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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연, 문화 그리고 집 - 04

깜보입니다 2006. 10. 18. 10:34
나. 건축 재료와 자연 환경

자연환경 때문에 결정되는 요소 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이다. 공업이 발전하기 전 모든 지역의 건축재료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로 집을 지었다. 그러므로 집의 재료는 자연환경에 의하여 결정될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한 집의 구성요소들은 기후에 적응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궁리로 만들어지는 고안품에 가깝지만 건축에 소요되는 재료는 사람의 궁리로 어찌할 수 없는 가장 자연적 요소이다. 한옥을 살펴보면 한옥을 짓는데 들어가는 재료 중에서 공산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와뿐이다. 기타의 것은 대부분 주변에서 수집 또는 채취하여 현장에서 가공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나라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공업과 교역이 발전하기 전의 문명에서는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만의 독특한 건축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벼농사를 하였기 때문에 초가집이라는 지붕구조를 만들어낸 것이고 강원도 산골에 있는 집의 지붕 재료가 굴피나 너와 또는 천연스레트 지붕으로 되는 것은 그 곳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쉽게 얻어지는 재료로 집을 짓는 것 때문에 우리만의 정서가 형성된다. 볏짚으로 이어 얹은 초가집은 초가집만의 지붕선을 만들어낸다. 초가지붕의 곡선은 우리 나라에서 가끔 예를 찾을 수 있는 억새지붕과도 전혀 다른 맛이다. 재료의 성질 때문에 억새지붕의 지붕선은 초가만큼 부드럽지 못하다. 초가는 초가만의 선이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부분의 민가는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옛 시골집의 정경은 이러한 부드러운 곡선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선들의 집합은 우리의 정서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자연환경 때문에 사용된 재료가 우리의 정서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우리만의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매우 중요한 문화요소이기 때문에 자연환경과 정서의 장에서 좀더 깊게 다루기로 한다.

우리 나라에 돌로 만든 집이 없는 것은 화강석이라는 독특한 석재 때문이다. 화강석은 매우 단단하여 다루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단이나 일부 석공예품에는 적합할지 몰라도 건물을 짓는데는 너무 많은 공력이 들어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강석으로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견고함이 필수인 성(城)과 기단, 기초 외에는 화강석을 건축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고대 그리스나 이탈리아에 대리석으로 만든 집이 많은 것은 주변에 양질의 대리석이 많기 때문이다. 대리석은 화강석에 비하여 돌이 단단하지 않아 가공이 쉽기 때문에 예로부터 조각이나 건축에 많이 이용되어왔다. 대리석이라는 돌 때문에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집은 우리의 집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리석을 옮긴다든지 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대리석의 건물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이탈리아의 건물도 실제로는 속은 벽돌로 쌓고 겉만 대리석으로 치장하여 대리석 건물로 보이게 한 예가 많이 있다. 이만큼 돌로 집을 짓는 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어쨌든 석재의 성질은 집의 형태나 조각의 한계까지도 결정한다. 대리석 조각이 정교하고 사실적일 수 있는 것도 돌의 성질 때문이다. 대리석은 무르고 질이 치밀하여 잘 가공하면 사람의 피부보다도 더 매끄럽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대리석의 성질 때문에 그리스에서 사실주의적 조각 문화가 일찍부터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석공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도 화강석을 가지고 대리석과 같은 형태와 질감을 나타낼 수 없다. 대리석과 같은 질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화강석 돌의 입자가 커서 세밀한 조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돌이 너무 단단하여 화강석을 사포로 가공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강석 조각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대리석 보다 치밀하게 될 수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의 문화가 서양의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결코 우리의 화강석 문화가 그리스나 로마의 것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석굴암의 본존불이나 십일면 관음상 등은 화강석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다. 서양의 각수에게 우리의 화강석으로 조각하라고 한다면 이만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석재문화를 비교하려면 각각의 돌의 성질을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최고의 문화를 만들어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문화를 이해하는 바른 관점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자연환경은 바로 문화의 성격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도 마찬가지이다. 가공하기 쉬운 석재를 구할 수 없다는 자연환경 때문에 석재로 만든 집이 없는 것이다.

