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궁능활용과에서 보낸 짧았던 한달의 역사기행

깜보입니다 2007. 11. 5. 20:21
궁능활용과에서 보낸 짧았던 한달의 역사기행
1. '보존과 활용' 그 무게중심을 찾아서

사회복지관에서의 자원봉사활동을 마치고 시작된 궁능활용과에서의 수습은 크게 두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시기상으로 전반 보름은 문화재자료실에서 우리 문화유산을 설명해 놓은 책들과 함께 지냈고, 후반 보름은 4대궁, 종묘, 동구릉, 서오릉, 선정릉, 헌인릉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으로 이뤄졌다.

기초체력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약 20여권의 책을 찾아 읽어보면서 무지했던 우리의 것, 무관심했던 지난날 모습을 반성하며 되돌아보게 했고,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했다. 문화재청을 지원하면서 가졌었던 활용우선의 가치관 역시 보존없는 활용이 있을 수 없다는 다소 균형잡힌 생각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그 균형은 가치관에 따라 상대적이며 시대에 따라 가변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중요한 것은 문화재청 구성원간 균형의 편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우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지고 직접적인 문화향유 욕구가 증대되는 오늘날 규정과 관습에 얽매인 보존위주의 행정편의적인 관행보다는 관람 여건과 보존기술력이 허용하는 한 개방하여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하고 실습하면서 전국민적인 관심과 애정을 유발시키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지배적인 가치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자면 발전된 문화재 보존기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흥미와 감동을 유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궁능의 활용과 보존방안이라는 주제로 4월에 종합수습보고서가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짧은 이해와 답사에서의 느낀 점을 위주로 간략히 구성해 보았다.

2. 문화유산을 보는 눈 : 眼目

관찰력과 분별력으로 나타나는 안목은 ‘관심, 정보, 이해를 바탕으로 한 느낌과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언명은 이를 함축하는 명언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명목상의 정의내림은 일면 간단명료하긴 하지만 어떻게 하면 안목을 키울 수 있는가 하는 직접적인 처방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어느 책에선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문화유산을 보는 방법으로 ‘공간, 시간, 인간’을 제시한 구절이 머릿속에 남는다.

우선 문화유산은 원래 제 자리에 있어야 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곳에, 그 방향으로, 그 크기로 있어야 했는가를 생각하면 좀더 의미있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경복궁은 왜 북악을 안산으로 하고 낙산, 인왕산, 목멱산으로 둘러싸인 남향으로 지어졌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바라보면 조상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삶의 방식까지 조금 유추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문화유산이 만들어진 혹은 생성된 시기, 시대를 따져보아야 무슨 뜻으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얼마의 자원과 인력이 동원됐는지, 어떤 기술이 접목됐는지 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불상을 만들어도 신라시대의 것과 조선시대의 것은 재질과 기술, 의미 등이 다르다는 것이다.

셋째, 문화유산은 누가 만들었으며 혹은 누가 재정적, 인적, 물적 지원을 하여 만들었으며, 만든 이의 혼이 어떻게 반영되었고, 구현하고자 했던 의지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생각하며 바라보라는 주문이었다. 결국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평소 생각, 가치관, 언행 등을 살펴보아야 만이 그 유산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에 가서든, 미술관에 가서든 우리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보고 단편적인 평가로 지나치기 일쑤지만 종합예술작품의 격에 비추어 보면 합당한 대우가 아니었음을 시인해야만 하겠다. 하물며 선조의 뛰어나고도 소중한 문화유산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3. 잘 못된 상식에서 비롯된 몇 가지 오해

