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54년 만에 화성 일주(후편
깜보입니다
2007. 11. 5. 20:10
54년 만에 화성 일주(후편) | ||||||||||||||||||||||||||
2006년 3월 14일 화성성곽을 꿰뚫어 보다.
꽃샘 봄추위가 기승을 부려 바람이 강하고 차게 불어 몹시 추운 날씨다. 털모자를 쓰고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10시 15분에 집을 나섰다. 걸어서 30분 거리인 창룡문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지난번 2월 19일 예비답사에 이어 오늘은 화성 성곽을 따라 차례차례 축조된 시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사진 촬영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관리가 부실한 것도 파헤치겠다고 내심 다짐하면서 창룡문에 도착했다. 그런데 창룡문에 들어서기 전에 눈에 거스른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창룡문 앞 4차선 도로를 가로 지르는 육교였다.
창룡문을 향해 걸어오는데 육교가 창룡문 성문을 가리고 거추장스럽게 서 있으니 경관을 훼손하고 있어 아래쪽으로 이동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생각을 하고 짓지 왜들 그렇게 소견이 좁게 지었는지 아쉽다. 평일이고 날씨도 추운 탓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다녔고 일본 관광객들이 단체로 와서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유심히 관광을 하는 게 눈에 띠었다. 이제 화성을 창룡문 부터 순서 있게 둘러보기로 한다. 내 예기를 들으면 화성을 알고 수원을 찾아오고 싶을 것이다.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으로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 복원하였다. 돌로 쌓은 홍예문 위에 단층 문루를 세웠으며 밖으로는 한 쪽이 터진 반원형의 옹성을 쌓아 성문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니 대문 가장 아랫부분이 녹이 슬고 뜯겨져 나가 보기가 흉하였다. 홍예문 성문 왼쪽에는 건축 당시 축조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창룡문 성안의 모습도 4차선 도로에 주택, 상가들로 시가지를 이루고 있고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건물층수가 제한되는 등 이런 노력으로 화성 성곽을 보존해 나가고 있다. 창룡문을 지나면 “동북 노대”가 위치해 있다. 성벽에서 타원형으로 돌출시켜 적의 동향을 살피는 진지로서 성벽에서 적을 향해 활을 쏘도록 일정하게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어서 “동북 공심돈”이 위치해 있다. 공심돈은 성벽 위로 망루를 세운 것인데 전돌을 네모나게 쌓아 수비와 공격도 하고 포를 쏠 수 있는 시설로 한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위로 올라가는 좁은 통로가 있고 이층으로 오르니 망루가 있어 적을 관찰하도록 설계 되었다.
동북 공심돈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니 군사를 훈련시키던 “동장대”에 이르렀다. 이 곳은 사방이 확 트인 낮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화성 시설물중 가장 위용이 있는 곳이다. 훈련을 시키는 곳이라 해서 연무대라고 부른다. 연무대 앞을 지나니 화성 관람 매표소가 있고 화성열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탑승차량 3량으로 구성된 열차는 연무대를 출발하여 팔달산 중턱까지 운행한다. 어른은 1500원, 아이들은 700원을 받는다고 한다.
연무대 바로 앞 주택가에 연무초등학교가 있다. 이 동네는 연무대 이름을 따 동네이름도 연무동이라 부른다. 화성 성곽은 아기자기한 모습에 구경하는 게 흥미가 있다. 화성 성곽은 팔달산을 빼고는 지형이 평탄한 시가지를 돌며 곡선을 그으며 흐트러짐 없이 도심을 둘러싸고 있다. 하늘에서 누군가 성곽을 만들어서 고스란히 지상에 내려 옮겨 놓은 듯 하다. 시설물 하나하나가 앙증맞고 반듯하다. 성곽을 걸으며 연이어 적재적소에 배치된 시설물을 견주면서 보고 온 길을 뒤돌아 성곽의 뒷모습을 보고 상념에 잠기노라면 지루 하지가 않다.
