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산수화, 풍경과 이상과 미를 담아낸 그림

산수화, 풍경과 이상과 미를 담아낸 그림
웅장하고 거대한 산, 유유히 흐르는 강, 속세를 떠난 은자, 산수를 누비는 선비, 노 젓는 뱃사공과 고기를 잡는 어부까지. 산수화 속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위적이며, 비어 있는 듯 하면서도 꽉 채워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려져 온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산수화에 담겨져 있는 것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자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가늘고 섬세하게, 때로는 거칠고 과감하게 표현된 산수화 속에는 옛 사람들의 눈에 비친 풍경은 물론 그들의 사상과 철학, 미의식, 이상, 체험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수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이 그려진 시대상황과 당대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산수화는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또한 누구를 위해 그려졌으며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을까요? 지식자원관리사업으로 구축된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http://www.emuseum.go.kr/index.do)'와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http://yoksa.aks.ac.kr)'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산수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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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의 화가 최북의 산수도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 산수화의 발생과 발전
산수화란 말 그대로 산과 물, 즉 자연의 경치를 주제로 그린 동양화를 말합니다. 동양에서의 산수화는 자연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관의 반영으로, 예로부터 중국과 한국의 회화미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농경을 주로 했던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매우 소중하고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밀접한 관계는 산수화가 발생하킨 토대가 되었으나 이것이 회화사의 주류로 자리 잡기 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대상을 감상하며 그림으로 옮겨내는 예술 작업은 자연을 조망할 수 있을 만큼 문명이 발달하고 정신적 여유가 생긴 후에야 가능했던 일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회화다운 회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입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인물화가 주류였던 탓에 산수는 주로 배경으로만 그려졌습니다. 산수화의 초기 양식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손꼽히는 그림은 무용총의 <수렵도>입니다. 무용총에 나타난 산수 표현을 살펴보면 산의 겹침을 백·적·황색으로 나타내고 산을 인물보다 작게 그렸는데, 이는 중국 고대의 산수 표현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무용총의 부드러운 선묘는 중국 고분에서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회화미가 있어 보다 진보된 산수 표현을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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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총 고분벽화 수렵도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다양한 종류의 회화가 발전했던 고려시대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듭된 전쟁 때문에 현재까지 전하는 그림은 많지 않지만,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던 시대인 만큼, 북송(北宋)·남송(南宋)·금(金)·원(元)·명(明)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수준 높은 산수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 등을 그린 고려의 화가 이녕은 빼어는 수준의 산수화를 선보여 고려는 물론 송나라에서까지 칭송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나, 안타깝게도 그의 작품을 비롯한 수많은 산수화들이 소실되어 양식상의 특징이나 유행했던 화풍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산수화는 고려로부터 이어받은 전통과 중국에서 받아들인 다양한 화풍을 반영하여 발달했습니다. 화풍이란 각 시대나 한 개인 또는 특정한 집단을 대표하는 양식을 통칭하는 것으로, 그 속에는 독특한 구도와 필묵법, 시대정신 등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 초기의 산수화 화풍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이곽파 화풍, 남송 원체화풍, 미법 산수 화풍 그리고 명나라 초기의 원체화풍과 절파 화풍 등을 들 수 있는데, 이곽파 화풍은 조선 초기의 최대 거장인 안견이 수용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산수화는 안견의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절파 학풍이 크게 유행했으며, 명대의 미법 산수 화풍을 포함한 남종화풍도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에 그려진 산수화들은 대체로 어느 한 가지 화풍을 따르기보다는 두 가지 정도의 다른 화풍들을 따로따로 구사하거나 절충하여 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남종화풍을 토대로 한 진경산수화가 크게 발전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화가로는 정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경치를 독자적인 화풍으로 그린 정선은 한국풍의 산수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고, 그 이후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 조선 초기의 산수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
조선 초기에 자주 그려진 주제로는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소상팔경(瀟湘八景)'과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시팔경(四時八景)'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실제 산수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관념 속에 정형화된 산수의 이미지를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소상팔경은 중국의 소강과 상강이 흘러들어 호수를 이루는 동정호 일대의 경관을 말하는 것으로, 일찍이 중국의 시인들이 이곳을 보고 시를 읊었다고 전해질 만큼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이 일대가 팔경으로 묶여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북송대 부터였지만, 남송대 및 원대,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그려질 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주제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고려 명종 때부터 소상팔경이 그려졌지만 화가들이 직접 체험한 공간이 아니었던 탓에, 실경이 아닌 상상 속의 이상경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사시란 사계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계절의 특징적인 산수 경관을 담아낸 산수화를 ‘사시도'라 합니다. ‘사시도'가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사계를 다시 둘씩 나누어 팔경으로 만든 ‘사시팔경'이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초봄, 늦봄, 초여름, 늦여름, 초가을, 늦가을, 초겨울, 늦겨울의 여덟 장면을 묘사한 사시팔경은 여덟 면의 화첩이나 여덟 폭의 병풍에 순서대로 그려지기도 했고, 혹은 한 장면만 단독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견의 전칭작 <사시팔경도>는 15세기 산수화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으로, 당시 문인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늦여름의 풍경과 눈이 소복이 쌓인 늦겨울의 풍경을 특히 선호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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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의 <사시팔경도> 일부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소상팔경이나 사시팔경과는 별개로 꿈속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을 그린 산수화도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입니다. 도원(桃源), 즉 복숭아꽃이 화려하게 피어있는 도가적 낙원을 그린 이 그림은 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표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그 내용과 표현 면에서도 우리 회화사는 물론 동양 회화사에서도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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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 출처: 장서각 소장 국학자료 ☞ 바로가기 |
