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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양주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깜보입니다
2006. 11. 17. 13:25
친구에게
남도에는 꽃 소식이 화사하게 퍼지는데 서울(고궁)은 아직 멀었는가?
3월 27일 역사가 갈피 갈피 묻혀있고 활력과 생기 넘치는 새로운 도시 남양주시 역사박물관에서 '배우는 기쁨·감동의 추억'이란 슬로건(slogan) 아래 남양주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문화유적 서부 코스 탐방에 우리 창경궁, 덕수궁 지킴이 23명이 함께 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습니다.
홍유릉(洪裕陵)과 사능(思陵)
우리의 일정은 제일 먼저 황제의 능인 홍유릉 이었습니다.
천자(天子)의 아들이 땅 아래로 내려오셔서 높은 계단(陛) 위에 계시니 이를 폐하라 칭했습니다. 워낙 높으신 어른이라 돌계단 아래서나 알현 할 수 있기에 섬돌 폐, 층계 폐라는 글자를 써서 천자(天子)와의 좁혀질 수 없는 간격을 엄격히 구별하는 폐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릉인 홍릉과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황제와 순명황후 민씨, 계비 순정황후 윤씨의 동릉삼실(同陵三室)로 구성된 합장릉인 유릉입니다.
능제는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따 일자형(一字型)침전과 그 앞으로 문무인석과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순으로 홍살문까지 죽 늘어 세웠습니다. 침전뒤 봉분은 병풍석에 연화목단문을 조각하고 난간석, 상석, 망주석, 4각실의 형식의 장명등이 위엄을 떨치려 하지만 왜 이리 허전한지요?
주권을 잃은 내나라 내땅에서 무엇하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식민지시절 후손마저 없는 능침에 울울창창해야할 소나무마저 옆으로 기우는 까닭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문화는 어떻게 지켜야 하는 것인지 나라 잃은 슬픔의 앙금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생각만으로도 아픈 사능(思陵)으로 갑니다. 괜히 손이 시렵고 마음마저 시려 오는 것은 비단 오늘 날씨가 을씨년스럽기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조선 제6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입니다. 능이라기 보다는 조촐한 묘라고 불렀으면 합니다. 단종이 숙부인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 앉았으나 그 것 마저 모자라 노산군으로 강봉(降封)시켜 영월로 유배 시켰다가 서인으로 만들고 그 후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 12월 24일에 최후를 마칩니다.
정순왕후는 판돈영 부사 송현수의 딸로 15세에 왕비에 책봉된 후 3년이 지난, 당시 18세인 대왕대비는 부인으로 강등되었지요. 부부가 생이별 당하여 82세(중종16년)로 승하하기까지 조선왕조 오백년 수많은 비빈들 중 가장 한이 많았던 여인 중에 한 분이셨습니다. 정순왕후가 죽자 나라에선 대군부인의 예로 장사 지내게 했으나 장지가 없어 이 곳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 단종의 누님 경혜공주의 시댁(부마도위 영양위 정종)인 해주 정씨 종중의 묘역에 묻혔고 위패 또한 그댁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왕가에 시집와서 살아생전 마음 한 번 펴보지 못하고 죽어서까지 그 어려운 사돈댁 묘역에서 발이나 뻗어 보셨겠습니까? 숙종24(1698)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로 추봉되어 종묘에 신위가 모셔졌고 비로소 능호를 사능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탓에 석양과 석호가 한 쌍씩 배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정씨의 묘가 많습니다. 아니 정씨들의 묘에 갇혀 있다는 말이 옳겠지요. 그리운 님 생각[思]은 언제까지 해야 이 질긴 인연이 끝나는 것일까요? 평지와 다름없는 산자락 조촐하고 안존한 능역이 생전의 어리신 왕비를 뵙는 것 같아 짠한 마음속 한 줄기 싸늘한 바람에도 능의 이름처럼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켜 줍니다.
광릉(光陵)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이 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입니다.
조선 역사상 왕권 강화 정책으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도록 정화되었지요. 문치 보다는 무단 강권 정치로 수 많은 공과를 기록한 왕입니다. 왕비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파평이 본관입니다.
수양이 계유정란 당시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거사를 완성한 결단력 강한 여장부였다는 일화를 남기고 있답니다. 아들인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인 제안대군과 덕종의 장자인 월산대군을 물리치고 13살의 자을산군 성종으로 즉위시킨 과단성있는 여성으로 조선 최초의 섭정 대비이기도 했습니다.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능침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세조의 후손이 460여년에 이르도록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70만평에 달하는 광릉의 숲과 790여종의 자생식물이 보존되어 있는 산림지역이 되었습니다.
