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화성 일주(전편
깜보입니다
2007. 11. 5. 20:09
54년 만에 화성 일주(전편) | ||||||||||||||||
중학교 시절 화홍문, 방홧류정을 무심히 지나다니다.
나는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 어머니께서는 84세의 고령임에도 고향집을 지키시며 자식들이 건강하기만을 기원하고 계신다. 고향의 어른들은 대부분 돌아가시고 이제는 어머니께서 동네의 제일 웃어른이 되셨음에도 건강하게 지내시니 자식으로서 감사할 따름이다. 퇴근 하는 길 매일은 아니지만 수원역 근처 고향집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가는 날이면 마음이 후련하고 개운하다. 자고로 고향하면 어머니 생각이 우리의 정서니 이참에 나의 어머니 이야기를 서두로 수원 화성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시절이 1964년도 이니 내 나이 12살 때이다. 지금부터 42년 전에 얘기다. 집에서 학교 까지는 걸어서 1시간 걸리는데 늘 학교 가는 길은 화성 성곽의 팔달문(남문)을 지나 영동시장 (흔히 남문시장이라 부른다) 을 거쳐 수원천(개천)을 옆에 끼고 화홍문(북수문)과 방화수류정을 지나 다녔다. 버스를 타고 등교 할 때는 팔달문과 장안문을 지나 다녔다. 학교는 광교산 자락에 위치하고 지금 생각하니 학교가 북쪽에 위치하니 북중학교라 이름 지어진 것 같다. 이런 사연과 추억이 있어 중학교 시절 얘기를 먼저 했다. 7개의 수문을 갖춘 화홍문, 언덕 꼭대기에 팔각형 정자 방화수류정, 방화수류정 아래로 연못이 건축미에 있어서나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이 화성 성곽 중 가장 으뜸이라 하겠다.
서울로 가는 관문인 장안문은 한국 전쟁으로 불타고 파괴돼 석축만 덜렁 남아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가혹했나를 짐작케 한다. 장안문은 복원을 하지 말고 전쟁의 참혹한 교훈을 기억하도록 파괴된 모습을 그대로 남겨 뒀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후세 사람들은 화성 장안문이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상징적 문화유산으로 기억 할 텐데. 화홍문 건너 언덕 능선으로는 병사들을 훈련시킨 일명 연무대라 부르는 동장대가 천마가 서 있듯 위풍당당하다. 장안문 서쪽으로 가까이에 화서문이 있는데 주변이 논으로 가을이면 출렁이는 벼이삭이 황금 들녁을 이뤘고 길게 뻗은 성곽이 몇 채 안 되는 초가집들과 어울려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더해 줬다. 화성건축물 가운데 장안문에서 서울방향 왼쪽으로는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오른쪽으로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가까이 있는데 각기 한 쌍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서로 부부지간 같다. 화서문은 신랑, 공심돈은 신부 같고 화홍문은 신랑, 방화수류정은 신부 같은 느낌이 든다. 보면 볼수록 멋진 성곽건축이다. 또 풍물거리로 기억나는 것은 화홍문에서 학교 가는 길목에 우(소)시장이 있어 장날이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수원의 우시장은 정조 시대부터 우리나라 최대의 우시장으로 명성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수원갈비가 유명한가 보다. 또 우시장이 있다 보니 대장간이 여러 곳 있어 삽이나 낫 등 연장들을 쇳물에 달구며 만들어 장사하는 광경이 어른거린다.
54년 만에 지난 시간들을 회상하며 화성을 일주하다.
2006년 2월 19일 일요일, 54년 만에 화성을 일주(一周)하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서울로 가는 시내 중심도로에 있으니 지금도 자주 보게 되며 화홍문은 중학교 다닐 때 지나 다닌 적은 있지만 이렇게 화성 성곽 전체를 한 바퀴 돈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답사는 예비답사로 대충 둘러보는데도 3시간가량이 걸렸다.