>> 조선 중기의 산수화, 옛 성현의 사상과 운치
성리학에 입각한 인간 내면의 고찰과 정신수양을 중시하는 도덕관이 자리 잡은 조선 중기의 산수화는 구도가 부자연스럽거나 단순해졌고, 산수 표현 역시 과장되거나 기괴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붓질 역시 거친 편으로 이는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사용한 절파 화풍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요. 김시의 <한림제설도>와 이정근의 <설경산수도>를 보면 유난히 크고 기이한 모양의 산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 있는데, 이는 은자가 머무는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수의 형상이 거칠게 표현된 이흥효의 <설경산수도>와 김명국의 <설중기려도> 역시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수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 문인들은 그림을 볼 때마다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산수화 중에는 인물의 비중이 부각된 그림도 많은데, 이를 ‘산수인물도'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발 씻는 선비를 그린 ’탁족도', 물 위의 현인을 그린 ‘어부도', 나귀 타고 산수를 누비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기려도', 폭포를 감상하는 문인을 그린 ‘관폭도', 산수 속에 잠든 인물을 그린 ‘수면도'를 꼽을 수 있는데, 이러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산수에 은거한 중국의 옛 현인들이었습니다. 이는 중국의 성현들을 전통으로 삼으려 했던 조선 문인들의 이상이 반영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 대한 고뇌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작품에는 이경윤의 <고사탁족도>와 <취하수면도>, 이정의 <산수도>, 함윤덕의 <기려도>, 윤정립의 <관폭도>, 윤인걸의 <어가한면도>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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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한편, 성리학이 심화된 16세기에는 주자가 살며 노닐었던 곳을 시로 읊거나 그림으로 그려 감상하는 문화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자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인데 그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강론을 펼쳤던 무이산은 산수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습니다. 무이산의 아홉 골짜기를 그린 그림을 ‘무이구곡도'라 하며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강세황의 <무이구곡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림이 유행하면서 조선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스승이 머물렀던 곳이나 자신의 주변 산수를 그림으로 남겨 두었다고 합니다. 퇴계 이황이 머문 도산을 그린 <도산도>와 율곡 이이가 머물렀던 고산을 주제로 한 <고산구곡도>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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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이구곡.고산구곡12곡병(武夷九曲.高山九曲十二曲屛) 중 일부 출처: 국가문화유산 종합 DB ☞ 바로가기 |
>> 조선 후기의 산수화, 체험을 담아낸 실제 풍경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산수경을 그렸던 이전 시대와는 달리, 후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산천 곳곳을 그린 산수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한국 회화사에서는 우리 산천의 실경을 많이 그렸던 화가 정선의 산수화를 대표로 하여 그 이후에도 계속 그려진 산수화들을 가리켜 ‘진경산수화'라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경이란 ‘참 경치', 즉 ‘진짜 경치'를 의미합니다. 실경을 화폭에 담는 경향은 예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이 시기에 등장한 진경산수화는 당대의 독특한 시대상이 반영되어 있는데다가 우리 산하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표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금강산도>, <인왕제색도>, <청풍계도> 등의 작품을 남긴 정선은 진경산수화의 독보적인 존재로, 쇄도하는 그림 요청으로 인해 노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야만 했을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 역시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를 다수 남겼는데,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제작한 <금강사군첩>에 실린 그림들은 정선의 그림과 비교했을 때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이 강하고,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의 그림들은 대단히 율동적이고 세련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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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의 <인왕제색도> 출처: 행정정보DB ☞ 바로가기 |
17세기 후반부터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는 명산으로 유람을 떠나는 문화가 급격히 퍼져나갔습니다. 자신이 보고 겪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여 서로 돌려 읽던 문인들은 아예 화가를 대동하여 자신이 유람한 곳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는데,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문인들의 유람 모습을 담은 산수화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인화가 정수영은 <한임강명승도권>이라는 제목의 한강 유람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길이가 무려 15미터에 이르는 이 그림에는 그가 한강변을 따라가며 구경한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남종화풍이 주류를 이룬 19세기에는 진경산수화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산수화가 등장하게 됩니다. 남종화란 인격이 높고 학문이 깊은 문인들이 수묵과 엷은 채색을 써서 내면의 세계를 표출한 그림을 말하는데, 조선 중기에 유입되어 후기를 거치는 동안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김정희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과 고고한 인품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남종화의 이상적인 세계라 생각했는데, 그의 독특한 경지는 <세한도>와 <묵란도> 등의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간일(簡逸)하고 이념적인 남종화는 장승업의 등장으로 또 한 번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조선 최고의 기량을 갖춘 장승업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풍을 구사하며 <귀거래도>, <산수도>, <관아도>, <웅시팔황도>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장승업을 끝으로 조선시대의 회화는 막을 내리게 되지만, 그의 화풍은 근대 화가들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 참고문헌 및 사이트
ㅇ <한국 미술문화의 이해(개정판)>, 강민기 외, 예경, 2006
ㅇ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2007
ㅇ 네이버캐스트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931)
- 국가지식포털 객원기자 주유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