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도자사와 선박사의 틈을 메우는 태안 수중 발굴 [문환석]

깜보입니다 2007. 11. 5. 21:05
도자사와 선박사의 틈을 메우는 태안 수중 발굴 [문환석]



근래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고려청자와 청자 운반선이 발견되어, 이와 관련된 내용이 연일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일명 ‘보물선 신드롬’이라고 여겨질 만하며 일부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로 인해 문화재 신고에 대한 보상금 문제가 커다란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언론 보도가 나간 이후 일 년에 한두 건에 불과했던 수중문화재 발견 신고 건수가 태안 지역에서만 벌써 7건 이상이 들어오는 등 수중문화재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순기능이 있기도 하다. 이에 다음의 글을 통해, 최초 발굴 현장인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의 생생한 실황을 시작으로 발굴 후 현재까지의 경과와 동반 유물들의 역사적·사회문화적 의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수중발굴과의 보물, 수중문화재


2007년 5월 25일 연합뉴스에서 “태안 앞바다서 고려청자 대접 건져” 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구연부가 일부 깨진 순청자 계통의 사진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신고자 오씨가 어로 작업을 하다 발견한 고려청자를 태안군청에 알린 것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과에서는 곧바로 태안군청에 연락을 취해 신고자의 연락처를 수소문하여 발견 상황을 알아보았다.
당시 발견된 청자는 주꾸미를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소라통발을 건져 올릴 때 주꾸미와 함께 붙어 세상에 그 찬란한 빛을 드러내었다. 일반적으로 주꾸미가 청자를 물고 온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소라통발에 산란한 주꾸미는 외부로부터 알을 보호하고자 주변의 패각류나 청자 등의 물체를 빨판으로 잡아당겨 막아 은폐하는 습생을 가진다. 발견자와의 통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본 결과, 여러 개의 청자 편들도 붙어 왔으나 이들은 버리고 상태가 좋은 한 점만 신고했다고 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다량의 청자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유물의 매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한 긴급 탐사 실시 계획을 세웠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수중발굴과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중문화재의 발굴 조사와 보존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이다. 바다나 강으로부터 기원한 인류 존재(유적지, 건축물)나 활동 자취(난파선, 선적물) 등을 가리키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우리는 수중문화재Underwater Cultural Heritages라고 한다. 수중문화재는 대체적으로 육상의 문화유산보다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한 시대의 문화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이러한 수중문화재의 경우 일반적으로 `난파선과 연관성이 깊다. 교역이나 어로 활동, 해전 등 해상 활동 과정에서 침몰된 선박과 그 선적물들은 당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3백만 척 이상의 난파선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중고고학은 고고학의 영역을 물밑까지 확대한 것으로 매장되어 있는 모든 유물·유적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육지의 고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물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에 육상과는 다른 차원의 과학기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 수중고고학은 1976년 신안선 발굴을 효시로 발전하였다. 완도 어두리, 무안 도리포와 최근의 군산 비안도, 야미도, 십이동파도, 보령 원산도 등에서 총 14건의 수중 발굴이 이루어졌고, 이중 10건은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담당하였다.


조사 과정과 현장을 공개합니다!!!

