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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에도 문화재가 있다는 인식과 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의 이른바‘신안보물선’수중발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중심으로 12건의 수중 발굴이 더 진행되었다. 발굴결과 얻어진 대부분의 해양유물은 고대선박의 잔해와 그 선적품인 도자기이며, 시대적으로는 모두 고려시대 유물이다.
해양유물, 또는 수중문화유산이 중요한 이유는 비교적 도굴의 위험이 없이 수백 년 간 모습을 잘 간직해 올뿐만 아니라, 그 시대 어느 한 시점의 문화적 요소들을 일련의 세트로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한 예로 신안해저발굴에서 나온 14세기 무역선의 다양한 물품들은 1323년 동북아시아의 국가간 교류현황과 소비층의 생활상을 종합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중세 무역선 발굴 작업으로 시작된 한국의 수중발굴은 2000년대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을 맞는다. 그전까지는 5년에서 7년 정도의 간격을 두고 해양유물이 발견되어 발굴을 했으나 2002년부터는 매년 수중발굴이 이루어지고 있고, 어떤 해는 두 세 차례의 수중발굴조사가 진행되는 등 빈도가 잦아졌다. 또한 전라북도 군산 앞바다 새만금 방조제 주변의 바다 등 서해안 해상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특히 군산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에서는 한국 수중발굴사상 최초로 전 과정을 수중촬영 했다. 그전의 발굴에서는 대부분 개흙물에 시야가 흐려 수중촬영을 해내지 못했다.

이처럼 수중발굴이 증가하는 것은 주로 주민들의 신고나 전문도굴꾼들의 체포, 또는 보물사냥꾼들의 제보 등에서 기인한다. 잠수장비의 급격한 발달과 수중레저인구의 증가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닷속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 수중발굴 증가의 가장 큰 배경이다. 잠수장비를 갖춰 키조개잡이를 하던 어부의 손에 도자기가 걸려 나오고, 바다의 보물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들의 손에도 고려청자가 들려나온다.
이렇듯 어떤 형태로든지 바닷속 유물이 우리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현재의 실정이다. 앞으로 더 많은 수중문화유산의 발견과 수중발굴이 이어질 것이며, 또한 이들 해양유물의 해석과 연구활동도 활발해지리라 기대한다.
이번 글에서는 수중발굴로 얻어진 해양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도자기 선적방법과 선원들의 선상생활의 한 단면을 찾아보려 한다.
고려시대 청자생산은 주로 바닷길이 좋은 해안가를 끼고 있는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배를 이용한 대량수송의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주요 도요지인 강진, 해남, 부안, 부여, 보령, 강화, 송화 등은 한결같이 강이나 바다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청자의 선적 방법은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화면과 유물을 통해서 본 실체는 다음과 같다. 도자기는 선체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형태로 실렸다. 생산지에서 먼저 30~40개정도 포갠 다음, 눕혀서 긴 열을 따라 나무막대를 사방으로 댄다. 막대 끝과 끝을 줄로 연결해 그 안에 묶인 도자기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다. 실제로 십이동파도에서 수중발굴된 나무막대 끝은 줄로 연결하기 좋게 홈이 파졌다. 도자기와 도자기 사이에는 짚을 넣어 완충역할을 하게했다. |
| 이렇게 묶인 도자기는 지게나 우마로 선착장으로 운반되며, 다시 선착장에 쌓인 도자기는 배 밑창으로 차곡차곡 선적된다. 선체 밑판에 도자기 묶음을 적절히 깐 다음 그 위에 짚이나 갈대 등 완충제를 두텁게 깔고 다시 도자기 묶음을 놓는다. 이때 도자기 묶음과 묶음사이에는 갈대나 짚을 대어 배의 진동에 대비했다. 수중발굴에서 도자기 사이에 있던 짚과 갈대 잔해 등을 수습하였다.
이렇게 쌓는 방법이 도자기를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는 것 같다. 상자를 이용하거나 배에 단을 만들어 도자기를 적재한다면 그 만큼 공간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완도에서 발굴한 도자기 운반선(10톤급)에서는 3만여 점의 고려청자가 나왔고 십이동파도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배에서도 1만여 점을 인양했다. |
| 그동안 수중발굴에서 개흙물의 흐림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침몰선의 형태를 촬영할 수 없고 직접 볼 수도 없었지만,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은 충분한 수중시야가 확보되어 도자기가 배위에 선적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비디오 촬영도 가능했다. 이런 발굴여건에 의해 고려시대 도자기 운반방법과 선적방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침반, 해도 등 항해도구가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항해가 일반적이었다. 선원들은 섬과 연안의 높은 산 등을 가눔하고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때는 지형지물 숙지가 중요해서 항해 경험이 축적된 사람이 숙달된 뱃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항해 방향을 잡는 데는 해와 별자리를 보기도 했고, 어떤 때는 바다 빛깔을 보고 바다 위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다.
돛배의 항해에는 조류와 바람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항해시간이 많이 걸린다. 물때, 바람 등에 의해 짧은 거리지만 며칠씩을 항해하기도 하고, 바람을 기다리면서 바다에 그대로 정박해 있기도 한다.
