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익산 숭림사 보광전

깜보입니다 2013. 2. 18. 15:43

 

숭림사 배치도

 

 

익산 숭림사 보광전 (益山 崇林寺 寶光殿/보물 제825호)

 

숭림사는 1345년(고려 충목왕 1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숭림사에는 보물 제825호 지정된 보광전普光殿을 비롯하여 도 유형문화재 제188호인 보광전목조석가여래좌상普光殿木造釋迦如來坐像, 그리고 도 유형문화재 제189호인 영원전지장보살좌상및권속靈源殿地藏菩薩坐像및眷屬 등이 있다. 건물로는 경내에 보광전, 강당인 우화루, 지장보살을 모셔둔 영원전, 나한전,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인 정혜원과 요사채가 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발간한 <한국의 고건축 제 23호>와 문화재청이 발간한 보광전 수리보고서에 의하면 보광전은 1589년에 산불로 피해를 입어 1589년과 1613년 사이에 재건되었고 1819년 중창과 1912년, 1957년에 중수하였고 최근 1996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우화루는 1855년에 4중창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초창은 중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사채인 정혜원은 1589년 산불에 소실된 것을 1591년 중창하고 1644년 삼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기록이 없으나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변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원전은 1926년에 성불암에 있는 칠성각을 옮겨온 것이고 나한전은 1928년 새로 지은 것이고, 기타 전각은 최근에 지은 것이다.

 

이 절의 중심건물은 보광전이다. 보광전은 이름대로라고하면 전각 내에는 비로자나불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는 중앙에 목조석가여래좌상과 좌우에 철제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이 있다. 그러나 후불탱화(1912년 조성)를 보면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측에 아미타불 우측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즉 원래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의 삼세불이 모셔졌었는데 1986년 좌우 협시불이 도난당한 후 다시 관음보살과 아미타불을 제작하여 모신 것이라 한다.(한국의 고건축/193-194)

 

보광전 전경

 

어쨌든 1600년 초 화재로 중창할 때부터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인데 이것을 같은 책에서 조선 중기이후 통불교화하는 경향 때문에 보광전이란 전각이름을 그대로 두고 주존불만 바꾼 것이라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과거처럼 교리를 따지고 할 여력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지배계층을 대신하여 중요한 시주세력으로 변모한 민중들이 원하는 부처를(병을 고쳐주는 능력이 있는 약사불, 극랑왕생을 책임져주는 아미타불)을 모신 것으로 보인다.

 

보광전은 전면 맞배지붕을 한 다포집으로서 3칸 측면 2칸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전각이지만 참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는 집이다. 전면의 화려함과는 대비되는 후면의 간략화된 구조, 화려한 용조각과 장식화된 주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되는 건물이다.

 

우선 주목을 끄는 것은 전면과 후면의 장식성의 차이이다. 전면은 매우 화려하게 초각이 있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후면으로 가면 출목의 부재로 생략하고 살미도 직절처리하고 판재에 단척으로 문양만 그려 놓았다. 또한 처마도 전면은 겹처마인데 후면은 홑처마로 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렇게 전면과 후면의 격을 달리하는 집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오면서 많아지는데 이것은 당시 불교의 위상 및 주된 시주층施主層의 경제적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건물을 짓는데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초까지만 해도 주된 시주층은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배층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시주층은 중인이하 일반 민중으로 넘어가게 된다. 따라서 이전과 같은 풍부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절집이 점점 궁색한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보광전 배면

 

건물이 이런 모습으로 변화된 시기가 언제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보광전은 지붕가구에 사용된 동자대공 등은 조선 후기 수법을 보이고 있어 후대의 중수시 상부가구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한국의 고건축/31쪽) 따라서 1819년 중창을 하면서 변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완주 화암사도 전면과 후면의 격이 다른 것으로 보아 1600년 초 중창했을 때부터 그런 모습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당시는 임진란으로 자료를 보면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당시 임진란이 끝났을 때 경작면적이 1/3로 줄었다고 할 정도로 경제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이다. 임진란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보광전을 중창을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금사정이 넉넉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이렇게 지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지붕의 형태가 팔작지붕으로 되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공사비가 넉넉하였다면 당연히 팔작지붕을 했을 것이다.

 

이 보광전의 특징은 매우 장식성이 높다는 것이다. 첨차도 연꽃모습으로 투각하여 만들었는데 이런 첨차는 강화도 정수법당의 전면 퇴칸의 공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문양이 들어간 예는 정수법당 말고도 개암사 대웅보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두도 연엽蓮葉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이런 모습을 한 주두는 개암사대웅전, 화암사 극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보광전 전면 공포

개암사 공포(출처 : 문화재청싸이트)

 

특히 공포 내부에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한 것이라든지 첨차의 조각 수법이 거의 같고, 주두가 연엽으로 되어 진 것으로 보아 이 개암사 대웅전과 유사한 것이 같은 시대에 지어지거나 같은 계열의 목수가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상기서 27쪽) 어쨌든 화암사, 숭림사, 개암사는 모두 전라북도에서도 위치가 근접하여 있는 편이다. 따라서 지역적 특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보광전의 용장식은 매우 사실적이며 힘이 있다. 절에서 조각으로 용장식이 나타나는 것은 1605년 완주 화암사 극락전부터라고 하며 민간의 용신앙과 불교가 습합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특히 용조각이 먼저 만들어진 것이 중부이남 해안가에 있는 절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조선후기 사찰건축에 나타난 용장식/김현정,천득염/79,80쪽) 이것은 배를 활용해 상업활동을 하는 계층이 주된 시주자로 나타나면서 발생한 현상이 아닌가 한다.