2007년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충남 태안군 대섬 앞바다에 대한 긴급 탐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당일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이 매우 빠른 사리 때로 조사 시점으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사안의 긴급함으로 인해 빠르게 조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가장 먼저 신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20m를 조사하고 유물의 매장 상태를 촬영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류에 의해 재차 매장되거나 손상될 수 있는 유색이 선명한 유병 등 노출 유물의 일부를 서둘러 수습하였다. 긴급 탐사 결과, 더 많은 유물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최종 판단을 내렸으나, 유속이 너무 빨라서 더 이상의 조사를 진행하기 어려워 일단 철수를 결정하였다.
철수 후 신고 지역이 이미 언론에 알려진 상황으로 도굴의 가능성이 있고, 해저에 매장된 유물이 어로 활동 과정에서 손상을 입는 것이 우려되었다. 이에 문화재청 사적과에 사적가지정의 필요성을 알렸고, 문화재청에서 2007년 6월 7일부터 6개월간 유물 보호를 위해 이 부근의 지역을 사적으로 가지정하였다. 또한 이 모든 사실을 태안군청에 알려 현장 보호 조치를 취하였다. 본격적인 수중 발굴에 대한 준비를 마치고, 7월 4일부터 26일까지 1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긴급탐사 때와는 다르게 조석간만의 차가 작고, 유속이 안정적인 조금 시기로 그 적당한 기간을 잡았다. 발굴은 먼저 신고 해역을 중심으로 조사자가 직접 잠수하여 노출된 유물을 수습하고 주변을 탐사하는 식의 순으로 진행하였다. 실상 수중 발굴의 경우, 육상의 유물·유적과는 다르게 해저 조류에 의해 재차 매장되거나 또는 파손될 위험이 있어 바로 수습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유물은 넓게 흩어져 있었고 대단위로 매장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수중 촬영으로 매장 상태와 분포 상황을 실시간으로 기록한 후 유물의 수습을 긴박하게 진행하였다.
조사 3일째, 수중으로 잠수했던 조사원 한 명이 가슴에 항아리 형태의 유물을 안고 물 위로 상승하였다. 항아리의 형태로 보아 이는 선원들의 선상 생활도구로 추정되어 선체 매장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전의 완도 어두리와 군산 십이동파도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인양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아리는 보통 투시칸으로 불리는 선원들의 취사 공간에서 사용되던 물건으로 선체 매장의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유물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선상으로 올라온 잠수사는 청자 운반선이 매장되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렸다. 이로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우리나라는 세 번째로 청자운반선을 발견한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운반선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 책임자인 필자가 직접 입수하여 수중에서 직접 청자 운반선을 확인하였다.
발견된 선체에 대해 매장 상태를 기록하고, 하나하나 선적된 유물의 종류와 수량을 가실측하였으며, 이 모든 과정을 촬영 및 기록하였다. 매장 규모는 동서 7.7m, 남북 7.3m로 청자가 적재된 상태에서 운반선의 구조물이 일부 노출되어 있었다. 육안으로 파악하기에도 3층 이상의 청자 적재층이 있었고, 표면에 노출된 층만에서도 2천 점 이상의 도자기가 확인되었다. 매장되어 있는 선체와 수습 청자의 학술적 고찰 결과에 대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국민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정되었고, 7월 24일 기자브리핑을 실시하였다.
기자브리핑은 70여 명의 기자와 문화재청장, 학계 전문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먼저 태안군청 회의실에서 이제까지의 조사 결과에 대한 도자 및 선박 전문가의 설명이 있은 후, 현장 해역으로 모든 인원들이 이동하였다. 
 2006년 동양에서 최초로 건조된 수중발굴 전용선인 씨뮤즈SEAMUSE호의 선실과 갑판을 가득 메운 기자단과 학계 관계자들은 대섬 해역에 매장된 고려청자와 선박부재들의 영상이 처음으로 공개되어 그 모습이 화면을 통해 새로이 비칠 때마다 놀라움의 탄성을 연이어 쏟아냈다.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고려청자와 운반선의 영상을 조금이라도 더 담으려는 취재진과 기자단의 이마에서는 연신 뜨거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태안 수중 발굴의 그 역사적 의의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었으며 많은 물자가 이동하는 해상 교통로였다. 또한 외국과의 무역이나 사신 왕래의 길이기도 하였다. 조상들의 활발한 해양 활동 흔적들은 바다 속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현재 우리나라 해역에서 수중문화재 발견 신고 지점은 218곳에 이른다.
이번에 발굴 조사를 실시한 충남 태안군 대섬 앞바다는 원래 난행량亂行梁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명칭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과거 조운선의 침몰 사고가 빈번한 지역이었다. 이에 안흥량安興梁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선박 운행의 무운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시대 모두 운하를 굴착하여 새로운 항로를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와 같은 역사 기록을 이번 태안 대섬 발굴 결과가 고스란히 증명해 준 것이었다. 
발굴 청자는 다양한 기종으로 문양시유나 유색, 번조 방법 등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으나 전반적으로 12세기 중반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작지는 고려청자의 대표적 산지인 강진 지역으로 파악되며, 유약의 시유 상태가 매우 양호한 최상품으로 왕실이나 귀족층이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종은 수중에서 처음 출토된 과형주자瓜形注子를 비롯해 발鉢, 항缸, 대접, 접시, 완 등으로 다양하다. 이번에 발굴된 고려청자는 상감청자 전성기 보다는 앞선 인종 장릉 출토 청자(1146)와 비슷한 시기로, 고려 도자기 발달사에 있어 그간의 공백기를 메우고 흐름을 이어주는 중요한 유물들이다.
현재 수중에 매장되어 있는 다량의 청자는 겹겹이 층을 이루면서 포장된 형태를 띈다. 육안으로도 3층 이상일 것으로 파악된다. 청자는 사이사이에 완충재를 넣고 쐐기 목재와 끈으로 묶어 포장한 후 적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전의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비슷한 포장 방법이다.
청자운반선은 동서 방향으로 침몰되어 있으며, 저판(底板, 배 밑바닥)과 외판(外板 또는 衫板, 배의 옆부분) 그리고 석제닻장 등이 확인되었다. 함께 발견된 도자기의 제작 시기를 12세기 중기로 추정하고 있어, ‘태안선’은 군산 십이동파도선(12세기 초) → 완도선(12세기 중기) → 안산 대부도선(12~13세기) → 신안 안좌도선과 목포 달리도선(14세기)으로 이어지는 고려시대 선박사의 흐름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또한 현재까지 다량의 청자를 적재한 선박으로는 완도선(1983~1984)과 십이동파도선(2003~2004)이 있는데 모두 만곡종통재(彎曲縱通材, 저판과 외판을 연결하는 L자형 부재)가 보인다. 적재한 청자의 제작 연대가 공통적으로 12세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곡종통재의 유무에 따라 고려시대 선박의 편년을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기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추가 발굴을 통해 선체의 구조가 명확하게 밝혀지고, 청자 적재 방법, 동반 유물 등의 연구가 완료된다면 우리나라 선박사와 도자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는 또한 서남해안의 고려시대 해상항로를 복구하는 데도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글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과장 문환석
사진 제공 :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과

게시일 2007-09-07 14:4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