화성이 당당히 세계문화유산이 된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겠다. 수원 도심 심장부를 감싸고 있는 화성 성곽, 60년, 70년대만 해도 화성 4대문 안이 수원 중심권으로 번화가 이었는데 지금은 옛날 영화는 다 사라지고 구도심으로 변해 거리가 한산하다. 수원시는 화성을 보존하기 위해 성곽 주변 개발을 제한하고 장래에는 화성안의 거리 모습도 옛 모습대로 복원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으나 여러모로 한계가 있어 애를 태우고 있는 것 같다. 성곽 안을 들어서니 성곽을 따라 놓여진 답사길(산책로 코스)이 우선 눈에 띠게 잘 조성돼 있다. 영하의 추위가 가시고 봄기운이 따사해 많은 시민들이 화성을 구경하며 성곽 길을 따라 거닐며 얘기꽃을 피고 있다. 노인 어른, 연인들, 부부끼리. 아이들과 부모들,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싣고 가는 새내기 부부, 인천에서 왔다는 초등학생들은 단체로 구경 왔단다.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질서 있게 문화재를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성곽의 이모저모에 대하여는 또 다시 와서 살펴본 후 자세히 예기하기로 하고 화성이 어떤 문화재 인지를 개관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먼저 궁금한 것은 성곽이 왜 이곳 수원에 지어 졌을까.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화성 건설로 꽃피어 나다. 화성은 조선시대 22대 임금인 정조께서 건립한 것이다. 문화재가 흥미를 끄는 것은 왜 그 문화재가 거기에 위치하고 그 문화재가 지닌 역사성, 그 문화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이다. 화성을 얘기하려면 정조임금, 사도세자(思悼世子,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임금(정조의 할아버지) 이 세분을 얘기하면 화성의 유래를 알 수 있다. 영조, 정조시대는 조선시대의 폐해라 할 수 있는 당파싸움이 절정을 이뤘고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도 이런 당쟁의 소용돌이에 희생당한 인물로 영조의 미움을 사 28세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다. 정조는 불쌍히 돌아가신 아버지를 항상 슬피 생각하여 한 맺힌 원혼을 풀어주고자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에서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기로 하고 양주 배봉산에서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지금의 화산(花山)으로 묘소를 옮기게 된 것이다. 이곳 수원을 효원(孝園)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서 나온 이야기다. 무덤이름은 현륭원이라 하여 “현명하신 부친을 융성스럽게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다. 더불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현륭원을 지키는 용주사를 창건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세자의 원이 들어서면 묘소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 10리 이내에는 민가를 철거하는 법이 있어 이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킬 새로운 도시 건설이 필요했다. 이에 정조임금은 수원 팔달산이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시를 조성하는데 최적지로 정해 신도시를 건설하게 된 것이며 도시 이름을 화성(수원의 옛 이름)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신도시 화성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를 둘러싸는 성곽을 건설한 것이 화성이 축성된 유래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자주 찾아뵙고자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가까운 곳에 두고자 팔달산 기슭(수원 종로사거리)에 화성 행궁을 지은 것도 부모에 대한 효심이 얼마나 극진했나를 쉽사리 알 수 있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화성을 건설하게 된 명분이 된 셈이다. 「조선왕조실록」39권 정조18년(1794년) 1월 15일자 화성 축조와 관련하여 하명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팔달산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 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지금 깃발을 꽂아 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 “화산(花山)과 유천(柳川)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억만 년 유구한 태평 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다. 성을 쌓을 때 버들잎 모양을 본뜨고 내천자의 형태를 모방하여 구불구불 돌아서 기초를 정하고 인가들도 성 안에 살게 할 터인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낙성 등이 아뢰기를 “전하의 계책은 신들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화성을 왕권강화 정책이 내포된 건축으로 설계한 정약용