이어서 동북포루에 다다른다. 포루(鋪樓)는 성벽을 돌출시켜 만든 치성위에 건물을 세워 초소로 사용했다. 언덕 아래서 동북포루(누각)를 바라보니 아래로 길게 뻗어 내린 성곽 꼬리가 마치 용이 하늘로 비상하는 모양 같다. 이어서 북암문에 다다른다. 암문은 성곽의 주요지점에 축조한 성의 비밀 통로로 성곽이 굴곡 된 부분이나 후미진 곳, 수목이 가려서 잘 안 보이는 곳에 설치하였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양식이나 무기, 물자를 반입하고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하는 용도로 만들었다.
이어서 화성 시설물중 건축미와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빼어난 동북각루(방화수류정)와 화홍문이 반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화홍문을 통해 성안을 관통하는데 예전에는 개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개천이 내 고향집 근처를 지나는데 지금도 수원 토박이들은 개천 근방에 사는 사람들을 버드 내 산다. 버드 내 동네라고 부른다.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수문을 세웠는데 화홍문은 북수문에 해당한다.(남수문/미복원) 하천 위로 7개의 홍예문(수문)을 화강암으로 쌓아 물이 지나가고 다리 역할도 하도록 설계했고 그 위로 누각 건물을 지었다. 화홍문에서 화(華)자는 화성을 의미하며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로 장쾌한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쳐나는 모습이다. 또 눈여겨 볼 것은 방화수류정의 벽면에 그려진 십자가 무늬다. 지금도 십자가 문양이 희고 선명하게 보존되어 당시의 건축미와 기술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곳 화홍문은 내가 중학교 시절 다니던 길로 소시장과 대장간, 초가집들, 피난민 판자촌이 많았는데 지금 보니 문구점, 여관 등 상가로 변했다. 이어서 감시초소인 ”북동치“에 다다른다.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는데 치는 ”꿩“이라는 뜻으로 본래 꿩은 제 몸은 숨기고 밖을 잘 엿보기 때문에 시설의 용도와 그 뜻이 통해서 ”치“라고 한다. 치는 성곽의 요소에 성벽으로부터 돌출시켜 전방과 좌우 방향에서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어서 4대문 중 북문에 해당하는 ”장안문“에 다다른다. 장안문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홍예문 위에 2층 누각을 지은 성문으로 서울로 가는 관문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불타 파괴된 것을 76년에 복원하였다. 당시에는 이곳 주변이 온통 논이었는데 지금은 장안문에서 화서문 구간까지 성곽을 따라 시민휴식처인 장안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성곽에 바로 인접해 공원이 있으니 경관도 보기 좋고 교육적으로도 이 만큼 좋을 데가 어디 있을까. 장안문 좌우로 적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적대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접근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이어서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에 이르렀다. 방화수류정, 화홍문이 한 쌍을 이뤄 그 경관이 아름답듯이 이곳 화서문, 서북공심돈 또한 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기회에 지적하고 싶은 것은 화서문 바로 앞에 대형 문화재 안내판이 있는데 화서문 전경을 가리고 있어 불편한 느낌이 든다. 화서문과 공심돈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려면 이 안내판이 방해가 되니 안내판 위치를 화서문 왼쪽으로 옮기면 좋겠다.(지금은 공심돈 방향에 위치) 그래야 사진을 찍으면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없이 화서문, 공심돈이 함께 찍혀 사진이 멋있게 나오고 기념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겠지.(수원시에 시정토록 건의하겠음) 화서문은 팔달문과 함께 보물(제 403호)로 지정돼 있다. 이어서 “서북각루”와 “서일치”에 다다른다. 화성의 4개 각루 중 팔달산 자락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 네모서리에 세운 누각으로 주변감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하도록 높은 마루식 목조건물이다. 조금만 더 가면 팔달산이다. 시내를 바라보니 멀리 광교산이 보인다.
