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으로서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I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로 확인되었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都城)을 지키던 서울남부의 산성으로써 지금은 동·서·남문루와 장대(將臺)·돈대(墩臺)·암문(暗門)·우물·보(堡)·누(壘) 등의 방어시설과 관해(官力 : 관청), 군사훈련시설 등이 남아 있다. 대외적으로는 후금의 위협이 커지고 대내적으로는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어려웠던 조선 인조대에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하였다. 이 때의 공사는 각성(覺性)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진행되었다. 승군의 사역과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長慶寺)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현존하는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그 뒤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었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였는데, 이 때 수어사인 이시백(李時白)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扈衛大將) 구굉(具宏)은 남성, 도감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所)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元斗杓)는 북문을 지켰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
[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 전경]
[서문 주변 성곽]
건축물의 구조 및 형태
남한산성의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