목재를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집과 조선시대의 집을 비교하여 보면 차이를 보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절의 유구를 보면 대부분 다듬은 원형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고 조선조에 들어서면 막돌 주춧돌을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변화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건물의 중요도, 경제적인 여건, 건축에 대한 생각의 변화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자연환경의 변화로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가에 여부에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조에 들어서 특히 후기에 지은 집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좋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목재의 수급 한도 내에서 집을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좋고 굵은 나무가 많다면 누구라도 잘 가공하여 좋은 집을 만들 것을 원한다. 그에 따라 주춧돌도 잘 가공하여 격에 맞는 좋은 집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수급상황이 여의치 못하다고 하면 이러한 문제는 생각할 수 없다. 기둥을 가지런히 만들 수 없는데 주춧돌만 가지런히 만든다고 집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나무의 남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땔감으로 나무를 사용하여왔다. 이러한 이유로 나무를 많이 사용하여 주변의 나무가 점점 사라져 가게되었다. 따라서 과거에는 주변에서 쉽게 양질의 나무를 구할 수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집을 지을 때 쓸 수 있는 좋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져 갔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의 근거는 조선조에 들어서 국가에서 집을 지을 목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함부로 벌목하지 못하도록 국가에서 관리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가 직접 나무를 관리할 만큼 집을 지을 나무를 구하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근세에 이르러 남벌로 인하여 우리 나라 많은 산이 나무가 없어 민둥산이 되어버린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조 후기에 지은 집들에서 곧은 나무를 사용하는 경우가 점점 드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적인 분석방법의 발달로 자연환경훼손으로 예전과 지금의 상황이 전혀 달랐던 예는 많이 발견되고 있다. 황하유역도 예전에는 매우 비옥한 땅이었다고 하며, 아테네 주변도 예전에는 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예들로 추측하여 볼 때 과거의 우리 나라의 자연환경도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 초기까지만 하여도 서울근교에서 호랑이가 출몰하였다고 한다.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이면 숲이 매우 깊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한 산을 상상하여 보면 나무가 울창하였을 것이고 나무의 수급은 매우 원활하였을 것이다. 나무의 수급이 원활하다는 것은 싼값으로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양도성 만을 놓고 보더라도 조선조 초기 호랑이가 출몰하는 정도라면 목재의 수급이 원활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같은 값으로도 조선시대 초기에는 조선시대의 후기보다 훨씬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조선시대의 후기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집의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꼭 그렇게 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집의 수준은 절대적인 경제사정 만으로 파악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다. 집의 형태와 자연환경

우리 나라의 집의 구성을 이야기 할 때 입 구(口)자 집이니 열린 입 구(口)자 집이니 양통집이니 겹집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다음부터는 입 구(口)집이라는 단어보다는 ㅁ자집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집의 형태는 무엇보다도 자연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ㅁ자 집은 폐쇄적인 집이다. 폐쇄적인 집이 발생하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폐쇄적인 건축물 중 대표적인 것은 성(城)으로서 외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쌓은 것이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폐쇄적인 구조를 한 집이 지어지는 이유를 보면 자연적인 환경이나 사회적인 환경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폐쇄적인 집의 구조가 결정되는 예는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자연환경에 대한 문제만을 언급하여 보자. 자연 환경 때문에 폐쇄적인 구조로 되는 원인은 바로 동물에 대한 방어이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방어를 하기 위하여 고안된 대표적 구조가 고상주거이다. 이러한 고상주거는 습기에 대한 문제도 있지만 뱀을 대비하기 위하여 고안된 구조라고 한다. 고대에는 고상 주거 아랫부분에 뱀의 천적인 돼지를 키워 뱀에 대한 방비를 하였다고 한다. 현재 구석기 시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파푸뉴기니아에서는 아직 이러한 주거 방식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영훈선생의 글(우리문화 이웃문화 : 18쪽)에서 서희건(徐熙乾)씨의 집 가(家)자에 대한 견해를 전하고 있다. 서희건씨의 주장에 의하면 집 가(家)라는 한자는 집(  : 움집 면) 아래 돼지(豕 : 돼지 시)를 키우는 형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영훈 선생은 같은 책에서 집 아래 돼지를 키우는 고상주거의 방식은 쌀을 재배하는 곳에서 만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집 가(家)자는 이동생활을 한 중원의 한족은 생각할 수 없는 고대 동이족(東夷族)이 집을 짓는 방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책에서 명지대학의 진태하(陳泰夏) 교수의 연구결과를 소개하고 있는데 집 가(家)자 나 가을(秋)자는 한족(漢族)은 생각해낼 수 없는 글자이므로 한자가 한족만의 고유의 개발품이 아니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있는 고상 주거의 방식이 변형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된 예가 고구려 시대의 창고인 부경이다. 이렇게 창고를 높이 올린 것은 동물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바이칼호 주변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방식으로 창고를 짓고 있다.

