 등은 기존의 순수 증류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다. 그러나 대세는 희석식 소주. 소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희석식을 떠올리는 것도 이때문이다.

   그렇다면 소주가 우리 전통주라고 하긴 힘들까. 연원이 아랍에 있으므로 아랍의 전통주로 봐야 하느냐는 것이다. 고추가 임진왜란 이후에 들어왔음에도 김치가 한국의 전통음식이듯이 소주 또한 우리 전통주임은 분명하다.

   문화는 늘 이동하며 진화하기 마련이다. 소주도 먼 옛날에 아랍에서 흘러들어왔으나 지금은 토속주 지위를 누리며 아낌없이 사랑 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깊은 연원에서 우러나는 원형질과 같은 향기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함이 없다.

   "원샷!"
오늘도 이런저런 사연을 안은 가슴들이 허름하나마 마음 푸근한 선술집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거나해지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건배'를 호기있게 외치며 삶의 고단함을 잊고 서로의 유대를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추석같은 명절 때 오랜만에 재회한 지인들끼리 맞부딪치는 술잔에도 그동안 못 나눴던 따뜻한 정감이 가득 담겨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 모든 게 그렇듯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과음은 자칫 건강과 관계를 해칠 수 있다. 술 못하는 사람에게 강권하는 것도 곤란. 술의 도수와 잔수보다 마주앉음 그 자체로 기분 좋은 일 아닐까. 그 먼 옛날, 수만 리 길을 달려와 우리 생활 속에 자리잡은 소주가 들려주는 속삭임이다.

   ido@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07/09/21 10:30 송고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한국의재발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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