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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나름대로 본 불국사 - 1

깜보입니다 2006. 10. 18. 10:24
들어가며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문화와 생활을 이해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불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국사를 창건하던 시절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 같다. 8세기의 신라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불교를 어떻게 믿었는지 알지 못한다. 불교역사책에 기술되어 있는 역사는 아주 미세한 단편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같은 불교라고 하여도 동양삼국의 불교가 각각 다르고 현재의 불교와 원시불교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를 보더라도 시대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개인의 경험으로도 삼십년 전의 장로교는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변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국사를 이해함에 있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당시의 불교관과 생활이다. 같은 종교도 당대에 살았던 사람의 생각에 따라 변화된다. 당시의 사고의 틀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국사를 다루는 이 글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자 한다.

불국사의 창건에 대하여

우리 나라에서 불국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만큼 불국사는 우리의 문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고 또한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러나 차분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불국사에 대하여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불국사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생각만큼 많은 자료가 없으며 또한 불국사에 대한 해석이나 논점도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재 불국사에 대한 해석의 근거는 대부분 삼국유사, 불국사고금창기, 불국사 사적기가 전부이다. 또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앞서 말한 몇 가지 사료를 근거로 추정하여 발표한 것이 지금까지의 불국사에 대한 해석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김대성을 삼국사기 경덕왕 때 중시(中侍)를 지냈던 '대정'이라고 규명한 것도 이기백씨에 의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김대성의 실존 여부도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여 불국사 창건의 문제를 이야기하여 보자

불국사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신라법흥왕 27년(528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진흥왕과 문무왕이 중창을 하고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하여 석불사와 함께 중창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유사 효선(孝善) '대성 이세(二世) 부모에게 효도'편에서는 불국사 창건에 대한 김대성의 설화를 이야기하고 절을 지은 후 신림과 표훈을 모셨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같은 편에서 절의 기록이라고 하면서 '경덕왕 시대에 대상(大相) 대성이 천보(天寶) 10년(751년) 신묘에 비로서 불국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여 혜공왕 시대를 거쳐 대력(大歷) 9년(774년) 갑인 12월 2일 대성이 죽자 나라에서 공사를 마쳤으며 처음에는 유가(瑜伽)의 대덕 降魔를 청해 이 절에 거처하게 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라고 하면서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금창기에 의하며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지원하에 많은 중창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조까지 불국사가 가지는 위상은 대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정작 삼국시대의 정사(正史) 삼국사기에는 여러 절의 이름이 나오지만 불국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김대성이라는 이름조차 없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삼십여 년에 걸쳐 이룩된 대역사가 정사에 기록되지 못한 것을 보면 불국사나 석불사가 국가주도의 사찰이었는가에 대하여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성낙주씨는 새로운 이론을 제기하였다. 성낙주씨는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52-55쪽:개마고원)」이라는 저서에서 석굴암과 불국사는 김대성 개인의 비원과 화쟁의 염원에 의하여 만들어진 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최치원이 지은 화엄불국사찬가에서 나오는 '종곤(宗袞)'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宗袞'이라는 단어는 '「문선(文選)」에 나오는 단어로서 중문대사전에서 위거삼공지족인야(謂居三公之族人也)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즉 '종건'이란 '삼공거족의 집안사람들 곧 재상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종곤'은 재상을 지낸 '김대성'을 지칭하기 때문에 불국사가 개인의 염원에 의하여 세워진 사찰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개인의 발원으로 가능한 가에 대해서 당시의 지배계급의 부의 정도가 불사를 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에는 '국권을 장악하고 있는 왕실이나 주로 그에 소속된 귀족의 집단 또는 개인의 사사로운 발원의 불찰(佛刹)이 기왕의 사원에 이어서 건립되었던 경우가 많았고'(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26쪽) 또한 사찰 건립의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점차 이전되고 사찰의 건립의 목적이 국가안보의 기원에서 개인적이고 가족적이며 종교적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분명해진다.(한국건축사:건축학회 244쪽)

통일신라시대에 개인적인 발원에 의하여 지어진 사찰의 예를 보면 김유신의 가문이 원원사(遠願寺)를 지었으며 김대성이 이미 젊었을 때 죽은 곰을 위하여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유사) 이러한 절 외에도 무장사( 藏寺), 봉성사(奉聖寺), 석가사(釋迦寺), 감산사(甘山寺), 망해사(望海寺) 호원사(虎願寺) 등이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지어진 절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러한 추정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하여 볼 때도 불국사나 석굴암정도의 규모라고 한다면 개인 차원에서 지을 수 있는 규모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재벌이 희사하여 지어지는 건물은 많다. 당대의 거부가 자신의 전 재산을 투여할 정도의 깊은 발원만 있다면 이러한 규모의 절을 짓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 아래의 글은 최지원의 불국사에 대한 시에 나오는 종곤(宗袞)에 대한 중문학자의 해석이다.