자연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쨌든 기후이다. 기후에 적응하기 위하여 온돌이라는 독특한 난방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난방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열을 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을 빼앗기지 않는 것도 난방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요사이 건물에서는 보온과 단열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물의 보온효과를 높여놓았다. 대표적인 예로 벽체를 2중으로 쌓은 후 그 가운데 단열재를 충진하거나, 지붕과 바닥에도 단열재를 넣어 열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또한 유리창은 복층유리로 사용하고 창문의 기밀성을 높여 실내의 공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의 집은 예전에 비하여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효율이 높아졌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집은 기후에 따라 집의 구조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예전만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전에는 충분한 난방을 할 수 없어 추운 겨울을 나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의 구조까지도 열을 빼앗기지 않는 구조로 변형시켰다. 대표적인 예가 겹집이다. 우리 나라 북부 지방과 강원도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집의 구조는 방들을 밭 전(田)자의 형태로 배치하여 외기(外氣)에 면하는 부분의 면적을 줄여 집안의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겹집의 대표적인 예는 까치구멍집이다. 경북 영덕에 있는 까치구멍집은 田자를 겹쳐 놓은 형태로서 한 쪽의 田자 부분은 살림공간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田자 부분은 부엌과 봉당 그리고 외양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겹집의 구조를 가진 곳은 외양간을 실내와 면하도록 하여 놓았는데 이는 날씨가 추워 동물을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부엌과 붙여 놓아 쇠죽을 끓이는 열조차도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까치구멍집은 별도의 굴뚝이 없다. 연기는 지붕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까치구멍)으로 배출은 시키는데 이것은 연기를 가두어 놓아 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까치구멍집은 안동뿐만 아니라 경상북도 영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렇게 남쪽까지 내려간 것은 이곳의 기후와도 관계도 있지만 이곳이 과거 한때나마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이라 북방의 집 구조가 전파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하여볼 수 있다.

자연현상 중 눈에 적응하기 위한 예를 하나 더 찾아보자. 울릉도의 집은 우리 나라 다른 지역과는 다른 집 구조를 하고 있다. 울릉도는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울릉도의 집 구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의 집 구조와는 다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55호로 지정된 너와집의 집의 예에서 보듯이 집의 주위 퇴칸을 설치하고 퇴칸 외주부에 바자, 빈지, 이엉 등으로 만든 우대기라는 것을 둘렀는데 이것은 밖에 눈이 쌓여도 처마 밑의 공간을 확보하여 집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울릉도가 실제로 사람이 살던 것은 100년 전쯤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는 나라에서 섬에 사람들이 살지 못하게 하여 거주민이 없었다고 한다. 민속자료로 지정된 울릉도의 집은 처음 이곳에 정주하기 시작한 강원도 사람들의 집이라고 한다. (한국의 살림집 ; 103-104) 집의 구조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은 울릉도로 이주하여 오면서 일찍이 익숙해져 있던 집의 구조를 그대로 옮겨갔기 때문에 눈의 하중에 대비한 집의 구조로 발전시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눈의 하중을 고려한 구조체로 집을 변경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문제보다는 눈 때문에 발생되는 생활의 불편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되어야 할 급선무였을 것이다. 눈에 의하여 문이 막히는 등 생활에 당장 지장을 주는 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 주변에 생화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집 주변에 눈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시설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집이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한 것은 곧 새로운 현대식 공법이 이곳에 도입되어 그 이상으로 발전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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