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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관점으로 집 읽기
깜보입니다
2006. 10. 18. 10:33
우리 관점으로 집 읽기
우리는 우리와 다른 문화를 접할 때 그 문화를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다른 문화를 해석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 문화에 대한 왜곡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근본적 태도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접근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다. 역사도 이와 같다고 본다. 지금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문화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전공하였다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누가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 말을 새겨 생각하여 보면 역사가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해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란 해석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기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말이라는 것은 어떠한 개념이 완성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콩의 개념이 발전하기 전 고대로마에서는 "씨앗이 깍지 속에 들어있고 '죽'이나 '퓌레'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레구멘(legumen)으로 불렀다. 레구멘은 모으다, 채취하다. 또는 선택하다. 고르다는 뜻을 가진 동사 레고(lego)에서 유래되었다"라고 한다.(먹거리의 역사-상:54쪽) 이것은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에 관점을 두고 사물을 본 결과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분화되어 각각에 이름이 붙어있다. 이것은 우리가 더 많은 종류의 먹거리를 개발시키고 다른 관점에서 콩을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이러한 예처럼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건축에서 많이 쓰고 있는 단어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공간(空間 : space)'단어는 최소한 20세기 전에는 우리에게는 없었던 단어이다. '건축(建築)'이란 단어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근세에 일본이 만들어 동아시아에 퍼뜨린 단어일 뿐이다. 이러한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철학(哲學), 민족(民族), 세포(細胞) 등등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의 모든 단어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식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우리에게 이러한 단어가 가지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미미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조차 없던 단어를 가지고 마치 과거에도 이러한 개념이 있었던 양 사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사이 한옥에 대한 글을 보면 가끔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선험적 경험에 의하여 판단한다. 즉 자기가 경험해온 것에 근거하여 사물을 재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을 많이 속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과학적 사고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적 미감이 자리잡은 사람들은 서구적 미감에 의하여 미를 판단하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단어가 없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 경직되게 이야기한다면 '단어가 없는 이상 우리는 사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옥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공간'의 개념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여진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우리의 건축용어에는 '복원'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우리의 건축을 돌아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우리의 집은 나무로 지어졌다. 나무로 지어진 집들은 영구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집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어져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있는 곳이 문화재 보수 부분이다. 요사이 옛집을 돌아보면서 문화재의 보수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문제는 손상된 부재를 교체할 때의 문제이다. 전면적인 보수를 하지 않고 문제가 있는 부분만 보수를 하다보니 새로운 것과 예전 것이 부조화를 이루어 영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고칠'을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리 눈에 편하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무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무란 시간이 지나면 썩고 색이 변하기 마련이다. 전면적으로 보수함이 없이 부분적으로 보수하게 되니 부조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나무로 만든 집에는 재료의 속성에서 나오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면 우리에게 집이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다시 고쳐지어야 하는 대상이다. 과거 우리에게 문화재라는 인식도 없었고 집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달라 보전해야할 대상으로 이식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집은 고쳐지어야 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영속성의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면 집에 대한 생각은 무척 달라졌을 것이나 우리 선조들의 집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몽골의 주거인 '게르'를 보면 이동하는 천막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공간', '건축', '거실', '침실' 등의 단어는 생소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인식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 인식되어지는 집은 둥근 원 내부에서 몽골의 사회적 위계 때문에 분화되는 '장소의 개념' 밖에서는 없다. 이러한 것을 서양은커녕 우리 나라 집의 개념으로 '게르'를 해석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결국 '게르'는 몽골인의 인식체계로서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한마디로 왜곡이다. 그러므로 집을 해석함에 있어 과거 선조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요사이 일부 건축가 또는 학자들이 현재의 개념으로 과거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우리의 건축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집이 공간의 개념으로 발전해온 것처럼 분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과거의 건축에 관련된 용어를 찾아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의 건축관을 분석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한다. 우리의 건축을 우리의 개념으로 살려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의 집을 돌아보면서 내린 결론은 서양 건축에서 말하는 공간의 개념은 한국건축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집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바라다보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히려 맞는 표현일 것이다. 집의 지붕선의 중첩을 보면서 동양산수화에서 산이 중첩되어있는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결코 투시도법의 시각이 아니다는 것을 깊게 느낀다. 우리의 그림에서는 서양의 투시도법적인 그림이 없다. 그림 상에서의 원근(遠近)을 화면상의 위치와 먹의 농담으로 표시한다. 