아래의 글은 최치원이 불국사에 있는 아미타불을 찬(讚)한 글의 일부 입니다.
東海東山有佳寺 華嚴佛國爲名字
主人宗袞親修置 標題四語有深意
華嚴寓目膽蓮藏 佛國馳心係安養
欲使魔山平毒  終令苦海無驚浪 이하 생략

1. "宗袞" 이란 단어는 《文選》에 나옵니다.
《文選》 謝安의 詩<和王著作八公山> 에 나오는데,
“ 危賴宗袞微管寄明牧” 이곳에서는 謝安(東晉 시기의 정치가요, 문학가)을 가리킵니다.
2. 宗袞의 사전상의 의미는 天子와 上公의 禮服을 말합니다.
3. 주신 문구에서는 上公의 뜻으로 재상을 지낸 김대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句의 의미가 “주인인 上公(김대성)이 친히 建修하였고, 그 표제에 쓴 네 글자에도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라는 의미이므로 임금이 아니라 불국사를 세운 김대성을 가르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만일 宗袞이 임금을 가리킨다면 主人이라는 말이 아닌 主上이나 主君이 되었을 것이다.
4. 그러나 그 문구를 임금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기는 합니다만, 謝의 詩<和王著作八公山>에서도 '宗袞'이 가리키는 사람이 황제가 아니기에, 단어의 출원에서 본다면 왕보다는 김대성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국사에 관련된 건축이야기

가. 요네다(米田美代治)의 기하학에 근거한 불국사 배치 분석에 대하여

요네다의 논문집 「韓國上代建築의 硏究」(신영훈역) 중 '佛國寺造營計劃에 대하여'에는 불국사를 기하학의 도법에 의하여 분석하였다. 요네다의 분석에 의하면 이 불국사뿐만 아니라 사천왕사, 망덕사, 천군리사지 등도 이러한 기하학 비례원칙에 따라 조영되었고 탑들도 이러한 원칙에 따라 기하학의 비례원칙에 의하여 조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네다의 주장은 몇몇 논문에 의하여 소개되었지만 자세하게 검증된 적은 없었다. 이러한 논지가 우선되려면 과거에도 현재의 개념에 따른 설계법이 존재하여야 한다. 건축을 전공한 요네다가 서양식의 설계개념에 의거 분석하여 보았다는 점과 과거에도 시각적인 비례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고 그 의도가 기하학에 기반을 두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찾아보았다는 점에서는 매우 신선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요네다의 분석을 검토하기 앞서 우리에게 서양의 설계와 같은 개념의 설계가 있었는가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평행투시법에 의한 도면 작성 및 모형의 제작은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기록이 있다고 한다.(중국고전건축의 원리:李允 지음:제12장참조) 그러나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구에서 발달한 작도에 의한 설계의 개념은 근세까지 없었던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도학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에 따른 배치를 하였다는 전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국사에서 이러한 서양식 작도법에 의한 배치를 하였다는 발상은 원천적으로 근거가 없는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1969년도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여 작성된 실측도(불국사 복원공사보고서 부록참조)와 요네다가 작성한 배치도를 보면 요네다가 작성한 배치도는 발굴 전에 임의로 작성된 것이다. 요네다가 작성한 도면을 보면 북쪽 회랑을 현재보다 반 칸 정도 아래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여 작성하였고 이것을 근거로 사역(寺域)이 전면회랑의 폭의 1/5모듈로 계획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발굴결과 북쪽 회랑은 정확히 무설전의 중간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금당에서처럼 회랑은 무설전의 측면 중앙부분에 연결되었다. 따라서 요네다가 회랑의 위치를 임의로 설정한 것은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추론에 맞추려고 한 가정인 듯하다.