항해하면서 선원들은 배위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또한 술을 담글 수 있는 쌀이나 누룩, 된장, 간장 등을 가지고 다녔다.『만기요람(萬機要覽)』에 조선시대 조운선에 지급되는 품목 중에는 술빚을 쌀과 장 담글 콩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십이동파도 도자기 운반선 발굴에서 함께 나온 솥, 그릇, 숟가락, 물 항아리, 된장, 장 등을 담을 각종 단지, 솥 밑에 까는 돌판 등 생활용품들은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 해준다.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에서 솥은 2점이 나왔는데 선체의 중앙부분 취사하는 공간에서 발견되었다. 한 점은 다리 3개가 부착된 솥이고, 나머지 한 점은 다리가 없는 솥이다. 2개나 되는 솥은 이배에 제법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선박인 완도선(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도 앞바다에서 발굴)에서도 다리 3개 달린 솥이 한 점 나온바가 있다.
 사용한 흔적이 뚜렷한 청동숟가락은 24.5cm 크기이며 오늘날 것과 거의 구분 없는 숟가락이다. 젓가락은 발견되지 않아 뱃사람들이 이는 사용하지 않았거나 나무젓가락을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완도선에서는 5점의 숟가락과 국자가 나왔다.
 각종 단지와 항아리 파편이 여러 점 발굴되었는데 이는 된장이나 장, 소금 등 각종 양념을 담았던 용기로 추정된다. 커다란 물항아리 파편도 나와 물을 항아리에 담아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십이동파도 수중발굴에서, 배에서 밥을 지을 때 바닥에 불이 붙지 않도록 까는 돌판 세 점을 인양하였다. 돌판은 모두 그을려 있었고 납작한 형태의 일반 돌이다. 2005년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발굴한 ‘안좌도선’에서도 돌판 1점이 나왔고, 이것 역시 그을린 형태가 뚜렷하다. 안좌도선에서는 땔감으로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 나뭇가지, 원통목 등이 같이 발견되기도 했다.
숫돌은 안좌도선에서 1점이 나왔고, 그전 완도선에서 1점, 신안선에서는 4점의 숫돌이 나오기도 했다. 항해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칼이 필요했을 것이고, 칼 가는 숫돌은 필수적으로 가지고 다녔던 도구였다.
이외에도 완도선에서는 시루가 나오고, 청동 밥그릇, 나무함지, 나무망치, 조새, 나무쐐기 등이 나와 선상에서의 생활도구가 많이 밝혀졌다. 시루는 뱃사람들이 항해 중 해신당을 지날 때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제사용 떡을 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함지는 요즘의 세수대나 설거지통이었을 것이고, 나무망치는 헐거워진 선박의 여러 부분들을 쐐기를 박아 단단히 할 때 사용하였을 것이다. 조새는 굴을 따는 도구인데, 요즘 서남해안에서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형태이다.
 배위에서 쓰던 밧줄과 닻을 묶던 밧줄도 일부 발굴되었는데, 모두 칡넝쿨 껍질을 벗겨 꼬아서 만들었다. 굉장히 질기고 튼튼한 밧줄이었다.
종합해본다면 고려시대 선원들은 돌판에 철제 솥을 얹고 나무를 때 밥을 했다. 청동 밥그릇에 담아 청동 수저로 밥을 먹었으며 각종 양념단지와 큰 물 항아리를 싣고 다녔다. 음식 자르는 칼이 안 들면 숫돌에 날카롭게 갈아 사용하였다. 밥을 먹고 나면 나무함지에 그릇들을 담아 설거지를 했으며 뱃고사나 항해고사 때 시루로 떡을 만들어 제상에 올렸을 것이다. 때때로 배의 조립부분들이 헐거워지면 나무망치로 준비한 쐐기를 박았다.
바람이 없거나 조류가 역방향이면 칡넝쿨 밧줄에 매달린 닻을 내리고 바람을 기다리기도 하며, 필요한 식수나 연료, 음식물을 인근 섬이나 포구에서 조달했을 것이다.
도자기 운반선의 외형은 갑판위에 뜸으로 선실을 만들고 부들이나 왕골로 짠 돛을 중앙에 설치하고, 이물(선수)에는 닻을 감아올리고 내리는 호롱이 설치되어 있다. 갑판 아래쪽 선저에 도자기를 선적하고 잠을 자거나 쉬는 선실 일부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날로 증가하는 해양유물들을 통해 당시 운송하던 도자기 형태와 성격, 운송항로는 물론이고, 도자기 선적방법이나 선원들의 생활 등 해운에 관한 문화를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가 하나 둘 더해가는 상황이다. 도자기는 수 천점에서 수 만점이 나오기 때문에 그 숫자에 비해 많은 정보를 보여주지 않지만, 선상생활유물은 그 당시 선원들의 삶을 복원해 내는데 결정적인 자료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자료들을 모으고, 문헌기록과 관련 해양문화를 함께 연구한다면 고려시대 뱃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고스란히 복원해 낼 수 있으리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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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해양유물연구과장 곽유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