이어서 “서포루”와 “서이치”를 거쳐 팔달산 정상에 오르니“서장대”가 늠름하게 서있다. 서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만든 치성가운데 군사들이 머물 수 있는 누각을 갖추고 내부에 대포를 설치하였다.
서장대 앞에서 포졸이 경비를 서고 관광객을 맞고 있는데 물어보니 아르바이트 대학생이라고 한다. 아침10시부터 오후5시 까지 일 한다고 한다. 서장대는 일명 화성 장대라고 부르는데 화성의 군사를 총 지휘하는 본부로 성의 사방을 내려다보면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지었다. “서남암문”과 “서남각루”를 거쳐 “남포루”와 “남치”를 끝으로 팔달산 정상에서의 답사를 끝내고 성곽을 따라 내려오니 팔달문을 눈앞에 두고 성곽이 끊긴다. 수원의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으나 주변이 시장 상가로 화성가운데 유일하게 성곽이 끊긴 곳이다. 도로 바닥에 성곽을 그린 박석을 깔아 팔달문 좌우로 성곽이 연결되도록 표시를 하는 게 좋겠다. 팔달문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화성행궁으로 향했다. 팔달산 아래에 위치한 행궁을 가니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앞에서 종로4가 4차선도로 까지 광장을 조성키 위해 주택, 상가를 이주시킨 상태고 우체국 건물만 1동 남아 헐릴 때를 기다리고 있다. 머지않아 국도를 지나면서도 행궁을 볼 수 있어 반가운 일이다. 전에는 행궁 앞을 주택이 가려 알 수 없었는데 다행이다. 행궁 담 너머 신풍초등학교가 있고 동 이름도 신풍동이라 부른다. 행궁이 있는 곳이라 수원에서도 역사가 서린 동네다. 행궁은 왕이 정궁을 떠나 지방을 행차할 때 임시 머물던 곳으로 정조가 부친의 묘를 참배할 때 머물렀다. 또한 이 곳 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기도 했다. 수원은 이 곳을 관광명소로 조선시대 궁중 문화를 재현하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가꾸어 가고 있다.
행궁을 둘러보고 다시금 성곽을 따라 나선다. 팔달문 옆 남문 시장 안 거리를 5분정도 지나가니 화홍문(북수문)을 거쳐 내려오는 수원천을 다시 만났다. 이 곳에 남수문이 있었는데 시장 상가를 이루어 여건상 복원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남수문이 있던 자리부터 언덕을 따라 성곽이 다시 이어진다. “동남각루”, “동삼치”, “동이포루”를 거치니 “봉돈”에 다다른다. 일명 봉화대라고 부르는데 화성 봉돈은 화성 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며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을 통신 신호로 사용하였다. “동이치”, “동포루”, “동일치”, “동일포루”를 끝으로 화성답사의 첫 출발점 이었던 창룡문에 도달했다. 이제 화성을 한바퀴 돌고 나니 오후 5시 40분 저녁 무렵이 되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시간이 10시 15분 이었으니 집에서 오가는 시간을 빼면 성곽을 도는데 장장 6시간이 걸렸다. 이제 국민과 함께 하는 이야기를 쓰는 일만 남았다. 화성을 정복한 개선장군이 된 양 휘파람을 불며 터덜터덜 발길을 재촉했다. 나도 문화재 해설사가 될 자격이 있다며 자화자찬 흥얼대며 집을 향했다. 수원 시민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화성을 품고 세계문화유산을 곁에 두고 사니 내 고향이 멋지고 자랑스럽다. 수원 화성을 오려면 전철1호선, 강남 양재 사당에서 버스를 이용하고 특히 수원역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1일2회 오전10시, 오후2시 /월요일은 휴무)하면 편리하게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다. | ||||||||||||||||||||||||||
게시일 2007-01-17 15:26:0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