그리고 그의 후면 어칸 중앙과 두 탑의 중심을 연결하는 원이 방형으로 그려진 회랑의 1/5모듈의 두 번째 중심과 일치한다는 요네다의 분석은 회랑에 대한 설정이 잘못되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네다가 분석한 부분에 대하여는 일부는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다. 불국사복원공사보고서에 있는 대웅전일곽의 배치도(도판 321)를 분석하여 보면 회랑 내면을 중심으로 정삼각형을 그리면 금당의 후면 어칸 중앙과 꼭지점이 일치한다는 것과 각 탑의 중심이 전면 회랑 폭의 1/4지점(43唐尺)에 놓인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일치한다. 그러나 탑의 위치가 정확히 1/4지점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 중앙 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탑의 중심을 연결한 선도 회랑과 평행을 이루고 있지 않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배치에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원칙은 있었으되 기하학에 근거한 배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건물을 짓든지 의도는 반드시 있으므로 어떠한 원칙을 가지고 건물을 배치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네다는 탑도 모듈의 개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석가탑 지대석의 길이를 14.6당척이라고 환산하고 이는 43당척의 1/3이라고 결론 지으면서 탑의 크기도 전체적인 모듈개념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역시 아직은 더 연구해봐야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분석으로는 오히려 금당의 기단의 칫수가 중요한 모듈로 작용한 것 같다. 우선 요네다의 글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에 실려있는 자료(불국사가람의 실측치와 복원치와의 대비표)를 보면 곡척(曲尺)에서 당척으로 결과를 보면 각 부분 별로 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영훈선생은 이러한 오차에 대하여 건물을 짓는 담당 목수의 장척(목수가 현장에서 만들어 사용하는 기준척)이 조금씩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건축의 과정을 추정하여 보면 먼저 배치의 원칙이 설정된 후 각각의 건물은 담당한 목수의 재량 하에 건물이 지어졌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건물자체의 척도로 배치의 비례를 분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 같다.

김성우교수는 「통일신라시대 불교건축의 변화」(건축역사연구 1992년12월 : 대한건축역사학회)라는 논문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 탑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금당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건축이 표현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고려하여 볼 때 오히려 금당이 전체 배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금당의 위치가 설정된 후에 기타의 부속시설의 관계가 설정될 수도 있다는 가정에 이르게 된다. 불국사의 배치도를 보면 금당은 행랑으로 둘러싸인 영역의 중심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배치되어있다. 이러한 배치는 앞에 탑을 설치하는 것이 전제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불국사복원보고서」에 있는 대웅전일곽 평면도(도판 231)로 금당기단과 강당기단의 거리를 살펴보면 금당의 측면기단의 폭과 거의 같고(0.988내외) 금당의 기단의 끝과 회랑 주심까지의 거리는 금당측면 기단의 폭의 약 1.5배(1.429내외) 정도가 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오히려 전체 사역이 결정된 후 금당의 크기를 설정하고 후에 주변의 건물과 회랑의 기둥간격 등이 설정된 것은 아닌가 추측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정밀한 실측자료가 아닌 보고서의 도면을 가지고 분석하였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찌하였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 기술적인 관점에서 본 불국사

미(美)적 관점에서 볼 때 불국사는 매우 수준이 높은 건축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통일 신라 성대의 미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건축의 수준은 어떠할까. 건축수준을 가늠하여 볼 수 있는 자료는 기술측면과 사상측면 두 가지이다. 기술부분은 건축구조의 안정성, 시공능력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사상적인 측면은 자신의 사고를 형상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가 될 것이다.

첫 번째로 기술측면의 능력을 알아보기로 하자. 건축에서 구조의 안정이 제일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건축의 구조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불국사에서 구조개념에 대한 이해 정도는 석축과 백운교에 설치된 홍예를 보면 그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홍예는 속틀홍예와 겉틀홍예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든 것은 구조만을 위한 홍예를 설치할 경우 외관이 둔중해지므로 보다 날렵하게 보이도록 2중 구조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홍예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틀홍예와 속틀홍예의 구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속틀홍예는 우리의 눈에 익은 홍예의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나 겉틀홍예는 홍예종석이 거꾸로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구조일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비합리적인 구조라고 생각될 수 있으나 차분히 생각하여 보면 매우 합리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겉틀홍예는 미적 요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모습을 기존의 홍예와 같이 개별의 돌로 만들면 필요한 미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름다움만을 고려하여 돌을 가공하는 것도 기술의 제약이 있고 만들어 설치한다고 하여도 곧 처짐과 하중 때문에 돌이 부러져 버릴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고려하여 홍예돌을 3개로 나누어 제작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구조의 목적으로 만든 속틀홍예에서 발생한다. 홍예는 설치되고 안정이 될 때까지 약간의 처짐이 생긴다. 속틀홍예의 돌들은 이러한 약간의 처짐이 생기고 나서 안정된 구조를 이룬다. 속틀홍예는 처짐으로 안정이 되지만 겉틀홍예는 부재를 길게 만들었기 때문에 처짐이 있으면 홍예종석이 오히려 빠져나갈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석의 형태를 반대로 설치한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구조의 처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생각해낼 수 없는 방안이다.