또한 대상의 중요도는 대상의 화면상의 크기로서 결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림에서 결코 지금과 같은 투시도법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우리의 인식체계는 결코 투시도법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 투시도법적 사고체계가 형성된 것은 어떠한 부분을 그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산수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우리는 투시도법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원경을 그릴 때는 사물을 투시도법적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투시도법적 기법이 별반 필요가 없게 되고 그야말로 동양화적 기법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화의 원근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동양화적인 원근법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단지 그림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이해할 때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건축을 하는 나의 경우 설계의 초안을 만들기 위하여 스케치를 할 때 투시도법에 근거하여 스켓치를 한다. 가끔 나의 건축적 사고가 이러한 투시도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만일 투시도법이라는 것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나의 사고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투시도법에 의한 스켓치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시도법적 공간개념에 의하여 건축 공간을 만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투시도법에 의한 소실점을 강조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사고의 도구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결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옛날 우리의 건축 도면을 보면 이러한 투시도법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투시도법적인 인식체계가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것 때문에 집에 대한 인식에서도 투시도법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집에서 전 후의 깊이를 가지는 건물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체계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 즉 투시도법적 사고를 못하였기 때문에 집에서도 깊이를 느끼지 못하고 평면적이 되는 것은 아닐까한다. 앞서 이야기한 지붕선의 원경이 그러하고 건물에서도 몇 몇의 회랑류의 건물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 열주를 활용한다든지 하는 어떠한 투시도법적인 체계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투시도법적 사고가 있었다면 특히 궁궐 같은 건물이 지금과 같이 넓은 면이 정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좁은 측면이 정면으로 변화되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배경과 독립하여 서있는 개체로 인식하였다기 보다는 마치 산수화를 보듯 자연 속의 일부로 인식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집의 구조를 볼 때도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자연에 대한 방어의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집의 개방적 구조가 바로 그러한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폐쇄적 구조의 집에서는 외부로의 발산을 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내부의 인식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서양의 집들이 투시도적인 효과를 강조하게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집을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집을 다시 재발견할 수 있는 실타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사이 많이 느끼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생각을 정리하고 사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문화를 접할 때 그 문화를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다른 문화를 해석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그 문화에 대한 왜곡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근본적 태도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로 접근하여야 하는 것이 옳은 태도이다. 역사도 이와 같다고 본다. 지금의 삶과 다를 수밖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또 다른 문화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전공하였다는 많은 사람들이 '역사는 누가 해석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 말을 새겨 생각하여 보면 역사가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해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역사란 해석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현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기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말이라는 것은 어떠한 개념이 완성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콩의 개념이 발전하기 전 고대로마에서는 "씨앗이 깍지 속에 들어있고 '죽'이나 '퓌레'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레구멘(legumen)으로 불렀다. 레구멘은 모으다, 채취하다. 또는 선택하다. 고르다는 뜻을 가진 동사 레고(lego)에서 유래되었다"라고 한다.(먹거리의 역사-상:54쪽) 이것은 '어떻게 먹을 수 있는가'에 관점을 두고 사물을 본 결과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분화되어 각각에 이름이 붙어있다. 이것은 우리가 더 많은 종류의 먹거리를 개발시키고 다른 관점에서 콩을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이러한 예처럼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는가에 따라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것이다. 건축에서 많이 쓰고 있는 단어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자 '공간(空間 : space)'단어는 최소한 20세기 전에는 우리에게는 없었던 단어이다. '건축(建築)'이란 단어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근세에 일본이 만들어 동아시아에 퍼뜨린 단어일 뿐이다. 이러한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철학(哲學), 민족(民族), 세포(細胞) 등등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의 모든 단어들은 대부분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식된 단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는 우리에게 이러한 단어가 가지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미미한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개념조차 없던 단어를 가지고 마치 과거에도 이러한 개념이 있었던 양 사물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사이 한옥에 대한 글을 보면 가끔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선험적 경험에 의하여 판단한다. 즉 자기가 경험해온 것에 근거하여 사물을 재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을 많이 속여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과학적 사고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한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적 미감이 자리잡은 사람들은 서구적 미감에 의하여 미를 판단하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단어가 없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 경직되게 이야기한다면 '단어가 없는 이상 우리는 사고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옥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있는 '공간'의 개념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여진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우리의 건축용어에는 '복원'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지만 우리의 건축을 돌아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우리의 집은 나무로 지어졌다. 