화성의 건축설계는 화성 축성 당시 규장각 문신 실학자인 정약용이 설계를 했고 이는 정조임금의 실학정신에 입각한 혁신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화성은 정조 18년(1974)에 시작하여 2년 9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됐다. 화성축성 공사 전 과정과 설계도면은 “화성 성역 의궤”에 기록 되어있다. 화성은 팔달산 정상에서 큰 타원을 그리면서 도시 중심부를 감싸는 형태로 성곽의 둘레가 약 5.4키로 성벽 높이가 약 4ㅡ6미터 정도로 성벽에 최대한 많은 방어시설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1997년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화성의 시설물은 4개 성문을 따라 좌우로 연결된 성곽에 41개의 시설물이 설치되어 주로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동서남북으로 방향에 따라 그 시설물 이름을 붙였는데 팔달문에서 팔달산을 오르는 방향부터 갖춰진 시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팔달문(八達門,남문) ㅡ 남치(雉) ㅡ 남포루 ㅡ 서남암문(暗門,화양루) ㅡ 서남포사(鋪舍) ㅡ 서남각루(角樓) ㅡ 서남치 ㅡ 서포루(鋪樓) ㅡ서암문 ㅡ 서장대 ㅡ 서노대(弩臺) ㅡ 서이치 ㅡ 서포루(砲樓) ㅡ 서일치 ㅡ 서북각루 ㅡ 화서문(華西門,서문) ㅡ 서북공심돈 ㅡ 북포루 ㅡ 북서포루 ㅡ 북서적대 ㅡ 장안문(長安門,북문) ㅡ 북동적대(敵臺) ㅡ 북동치 ㅡ 북동포루 ㅡ 화홍문(華虹門)(北水門) ㅡ 동북각루(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ㅡ 북암문 ㅡ 동북포루 ㅡ 동암문 ㅡ 동장대(연무대) ㅡ 동북공심돈(空心墩) ㅡ 동북노대 ㅡ 창룡문(蒼龍門,동문) ㅡ 동일포루 ㅡ 동일치 ㅡ 동포루 ㅡ 동이치 ㅡ 봉돈(烽墩) ㅡ 동이포루 ㅡ 동삼치 ㅡ 동남각루 순으로 이어진다. 화성을 잘 아는 분께 물어보니 화성 성벽을 따라 여러 형태의 건물이 축성되고 성벽이 밖으로 돌출되고 안으로 들어가게 지은 것은 적들로부터 우리 진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하고 나아가 우리병사들이 배치되어 있는지를 모르게 하면서 적병을 탐지하고 감시하는데 유리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 병사들끼리는 서로 위치를 알리고 신호를 보내는데 용이하도록 성벽을 쌓았다고 하니 참으로 선조들의 깊은 안목과 지혜, 전략상 군사적으로 진지를 방어하는 책략이 탁월하다. 이는 당시 실학사상에 기반을 둔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두뇌가 있었기에 가능 했으리라 여겨진다. 화성이 정조임금의 통치 이념, 효의 철학에서 나온 문화유산으로 화성을 축성토록 지침을 내리신 분이 정조임금이라면 화성을 설계한 건축 설계사는 다름 아닌 다산 정약용이다. 당대의 최고 실학자인 정약용은 관직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 분으로 더 잘 알려진 분이다. 내가 화성에 관해 문화유산 이야기를 쓰려니 정약용의 훌륭함을 두 번 알게 하는 계기가 주어졌다. 한번은 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 답사 기회로 정약용의 유배지인 전남 강진을 찾아 이분의 삶을 알았고 또 한번은 문화재청이 마련한 다산사상에서 배우는 공직윤리 교육 시 강사로부터 정약용의 청렴에 대한 가르치심을 배우면서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설계하신 정약용의 위대함에 관해 알게 됐다.
그 강사님의 말씀은 “방화수류정은 아름답고 화성은 견고한 성이다. 복원된 문화재는 문화재가 아니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국제 심사를 받을 때 의아해 했다. 복원된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그래서 규장각에 있는「화성 성역 의궤」를 보이며 설계도대로 보수를 한 것으로 입증이 되니 이를 인정하고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화성은 정약용의 독특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또 정약용은 지렛대 원리를 이용한 운반기술을 발명했다. 문화재청 직원들 가운데 화성을 안 가본 사람들도 있을 테니 다들 화성을 가 봤으면 좋겠다.”고 화성을 극찬한 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화성 명칭 화수 171건 그런데 수원 성곽이 「화성」이라는 문화재 명칭을 얻기 까지 수난이 많았다는 점을 알아보는 것도 큰 공부라고 보아 소개를 하려고 한다. 문화재 명칭의 수난사라고 할까. 문화재관리국 시행문서(1997. 1. 15. 기념86741ㅡ 45) 청원에 대한 회신내용을 보면 “경기도 수원시 소재 사적 제3호 수원 성곽의 문화재 명칭을 원래의 이름인 「화성」으로 바로 잡아 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 작업을 실시한 결과 97. 1.1자로 「수원성곽」을 「화성(華城)」으로 변경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라고 청원인 이종학(수원시 장안구 화서동 69ㅡ6번지)에게 통보를 하였다. 이때까지 화성의 이름은 일제에 의해 “고적 제14호 수원성곽”이라고 지정하면서 화성 명칭이 왜곡되어 쓰여 졌고 광복이후 우리 정부마저 “사적 제3호 수원성곽”이라고 지정함으로써 잘못을 저지르는 우를 범했다. 이미 고인이 된 고) 이종학은 정조대왕 및 충효자료(183종 219점)를 수원시에 기증했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관해 많은 연구와 선양사업을 펼친 분으로 우리 기억에 남는 향토 사학자이시다. 정조대왕 및 충 효 자료도록(이종학 선생 기증 자료, 화성축성 200주년 및 화성 행궁 복원 기념 1996년) 에 의하면 고)이종학은 문화재관리국에 처음으로 화성이 수원성이라고 잘못 불려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아 달라는 청원서를 냈고 화성이라는 이름이「조선왕조실록」에 정조 이래 철종까지 무려171회나 나오며 고종, 순종대에만도 50여회나 나오는 등 이런 고증자료를 통해 정조임금이 지으신 화성이름을 찾는데 기여한 일등공신 이시다. 「조선왕조실록」39권 정조18년(1974년) 1월 15일자 정조의 말씀에는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한 내력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하여 이른 것이다. ▷ 국립고궁박물관 관리과장 이용학 | ||||||||||||||||
게시일 2007-01-10 15:12: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