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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음성 김주태 가옥

깜보입니다 2006. 11. 1. 12:52

음성 김주태가옥 (중요민속자료 141호)

                                     김주태 가옥 배치도


                                       김주태가옥 사랑채에서 본 경관

김주태가옥은 넓은 들을 바라보는 언덕배기에 위치하고 있다. 사랑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집이다. 언덕에 집을 짓다보니 사랑채가 높은 석축 위에 지어져 언뜻 권위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 집의 사랑채 상량대에 大韓光武五年辛丑二月初七日上梁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1901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채와는 건립에 시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사랑채보다는 일찍 지어진 것 같다. 사랑채는 부재의 대부분이 옛집의 것을 재 사용한 것에 비하여 안채의 부재는 넉넉한 부재로 튼실하게 지어졌다. 조선조 말에 들어 목재의 수급사정이 나빠지면서 집을 지을 때 새로 가공한 목재로 집을 짓기보다는 기존의 집을 해체하여 짓는 경향이 증가한다. 따라서 튼실한 재료로 지어진 안채는 상대적으로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시기인 조선조 말기 이전에 지어진 것이고 사랑채는 1901년 다시 지으면서 다른 곳에서 해체한 집의 부재를 활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랑채와 중문(사랑채 좌측에 있음)

 

이 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집의 배치에 있다. 김주태가옥은 다른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배치를 하고 있다. 이 집은 전면에 사랑채을 ㅡ자로 배치하고 사랑채 중앙부분을 기준으로 안채를 丁자형으로 배치하였다.(김주태 선생은 전체의 모습을 工자형 집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사랑채와 안채는 낮은 벽으로 다시 구분하여 내외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이다. 대부분의 집은 중문이 내외를 구분하기 위한 시설로서 마지막이다. 그러나 김주태가옥은 중문 안에 별도의 담으로 둘렀을 뿐 아니라 안채로 들어가기 위한 문까지 설치하였다. 결국은 내외를 위한 구조가 2중으로 되어있는  셈으로 내외의 강도를 한층 높여 놓았다.

 

19세기말부터 조선은 개화라는 필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는 남녀유별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사회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때쯤 지어진 집을 보면 조선조 중기의 집보다 내외의 문제가 강화되어 있는 집을 가끔 찾아볼 수 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성리학적 남녀의 관계가 보다 더 경직되어 가는 과정이 집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김주태가옥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안채가 조금은 답답하게 되었다. 사랑채에서 바라다보는 시원한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안채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사랑채에서 안채가 들여다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가리개형식의 담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담으로 완전히 구분 지워버렸다. 그래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사이에는 좁은 골목이 형성된다. 이 골목이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골목(협문이 보임)

 

또한 이러한 폐쇄적인 구분은 안채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중앙의 몸체를 중심으로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구성은 안주인이 안채 양쪽 모두를 관리하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중문 쪽의 안채는 보다 공적인 장소로 활용되고 안쪽은 보다 개인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의도는 지붕과 평면의 구성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중문과 연결된 마당 쪽에 있는 지붕은 다른 안채의 건물의 지붕보다 높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이곳에 모든 안채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대청도 두 칸 크기로 만들어져 안쪽에 있는 한 칸 규모의 대청보다 넓게 되어 있어 집안 모임의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다.

 

뒤쪽의 안채는 매우 폐쇄적이다. 공식적인 통로는 부엌을 통하는 길밖에는 없다. 이 곳에 기거하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이 안채의 감시 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아마도 안쪽의 안채는 다른 집의 별당과 같은 용도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주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의 소실이 기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는 주로 시집가기 전의 여자들이 기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식으로 볼 때 김주태가옥은 내외의 규범을 보다 강조하였던 집구조라고 할 수 있다. 

 


                                                         안채 대청

 

이 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문이 두 곳에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집에서 대문은 한 곳에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주 큰집에서 안채를 출입하기 위한 별도의 문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이 집의 사랑채에서 안채를 출입하는 문은 두 곳이다. 하나는 왼쪽에 있는 중문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채 오른쪽에 설치되어 있는 협문이다. 김주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안채를 출입할 때 중문보다는 협문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김주태선생이 어렸을 때만하여도 사랑채 앞을 감히 지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오면 바로 사랑채 앞을 지나치게 되어 집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매우 불편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사랑채는 소슬대문보다는 훨씬 높은 위치에 있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압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을 덜어주기 위하여 솟을대문과는 별도로 문을 설치하고 안채로 드나드는 문도 사랑채에서 눈에 띠지 않는 곳에 협문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어진 솟을대문과 문 그리고 담은 최근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솟을대문에서 본 사랑채