석축을 보면 또 다른 구조에 대한 배려가 있다. 석축의 구조적이 배려는 '동틀돌'이다. 이러한 기법은 석불사에서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석불사의 돔도 이러한 '동틀돌'을 이용하여 구조의 안정을 꾀하고 있다. 같은 사람이 만든 구조물이라 같은 기법이 도입된 것을 보여진다. '동틀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조적으로 잘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동틀돌' 머리 부분에 홈을 파서 수평 수직 부재들이 끼워지게 되어있다. 이 홈에 부재를 끼워 넣었기 때문에 토압에도 밀려나지 않고 천여 년의 풍상에도 견딘 것이다. '동틀돌' 기법은 석축을 수직으로 쌓거나 강한 압력에 견디기 위하여 필요한 기법이다. 석축을 수직으로 쌓지 않을 경우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불국사의 석축을 수직으로 쌓았기 때문에 '동틀돌'을 고안한 것이고 만일 '동틀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불국사의 쉽게 붕괴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동틀돌'은 아니지만 석재의 뒷뿌리를 깊게 만들어 구조에 안정을 주는 기법은 최근까지 이어져와서 수원의 화성에서도 사용되었다. 수원의 화성은 당시의 최신 화포의 위력에 견디도록 계획된 성이기 때문에 강력한 포격에도 성이 일시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돌의 뒷뿌리를 깊게 하여 축조하였다. 이러한 축성의 기법 때문에 한국전쟁당시의 폭격에도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불국사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석축의 그랭이질이다. 돌을 정밀하게 결구하기 위한 그랭이질의 기법은 우리 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영훈선생의 고인돌에 대한 글(한옥문화 제 9호)에 의하면 고인돌에도 받침석과 지붕돌을 잘 맞추기 위하여 그랭이질을 사용하였고 장군총에서도 그랭이질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불국사보다 앞서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분황사탑의 기단에서도 그랭이질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돌을 결구하기 위하여 그랭이질 하는 것은 삼국시대에 이미 어느 정도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에서는 그랭이질이 석축 하단부에서 보이는데 이것은 자연석에서 인공석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한 기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랭이질을 위해서는 대단한 공력과 시공 기술이 필요하다. 그랭이질을 하기 위해서는 그랭이질 할 돌을 맞추어야 할 돌 위에 얹어놓고 그래자로 그랭이질을 할 형상을 그린 후 뒤집어 가공하여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하여야 정확한 맞춤이 이루어진다. 크고 무거운 돌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과 도구가 없으면 불가능한 기술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국사를 짓는 시절에는 현대건축에서도 쉽게 구사할 수 없는 기술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국사의 석조물을 보면 그랭이질에서 발전된 기법이 많이 활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틀돌'에 홈을 만들어 부재들은 이어진 것도 마찬가지이고 계단의 경사소맷돌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랫부분에 홈을 파 맞추어지도록 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불국사의 미학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여러 개념 중에 '대칭'과 '대비'가 있다. '대칭'의 개념은 권위적인 건축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자금성이다. 배치계획에서도 정확한 '대칭'을 유지하고 있고 또한 내부 건물에서도 '대칭'의 개념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칭의 개념은 권위를 보여주어야 하는 신전이나 권력이 강하게 집중되어 있는 국가의 왕궁의 경우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절도 종교적인 권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강한 대칭성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쌍탑 가람은 이러한 대칭성을 강조함으로써 권위를 나타내고자 하는 뜻이 어느 정도는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불국사도 쌍탑가람의 전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칭성이 강조된 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국사에서는 이러한 '대칭'의 개념보다는 '대비'의 개념이 오히려 강하게 느껴진다. 석가탑과 다보탑, 거친 자연석으로 쌓여진 석축과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만들어진 청운교와 백운교와의 대비, 거칠게 다듬은 석축하부와 잘 다듬어진 석축의 상부, 범영루와 경루의 기둥, 사바세계를 의미하는 대웅전영역과 극락전영역의 대비 등 모든 것이 대비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교묘한 장치 속에서 대립적 구조로 느껴지지 않고 조화됨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불국사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불국사에서는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자유롭게 구사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대칭을 깨뜨리는 능력은 쉽게 얻어 지는 것은 아니다. 실무를 통하여 절실히 느끼는 것이지만 대칭의 요소를 깨뜨리는 것은 쉽지 않다. 웬만한 자신감이 없다면 대칭을 깨뜨린다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대칭을 깨뜨리는 솜씨를 지닌 건축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불국사를 건축한 건축가의 능력은 한마디로 신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립을 통한 대칭의 경직성을 풀어내고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석축에서의 절묘한 변화 그리고 대칭 속에서의 비대칭 그리고 은유와 균형 이러한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솜씨가 아님은 분명하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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