 

보광전 닫집 용조각

 

보광전의 용장식의 특징은 사실적이기도 하지만 매우 역동적이다. 안쪽 제공 끝에 조각되어 있는 용은 제공과 같은 방향으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 측면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다. 측면으로 머리를 향하게 조각함으로써 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매우 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모습 때문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광전의 불단의 전면은 측면 중앙에 있는 기둥을 연결한 선까지 나왔다. 이런 불단의 배치로 불단 뒤쪽에 넓은 공간이 마련되었다. 조선 초기(1430년)에 지어진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평면도 불단이 건물 중앙에 가깝게 배치하여 불단 뒤쪽을 넓게 만들었다. 이런 불단의 배치는 오랜 예배방식인 불단 주위를 도는 우요삼잡의 예배방식을 위한 것이다. 특히 후면에 중앙에 출입문을 설치한 것은 고식古式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보광전을 1600년 초 중창할 때 고려 말 처음 지었던 보광전의 평면형식을 그대로 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과거 예배방식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부처를 모신 금당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알고 있으나 최근 발표된 논문(고대 및 중세 불전의 이용방식에 대한 연구/이정국)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도 일반인도 부처가 모셔져 있는 금당에 들어가 예배를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과 같은 문헌에 나타난 내용을 근거로 주장하고 있는데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광전 평면

 

어쨌든 내부에 들어가 예배를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든 아니든 간에 지금처럼 전면에서만 예불하였던 것은 아니고 불상주변을 돌면서 예불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불대좌를 중심으로 전후좌우에 일정한 예불통로를 가져야 했다. 그런 모습이 이 보광전 평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숭림사 보광전의 초창이 최소한 고려시대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추신 1 :

 

제가 쓴 숭림사 보광전에 대해 댓글로 三世佛은 三界佛로 쓰는 것이 맞지 않는냐는 글이 올라왔고 그에 대해 어떤 분이 17세기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이 三世佛로 불렸다는 댓글과 제가 보광전에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모셔졌다고 쓴 것에 대해 지금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졌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습니다. 이에 대한 답입니다.

 

개인적으로 불상에 대한 관심은 건축물에 대한 관심보다 적고 불상을 찍는 것을 사찰에서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찍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고서 내용대로 올린 것인데 그간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하는 답글 입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제가 님께서17세기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삼세불이라 불렀다는 답들을 보고 참고서적인 <한국의 고건축>에 있는 복장기 원문을 다시 찾아보니 복장기에는 삼세불이라는 명칭이 아예 없습니다. 숭림사가 소장하고 있는 복장기에는 대명만력사십일년大明萬曆肆十一年(1613년)이라는 조성연대 및 월일과 왕과 왕비의 장수를 비는 내용 그리고 대시주자와 불상삼존佛像三尊을 조성했다는 내용만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책 219쪽에 崇林寺 寶光殿 三世後佛撑이란 글이 있는데 출처를 성보문화재연구소가 간행한 <한국의 불화>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도 내용은 조성연대와 증명, 금어, 시주자들 명단만이 있습니다. 三世佛이라는 단어는 앞에 제목에만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23쪽에 각주를 보면 문명대가 쓴 <한국불교미술의 형식/한언/1997/149쪽>에서 인용한 내용이 있는데 “삼세불은 현재불인 석가불, 왼쪽에 과거불인 약사불, 오른쪽에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일컫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도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나와 있지만(23쪽) 부석사 원융국사비문圓融國師碑文에는 의상이 스승인 지엄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기를 “일승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아니하고 시방정토로서 예를 삼아 생멸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고려편 2/292쪽) 따라서 개념상 죽지 않고(열반에 들지 않고) 지금도 살아있는 부처가 아미타불입니다.

 

문명대가 쓴 책을 보지 못해 정확히 왜 삼세불로 이야기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석가불을 과거칠불로 분류하는 것처럼 과거불로 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나타났다는 의미에서 현재불로 봐도 무관하고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은 존재이고 앞으로 중생을 극락왕생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미래불로 보아도 무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한 귀하가 현재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있다는 것은 아래 링크한 블러그에 게재된 법당 내부 사진을 보니 맞는군요. 그런나 앞서 언급한 책이나 문화재청에 있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숭림사보광전목조석가여래좌상 (崇林寺普光殿木造釋迦如來坐像)>에 게재되있는 사진에도 분명히 우측에 아미타불이 있습니다. 아마도 2002년 이후 지금 일반적으로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불의 협시에 맞도록 다시 대세지보살로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http://blog.naver.com/kji206/165779283

 

과거칠불 :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구류손불(拘留孫佛)·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추신 2 :

94년에 발간된 답사여행의 길잡이 전북편에 있는 숭림사 보광전에 대한 설명이 잘못되었다. 숭림사 보광전은 85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이 책에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38호로 지정되었다고 틀리게 소개하고 있으며, 보광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있다고 역시 잘못 기재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숭림사를 전면3칸, 측면3칸의 건물인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오기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고건축(한국건축연구자료 제 23호)/국립문화재연구소/2001

숭림사 보광전 수리보고서/문화재청/2002

답사여행의 길잡이 1(전북)/한국문화유산답사회/돌베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대 및 중세 불전의 이용방식에 대한 연구/이정국/건축역사연구(2003-06)

조선후기 사찰건축에 나타난 용장식/김현정,천득염/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2010-11)

인터넷문화재청 싸이트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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