 

김주태가옥에서 가장 편안한 곳은 사랑채이다. 사랑채에 앉아 바라다보는 경관은 왜 이곳에 사랑채을 지었는지를 느끼게 한다. 경사지에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지어진 사랑채는 처음부터 경관을 의식하고 지은 집이다. 앞에 펼쳐진 논과 그리고 그 너머 보이는 산들이 어우러져 보이는 경관은 매우 시원하고 아름답다. 사랑채에서 경관을 즐기면서 이 집보다 훨씬 먼저 지어진 조선조의 집보다 한층 더 폐쇄된 구조를 보이고 있는 안채가 자꾸 대비되어진다. 김주태가옥은 철저하게 사랑채를 위한 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조 말 보수화되어버린 사회가 집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 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이 집을 다시 찾아보았다. 소슬대문를 복원한 것이 6년 전쯤이라고 하니 내가 김주태가옥을 찾은 것은 그 이전인 것 같다. 아마도 10년쯤 되지 않았나 싶다. 그 때만하여도 집 조금은 어수선해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매우 잘 관리되어 있어 너무 반가웠다. 안채, 사랑채 어느 곳 할 것 없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고 마당도 잘 관리되어 주인이 살고 계신 듯 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옛 주인처럼 사랑채 마루에 앉아 편안하게 주변을 바라볼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있는 집은 고가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숙식을 제공하고 있는 집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일반 집에서 이렇게 잘 관리되고 있는 집은 영덕에 있는 서석지 외에는 보지 못하였다. 집이 잘 관리되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아끼는 마음이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추기 :

 

김주태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안채에 쓰여진 대들보는 엄나무라고 한다. 엄나무는 오가피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인데 가시가 돋아 있어 예전에는 액막이용으로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이 집의 대들보로 엄나무를 쓴 것은 같은 액막이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집을 수리할 때 다른 것은 교체하더라도 대들보는 교체하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고 한다.

 

같은 영산리에는 중요민속자료 143호로 지정된 서정우가옥이 있다. 서정우가옥은 김주태가옥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마을에 있다. 두 집은 서로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같이 둘러보고 비교하여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아래 글을 김주태가옥과 관련하여 문화재청에 질의한 내용입니다.

 

귀청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음성의 김주태가옥(중요민속자료 141호)에 대한 건입니다.


얼마 전 음성의 김주태가옥을 다녀왔습니다. 집이 잘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잘 관리되고 있는 집을 보게 되어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8-9년 전쯤 이곳을 찾았을 때에 비하여 너무도 달라진 모습에 다른 집을 찾아왔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집주인의 집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주인의 애정에 비하여 집의 수리 상태에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안채의 경우 주요부재 70%이상을 교체하는 큰 보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을 수리하는 업체의 정성은 집주인의 정성과 비교할 때 너무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귀청에서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옛집은 목재를 다루는 방법이 다릅니다. 최근 소나무의 수급이 여의치 않아 수입목을 사용하는 것은 이해가 가더라도 그 목재를 다루는 기법까지도 제멋대로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기둥을 보면 우리나라 옛 건물의 각 기둥은 모서리를 죽입니다. 고급집의 경우 쇠시리를 두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모를 죽여 부드럽게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 모서리가 예리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작은 차이가 집 전체에 대한 인상을 결정합니다. 안채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도 차가운 느낌이 들어 예전에 보던 느낌과 전혀 달랐고 또한 우리의 옛집을 보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또한 서까래를 보면 몇몇은 말구를 아주 깍지 않거나 대충 깎아 놓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중문의 상부의 대들보 위에 설치된 동자를 판재로 쌓고 합판으로 막아 각목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못을 쳐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의 발생하는 이유는 첫 번째는 수리를 하는 당사자의 성의 부족이고 두 번째는 이것을 관리하는 감독관청의 무성의 때문입니다.


집주인의 말씀으로는 수리를 한지가 꽤 되었다고 합니다. 이미 하자기간이 지나서 시공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현상이 단지 이곳에서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최근 다녀본 모든 곳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미 이 게시판에서도 제가 몇 차례 지적한바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목재는 그렇다고 하여도 목재를 다루는 기법까지 대충 넘어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목재를 다루는 기법이 단순히 기법에서 끝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목재를 다루는 기법에는 우리의 정신이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똑같이 만드는 청자라도 중국의 청자와 우리의 청자가 다르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 것을 다루는 기법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집을 볼 때 마치 일본집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이러한 수리를 감독하는 공무원이 이러한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무지해서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일차적으로 문화재를 담당하는 직원의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잘 관리하여 주셔서 앞으로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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