경복궁은 누가 불태웠을까? 흔히들 알고 있기로 임진난이 나고 선조임금이 평양으로 이어하자 화난 한양백성들이 불을 질렀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직 논란이 있긴 하나 남아있는 문헌기록으로 보았을 때 왜군이 한양에 들이닥치고 며칠사이에 불지른 것으로 나타난다. 한양으로 무혈입성한 왜 장군이 궁안은 텅비어 있었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음을 보고한 문서가 발견되었고, 선조가 떠난 당일은 억수같은 비가 내렸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방화자는 성난 백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일제시대에 왜곡된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광화문에 세워져 있는 해태상은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만들었다? 흔히들 해태상은 화기를 잡아먹는 동물로 인식하여 화산의 형상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아 궁을 지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해태의 시선이 관악산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사실은 현재의 해태상은 관악산을 보지 않고 남산을 보고 있다. 이는 일제시대 남산에 있던 신사를 바라보게끔 옛 중앙청이 만들어지자 3공시절에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그대로 방향을 따르게 된 것이다. 해태상의 기능 역시 일제시대 만들어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원래 해태는 성질이 바르고 곧아서 사람들이 싸우면 잘못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떠받으며 깨문다고 한다. 틀림없이 시비곡직을 가려내는 영물이므로 관리의 부정과 비리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사헌부가 있던 육조거리에 세워 정의와 법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경복궁 자리를 정한 것은 무학대사였다? 흔히들 往十里전설이나, 북한산정계비 한 구절을 들어 무학대사가 태조의 명을 받아 궁의 자리를 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고승과 정가의 다툼까지 기록한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지은 산수비기를 들어 설명하는 견해들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조선왕조의 개창자 그룹인 정도전이 주도하여 궁의 위치와 명칭을 정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만 정도전이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역모죄로 죽자 의도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후대에 각인되어져 내려오는 설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4. 종묘와 4대궁을 돌아보며 느낀점

(1) 전각의 엄격한 위계질서

‘전·당·합·각·재·헌·루·정' 암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궁궐 건축에 있어서의 격을 나타내는 순위이다. 임금이 있는 곳은 보통 전·당으로 불리며 당상관, 당하관은 양화당, 희정당 등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신분과 없는 신분을 나누는 기준이 된 직급이다. 이처럼 궐내 건축은 신분과 용도에 따라 이름이 정해졌으며 그에 맞춰 엄격하게 만들어졌다. 왕과 왕비가 머무는 곳인 강녕전, 교태전에 용마루가 없는 것도 그 격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2) 궁궐의 배치와 자연미
자금성과 달리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은 사각형의 반듯한 모양은 아니다. 자연지형 그대로 곡선의 모양새를 지니며 굳이 남향을 고집하지도 않았다. 창경궁은 동향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과 조화된 삶을 강조한 선조들의 의식에서 비롯되며 풍수지리에 맞는, 하지만 그에 얽매이지도 않는 유연한 모습으로 읽혀진다. 천시(天時)가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人和)만 못하다는 진리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3) 유교국가 궐내에 웬 불탑?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편 나라인데 반해 궐내에는 버젓이 불탑이 놓여져 있다. 비단 창경궁 뿐 아니라 경복궁에도 많은 탑이 서있는 것이 사실이다. 궐내에 잔디가 심어진 것도 그러하거니와 일제시대 건물이 헐리면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서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나 집현전 학사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상소가 빗발쳤으리라 짐작해본다.

(4) 조상들의 자연미에 못 미치는 후예
궁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철제로 만든 안내판인데 목조와 돌로 만들어진 건축물에 비해 초라함이나 격이 떨어지는 것을 바로 눈치챌 수 있다. 조상들은 나무 한그루를 심어도 의미를 따지고 위치를 가렸을텐데 조상들의 섬세함을 ?i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애써 찾아오는 관광객을 반기는 분위기있는 안내판이 시급히 도입되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창경궁에 있는 철제 임시편의점은 종합관광기념품 판매점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 같다. 지금으로선 외국인 관광객을 반겨 맞기는커녕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휴식처 제공기능에 그치는 형편이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관광지의 매표소처럼.



(5) 생명력이 없는 궐내
차가운 날씨 탓인지 궐 내부는 너무 조용했다. 생명의 활기라고는 찾기 힘들었다. 창덕궁 낙선재에 마련된 재현전시품만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4대궁 어디를 가든 빈 궁전이었고, 사람의 온정은 찾기 힘들었다. 덩그러니 높이 솟은 천장, 차디찬 기운이 엄습하는 온돌바닥은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추측하기 어렵게 했다. 창덕궁에서 이뤄지는 안내원의 설명 또한 궁궐에 대한 조그마한 지식이라도 갖춘 관람객이라면 굳이 귀기울여 듣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고,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텅 빈 건물만 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용을 채우는 일이 시급함을 느낀다. 두 번 찾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5. 삶과 죽음의 길은 예 있으매

(1) 잘 정비된 도로판과 대비되는 안내판

시내에서 찾아가는 서오릉, 구산역에서 도보로 20분여 다행히 도로표지판이 잘 정비되어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산책로로 형성된 입구 부분의 안내판은 광고판과 주차된 차로 인해 산만해 보인다. 예전 임금이 승하하고 슬픔에 잠겨 이곳으로 왔을 왕비 및 어린 세자의 마음을 가늠해보긴 힘들었다. 그 밖에 동구릉, 선정릉을 찾아가는 데에도 그렇게 큰 어려움은 없었으며 대체로 주차시설은 잘 되어 있었다.