나무로 지어진 집들은 영구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집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어져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있는 곳이 문화재 보수 부분이다. 요사이 옛집을 돌아보면서 문화재의 보수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띠는 문제는 손상된 부재를 교체할 때의 문제이다. 전면적인 보수를 하지 않고 문제가 있는 부분만 보수를 하다보니 새로운 것과 예전 것이 부조화를 이루어 영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편으로 '고칠'을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리 눈에 편하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무의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나무란 시간이 지나면 썩고 색이 변하기 마련이다. 전면적으로 보수함이 없이 부분적으로 보수하게 되니 부조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나무로 만든 집에는 재료의 속성에서 나오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면 우리에게 집이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다시 고쳐지어야 하는 대상이다. 과거 우리에게 문화재라는 인식도 없었고 집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 달라 보전해야할 대상으로 이식되지 않았다면 당연히 집은 고쳐지어야 하는 것이다. 집에 대한 영속성의 개념이 있었다고 한다면 집에 대한 생각은 무척 달라졌을 것이나 우리 선조들의 집에 대한 생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어보자 몽골의 주거인 '게르'를 보면 이동하는 천막과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공간', '건축', '거실', '침실' 등의 단어는 생소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인식할 수도 없다. 그들에게 인식되어지는 집은 둥근 원 내부에서 몽골의 사회적 위계 때문에 분화되는 '장소의 개념' 밖에서는 없다. 이러한 것을 서양은커녕 우리 나라 집의 개념으로 '게르'를 해석하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결국 '게르'는 몽골인의 인식체계로서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한마디로 왜곡이다. 그러므로 집을 해석함에 있어 과거 선조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요사이 일부 건축가 또는 학자들이 현재의 개념으로 과거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우리의 건축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집이 공간의 개념으로 발전해온 것처럼 분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과거의 건축에 관련된 용어를 찾아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이 개념을 중심으로 우리의 건축관을 분석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한다. 우리의 건축을 우리의 개념으로 살려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우리의 집을 돌아보면서 내린 결론은 서양 건축에서 말하는 공간의 개념은 한국건축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집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바라다보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히려 맞는 표현일 것이다. 집의 지붕선의 중첩을 보면서 동양산수화에서 산이 중첩되어있는 느낌을 갖는다. 이것은 결코 투시도법의 시각이 아니다는 것을 깊게 느낀다. 우리의 그림에서는 서양의 투시도법적인 그림이 없다. 그림 상에서의 원근(遠近)을 화면상의 위치와 먹의 농담으로 표시한다. 또한 대상의 중요도는 대상의 화면상의 크기로서 결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림에서 결코 지금과 같은 투시도법적인 개념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예를 볼 때 우리의 인식체계는 결코 투시도법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 투시도법적 사고체계가 형성된 것은 어떠한 부분을 그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산수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우리는 투시도법적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원경을 그릴 때는 사물을 투시도법적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투시도법적 기법이 별반 필요가 없게 되고 그야말로 동양화적 기법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화의 원근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동양화적인 원근법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단지 그림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물을 이해할 때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건축을 하는 나의 경우 설계의 초안을 만들기 위하여 스케치를 할 때 투시도법에 근거하여 스켓치를 한다. 가끔 나의 건축적 사고가 이러한 투시도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만일 투시도법이라는 것이 나에게 없었더라면 나의 사고는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투시도법에 의한 스켓치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시도법적 공간개념에 의하여 건축 공간을 만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투시도법에 의한 소실점을 강조하는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자신이 사용하는 사고의 도구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결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옛날 우리의 건축 도면을 보면 이러한 투시도법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투시도법적인 인식체계가 발달하지 못하였다는 것 때문에 집에 대한 인식에서도 투시도법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의 집에서 전 후의 깊이를 가지는 건물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체계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 즉 투시도법적 사고를 못하였기 때문에 집에서도 깊이를 느끼지 못하고 평면적이 되는 것은 아닐까한다. 앞서 이야기한 지붕선의 원경이 그러하고 건물에서도 몇 몇의 회랑류의 건물을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 열주를 활용한다든지 하는 어떠한 투시도법적인 체계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을 입증하여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투시도법적 사고가 있었다면 특히 궁궐 같은 건물이 지금과 같이 넓은 면이 정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좁은 측면이 정면으로 변화되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배경과 독립하여 서있는 개체로 인식하였다기 보다는 마치 산수화를 보듯 자연 속의 일부로 인식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집의 구조를 볼 때도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자연에 대한 방어의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집의 개방적 구조가 바로 그러한 것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폐쇄적 구조의 집에서는 외부로의 발산을 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내부의 인식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서양의 집들이 투시도적인 효과를 강조하게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집을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집을 다시 재발견할 수 있는 실타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사이 많이 느끼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생각을 정리하고 사례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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