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윤두서 자화상’(38.5×20.5㎝, 종이에 담채)은 한국 회화사의 걸작으로 손꼽힌다(위 왼쪽 사진). 1930년대에 촬영된 ‘윤두서 자화상’ 유리 원판 사진에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귀, 상체의 옷 주름이 표현돼 있다(위 오른쪽·김호석 제공). ‘윤두서 자화상’은 파격적인 구도와 극사실적 표현, 강렬한 눈빛으로 유명한데 눈의 아래위 속눈썹까지 한 올씩 그렸다. 눈 주위의 동그란 붉은 흔적은 실다리 안경의 흔적을 표현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나의 자화상을 그린다면? 내가 나임을 화폭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외형은 사진이나 첨단기술을 이용, 극사실적으로 ‘베껴’낼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한 자화상은 외형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드러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을 어떻게 표현하지.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나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들이 분명 있을 텐데….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내가 나를 이렇게 모르고 있었던가. 당신은 어떤가?
여기, 300여년 전 조선의 한 선비가 종이에 그린 자화상이 있다. 한국의 자화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자신을 드러낸 ‘윤두서 자화상’(국보 240호)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자화상은 물론 초상화, 나아가 회화사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는 명품이다. 조선시대 명문가 해남윤씨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사적 167호·전남 해남군 해남읍)에 전해지는 자화상은 인근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소장돼 있다.
■ 뜯어볼수록 놀라는 윤두서 자화상
“충격적” “센 기가 느껴진다”
가장 유명한 한국의 자화상과
마주하면 보는 이는 압도된다
윤두서 자화상은 사실 크지 않다. 세로 38.5㎝, 가로 20.5㎝다. 그럼에도 마주하면 아주 커 보인다. 보는 이를 압도해서다. “충격적이다” “센 기가 느껴진다”는 표현을 쓰는 이도 많다. 그만큼 예술작품으로서 뿜어내는 힘, 감동이 크다는 뜻이다. 이 자화상은 우선 그 구도가 파격적이다. 기존 자화상들과 달리 얼굴, 특히 측면상이 아니라 정면상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강렬한 눈빛, 사실적인 턱수염과 구레나룻으로 생동감이 더해져 얼굴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 작가의 강한 자의식이 느껴진다. 상체와 귀는 없이 얼굴만 있어 더 자극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자화상에는 귀, 가슴 위의 상체, 어깨선과 옷의 깃·주름 등이 표현돼 있다. 얼굴만 그린 게 아니다. 도포를 입은 상반신을 그린 것이다. 이는 1937년 조선총독부 자료인 <조선사료집진속>에 실린 사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과학적 조사 결과에서 확인됐다. 그 표현들이 지워지는 바람에 관람객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들 부분은 세월에 따른 훼손과 1960년대 장황을 하는 과정에서 희미하게 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화면 속 여러 개의 가로선은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던 그림이 눌러져 접힌 흔적이다.
윤두서 자화상이 감동을 안기는 데는 기막힐 정도의 극사실적인 묘사가 한몫한다. 긴 턱수염과 구레나룻은 터럭을 한 올 한 올 세어가면서 그린 듯 세밀하다. 특히 턱수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올마다 먹물이 끊어지거나 모이지 않고 매끄럽고 탄력적으로 표현됐다. 구레나룻은 얼굴 양옆으로 힘차게 뻗쳐 대조적이다. 무성하게 느껴지는 턱수염과 구레나룻은 얼굴을 화면 위에 붕 떠 있게 만드는 듯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더 놀랄 만한 세밀한 표현들이 있다. 관람객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콧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5~6개의 코털까지 그려졌다. 인물화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꼽히는 눈 부분도 마찬가지다. 눈썹은 물론 심지어 아래위 속눈썹까지도 한 올씩 그렸다. 눈동자는 짙은 먹으로 표현, 강한 눈빛을 쏘아낸다. 자화상 속 눈과 정면으로 눈을 맞춰보면 실감이 난다. 그저 검게 보이는 탕건 속에도 머리카락이 빼곡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안료는 전통 안료인 흰색의 연백, 붉은색의 진사를 따로 쓰거나 혼합해 사용했다. 얼굴엔 연한 갈색을 펴고 양볼과 이마, 콧등 같은 돌출 부위에는 붉은색을 연하게 해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입도 붉은 윤곽선을 그리고 그 속에 붉은색을 채워 음영을 주었다. 전통 초상화에 보이는 배채법도 적용됐다. 뒷면에서 채색을 해 화면이 은은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도록 하는 회화기법이다. 불화에도 활용된 배채법은 화면 위를 채색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윤두서 자화상은 얼굴과 몸체 등 전반적으로는 배채를 했지만 눈 등 일부에는 하지 않아 계획적인 면도 엿보인다. 물론 전통 수묵화처럼 이 자화상도 덧칠이 가능한 서양 유화와는 달리 수정이 불가능한 먹을 중심으로 해 화가의 뛰어난 능력이 요구된다. 종이는 먹의 번짐을 막기 위해 표면처리를 했다.

