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조선왕궁 상징 용머리 기와, 왜 서해 뻘밭서 나왔을까
조선왕궁 상징 용머리 기와, 왜 서해 뻘밭서 나왔을까
등록 :2022-06-29 09:01수정 :2022-06-30 11:33
조선 전기 왕실, 실질 고증 가능한 유일한 출토품
왕실 발원 건축물 쓰려고 배에 싣고 가다 난파한 듯

“뻘밭에서 조개를 캐는데 이상한 물건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 왕궁의 상징이자 최고의 건축부재인 용머리기와와 검파가 서해안 태안의 뻘밭 속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연구소 쪽은 한눈에도 기와 유물들의 새김 방식이나 조형성이 최고의 격조를 갖춘 것이어서 명백히 서울의 관영 공방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잘라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실과 관청의 기와를 생산했던 공방은 조선 태조 때부터 있었는데, 애초엔 서울에 동요와 서요로 나눠 운영하다 와서라는 이름으로 통합해 조선 성종 1년인 1469년 첫 운영 기록이 나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와서의 위치가 지금의 용산구 신용산역과 이촌동 들머리 일대로 이전한 대통령 집무실이 자리한 용산공원 부근이며 현재 푯말까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동훈 연구소 연구관은 “아마도 용산 부근의 와서에서 생산된 최고급 장식기와를 지방에 왕실이 발원한 사찰이나 관영건물지에 쓰려고 싣고 가다 배가 난파되면서 태안 갯벌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특정 건물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밝히기 어렵다”고 했다.


연구소는 8월 중순까지 해당 지역 추가 발굴조사와 수중탐사를 벌여 용기와 관련 유물들이 더 있는지를 확인할 계획이다. 왕실 고급 유물인 취두가 출토된 만큼 이를 싣고 갔을 조선 전기 운반선의 잔해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어 앞으로의 발굴 성과도 관심을 모은다. 조선 왕궁의 상징인 용머리 기와 같은 최고급 건축부재가 왜 서해 갯벌 속에서 출현했는지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도판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