(2) 영하 5도의 날씨에도 봉분 주변은 따스했다.
동구릉을 찾아간 날은 가장 추운 날씨였다. 우선 건원릉을 찾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봉분양식의 흐름을 찾아보았다. 특이한 점은 잔디떼가 아닌 억새풀이 벌초도 없이 산발했고, 석사자 대신 석호가 봉분을 지키고 있었다는 점과 생각보다 봉분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봉분주위는 날씨와 상관없이 따스했다. 높은 곳에 돌출되어 조성된 봉분인데도 바람은 불지 않았고 햇볕이 잘 들었다.

무학대사가 묘자리를 살펴본 뒤 어느 고개에서 한숨을 돌렸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망우리 고개 일화가 일응 타당한 듯, 명당으로 보였다.

(3) 조선 전·후기의 봉분 변화
전기의 봉분이 규모가 크고 웅장한 반면 후기로 올수록 작고 간소하게 만든 모습이 눈에 띤다. 장명등은 8각에서 4각으로, 석인 역시 비현실적 크기에서 실제크기로 줄었으며, 병풍석은 없애고 난간석만으로 치장하는 방법으로 후대로 내려올수록 간소화되는 특성을 보였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치적이 많은 왕일수록 문·무인석이 웃고 있으며 평가가 좋지 않은 왕의 문·무인석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외에 홍살문, 참도, 정자각, 비각의 모양새나 구성은 대략 비슷하였다. 대체적으로 보존이 잘 이뤄지고 있었다.

(4) 대비되는 안내판의 느낌

역시 안내판만큼 이미지를 좌우하는 것은 없었다. 릉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은 안내판에 씌여진 문구에 먼저 눈이 가게 되고, 이를 전부인양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에 비춰 현 안내판은 정보나 재질, 디자인이 많이 부족하였다. 좌측의 안내판이 대표적인데 그나마 울타리 밖에 방치되어 있어 존재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조속한 철거가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반면 오른쪽의 문조릉의 안내판은 재질이 목조로 되어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5) 정조대왕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영조임금의 릉인 원릉에 깔려있는 박석들이 보인다. 참도라고 하는데 왼쪽 부분이 약간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길은 신도라 하고 혼령이 다니는 길을 의미한다. 오른쪽의 보다 낮은 부분은 어도라고 하며 참배시 임금이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정자각에 오르는 데까지 연결되어 구름문양으로 장식된 계단까지 이어져있다. 정조임금도 이 길을 따라 참배하러 다녔을 것이다. 개혁군주 정조임금의 발자취를 잠시나마 따라가 본다.




6. 한달간의 역사기행을 마치며

‘파란눈에 비친 하얀조선’ 이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를 보면 서양인들은 우리의 다양한 모자에 반했던 것 같다. 크기, 모양, 색상, 디자인 등 모든 면에서 화려하고 엄청나게 다양했던 종류에 눈이 휘둥그래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토록 다양했던 옛모자의 모습을 이제는 어디서도 만날 수가 없다. 예술(Art)이 도덕(Morale)을 낳고 도덕은 다시 문명(Science)을 낳아 인류역사에 공헌한다는 모델을 비춰볼 때 우리 문화유산이 가진 잠재력과 생산성은 그 중요성에서 다언을 요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다만 한가지 우리의 문화를 대할 때에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역사만이 최고다라는 민족감정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지난 왕조의 유물을 예찬한 나머지 ‘현대적 조선사람’이 되어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다.

“한국적 가치에 대한 르네상스가 확실히 예견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와 같은 기회상실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이 끝내 일본에 강점되어 문화의 고유성을 상품화 할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당한 채 표류하는 불운을 겪은 우리로서는 서방사회 기자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의 문화적 역할을 규정한 Maastricht 조약을 벤치마킹의 예로 제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 범유럽인들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지식향상과 보급
· 유럽의 중요 문화유산 보호
· 비상업적 문화교류 활성화
· 시청각 부문을 포함한 예술 및 문헌제작


▷ 혁신인사기획관실 행정사무관 황권순
게시일 2007-03-08 16: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