한국화가 김현철의 ‘공재 윤두서 초상’, 135×69㎝, 비단에 진채, 2016.
대중적 관심이 높은 긴 수염의 표현과 관련, 전통 배채법의 초상화 작품으로 잘 알려진 수묵화가 김호석은 자화상 속 수염을 재현했다. 김 작가는 자화상 수염처럼 길면서도 먹물이 끊기지 않고 탄력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20여 종류의 붓 가운데 서수필(쥐 수염으로 만든 붓)만이 가능했다고 발표했다. 한국화가 김현철은 윤두서 자화상을 오마주한 ‘공재 윤두서 초상’을 작업, 관심을 모았다.
■ 선구자적 자신을 오롯이 담아내다
외면과 내면의 자신을 드러내는 자화상은 역사적으로 이미 중국 한나라 초기부터 그려졌다. 서양미술에서는 르네상스 전후 뒤러나 카라바조, 렘브란트, 고흐 등의 자화상이 유명하다. 우리나라도 고려 공민왕의 자화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자화상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전해지는 고려 자화상은 없고 초상화만 일부 남아 있다. ‘안향 초상’과 원나라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 초상’이 대표적인데 모두 국보다. 조선시대엔 감상의 대상인 예술작품으로서라기보다 조상 숭배를 강조하는 유교적 특성상 서원·사당 등에 모시기 위해 초상화가 많이 그려졌다. 왕의 초상인 어진으로 시작해 공신들, 고위 관료로 확산됐다. 하지만 자화상은 드물다. 전문화가인 화원들은 사회적 지위나 낮은 자의식으로 그리기 힘들었다. 사대부 화가들도 자화상 시도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 자화상으로는 조선 초기 김시습이 자화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윤두서와 동시대 문인인 이광좌도 자화상을 그렸지만 사진으로만 전해진다. 윤두서 이후에는 강세황 등의 자화상이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인물화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게 그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一毫不似 便是他人(일호불사 변시타인)’, 나아가 정신까지 드러나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정신 위에서 그려졌다.
화면 가득 채우는 정면상의
형형한 눈빛·사실적인 수염은
강건한 자의식을 뿜어낸다
윤두서 자화상은 독보적이다. 격식을 깬 구도와 빼어난 표현기법 등은 당대 화법, 시대상 속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의 삶과 사상, 강건한 자의식이 이 같은 자화상을 빚어냈을 것이다. 공재는 조선 중후기 대표적 명문가의 자제다. ‘어부사시사’ ‘오우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다. 공재는 1693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치열한 당쟁 속에 출사의 꿈을 접고, 타계 2년 전인 1713년 서울을 등지고 해남으로 낙향한다. 성리학자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선비이면서도 그는 실학적 학풍을 지닌 학자들과의 교류로 학문세계가 드넓었다. 지리와 수학, 의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삶을 보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녹우당에는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 일괄’(보물 481호)이 전해진다. <尹氏家寶(윤씨가보)> 같은 화첩과 <家傳遺墨(가전유묵)> 같은 서첩 등이다. 윤두서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첩에는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이 있어 그의 폭넓은 회화세계를 보여준다. 그의 초상화 작품으로는 친구 심득경(1673~1710)을 그린 ‘심득경 초상’(보물 1488호)이 대표적이다. 말을 잘 그렸다고 하는데 ‘백마도’도 전해진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풍속화다. 머리에 수건을 쓴 두 여인이 쑥을 캐는 모습을 담은 ‘쑥 캐는 여인’(채애도)을 비롯해 농부가 소를 몰고 밭을 갈거나, 짚신 삼기, 목기를 깎고, 돌을 깨는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다. 풍속화의 대가 단원 김홍도를 앞선 풍속화들이다. 또 채소·과일을 소재로 한 선구적인 정물화도 있다. 당대의 지배적 사상, 관습을 뛰어넘은 예술적 선구자로서의 윤두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심지어 그는 ‘대동여지지도’ 등 지도도 남겼다.
도발적·까칠한 선비의 얼굴엔
조선 후기 명문가 자제이자
선구자적 면모가 녹아있다
공재가 살던 시기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들어서는 전환기다. 숙종 임금의 재위 시기로, 기존 유교질서가 지배적이고 당쟁이 격화된 때다. 반면 한편으론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영향으로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이 움트던 시대다. 이때 싹이 트기 시작한 사상적 변화는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18세기 영조·정조시대의 문예부흥, 진경문화를 낳는다. 윤두서는 어쩌면 조선 중기까지의 사상·화법에 균열을 일으키고, 다가올 새 시대의 문을 여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것이 아닐까. 도발적이면서도 조선 선비의 까칠함도 느껴지는 윤두서 자화상은 그의 삶과 사상과 더불어 보면 볼수록 읽어낼 것이 많은 명작이다.
윤두서 자화상을 이야기하다보니 자화상을 한번 시도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거울 속을 며칠, 몇 달 들여다보는 그 시간이 나 자신을 더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내가 나를 성찰하고 알아가는 그 시간만큼 숭고한 시간이 과연 또 있을까.
▶ 사진 제공 문화재청·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