세조 이전의 왕릉들은 병풍석을 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세조는 이의 폐해가 너무 크므로“능과원의 석실은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사대석을 쓰지 말라”고 유명(遺命)을 하였지요. 이후로 신도비가 없어지고 조선조 능제의 기본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비록 병풍석은 없다고 하나 능역 안내판 옆 하마비를 지나 높게 자리 잡은 능침으로 오르는 길 양편으로 200∼400여년된 하늘을 찌를듯한 전나무들이 생전에 세조를 호위하던 무사들의 기치창검처럼 능침을 에워싸며, 호행하는 모습같아 장엄하다는 생각마저 자아내게 합니다. 높직한 정자각을 중심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왕릉과 왕비릉은 살아 있을 때의 강건한 카리스마(charisma)로 500년이 지난 후손인 우리들을 아직도 호령하는 듯 호방하고 위압적이기까지 합니다. 국가의 영속과 왕실의 자손들이 천년만년 번성하라는 넓고 긴 순전(脣前) 사초지가 500년의 종묘사직을 이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봉선사(奉先寺)
운악산 기슭 969(고려광종20)년 법인국사 탄문(坦文)이 창건 운악사라 했습니다.
그뒤 세종 이전의 여러갈래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 할 당시 혁파했다가 1469(예종1)년 정희왕후가 세조의 원찰로 삼아 중창한 뒤 봉선사 라고 했습니다.
그 후 5차례의 화재로 오늘날의 건물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큰 법당에는‘큰 법당’이란 현판이 달려 있으며 대웅전과 같은 건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글 현판을 달았으며 법당 기둥에 한글 주련이 달려 있어 이채롭습니다.
범종각에는 성화(成化) 5년(예종1)으로 기록된 대종이 정상부엔 쌍용(雙龍)의 뉴(꼭지)가 있고 음통이 없는 조선전기 종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종신에는 강희맹이 찬(撰:글짓다)하고 정난종이 서(書:글쓰다)한 긴 종명(鐘銘)이 남아있어 주종의 연유을 알수 있고 특이하게 종신에는 변송아지(邊松阿之)김말타동(金末 同)등 노비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경내에는 ㄷ자 형태의 당간지주와 큰 궤불을 걸 수 있는 높은 궤불대가 있습니다.
근세의 기록으로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인 운허대사와 그의 삼종제인 춘원 이광수가 머물었고 경내엔 춘원의 비석이 남아있습니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화무쌍 합니다.
흥국사(興國寺)와 덕흥대원군묘(德興大院君墓)
신라 진평왕 21(599)년 원광국사에 의해 수락사로 창건 되었고 1568(선조1)년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명복을 빌기위해 나라에서 원당(願堂)을 짓고 흥덕사라는 편액을 하사 하여 사람들은 이 원당 때문에 덕절이라 부릅니다. 1624(인조4)년 흥국사로 개칭되어 현재는 봉선사의 말사입니다. 특히 1790(정조14)년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백련사와 함께 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대웅전은 앞에 대방(大房)을 두고 좌우에 영산전과 시왕전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다른 절과는 달리 용마루 양 끝에 취두를, 합각마루엔 용두를 추녀마루엔 잡상을 늘어 놓아 돌아가신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왕의 반열에 올려놓는 자식으로서의 효를 행한 선조의 체취가 묻어 납니다.
대방이라 불리는 큰 건물은 '흥국사'란 현판을 달고 있는데 다섯계단 위에 기단을 놓고 또 다섯개의 계단을 올라 높은 섬돌을 놓은 ㄷ자 모양의 궁실 전각을 만들었습니다. 대웅전 법당에서 보면 이름 그대로 큰 방이 보이는 누각입니다. 이 방에서 19세기 경기도 일원 사찰 탱화의 대부분이 그려졌다 합니다. 경기도 일원 금어들의 본산이지요.
만월보전 천정은 외3출목 내7출목의 화려한 연꽃이 아로 새겨져 천상의 연화장 세계가 그대로 베풀어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단순한 인간이 아닌 하늘의 도리를 현세에 실현시키는 매개자 이었습니다.
그런 국왕의 최고의 이상적 정치질서는 예치(禮治)였습니다. 자신은 국왕이면서 생부나 생모가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는 왕들은 자신의 정통성 부여와 사친의 사후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덕흥대원군은 조선 11대 중종의 9번째 아들로 창빈 안씨 소생입니다.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후사없이 죽고 그를 이을 적손이 없자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왕위를 이어 받음으로써 조선은 선조로부터 이른바 방계 승통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선조는 아버지를 대원군으로 추존함으로서 처음으로 대원군 제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팔각의 호석을 두른 쌍분(雙墳) 앞에는 덕흥대원군, 하동부부인 정씨라는 묘비가 서 있습니다. 묘비, 묘표, 묘석, 무덤돌은 같은 말이며, 비신에 죽은이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출생, 사망년월일, 장지명을 새깁니다. 묘갈은 묘비명으로 행적을 적고 묘지석(墓誌石)은 시신과 같이 매장하는 것입니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 묘지 표시로 관직등을 표시하여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해 큰 길가에 세우는 돌비석이며, 지나가는 행인이 그 앞에서 내려 예의를 표하는 것이라 합니다.
산자와 죽은자의 화해가 제사라 했습니다. 산자보다는 죽은자를 위해 살았던 조상들의 행적과 오늘날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겪는 제사 내지는 묘제의 갈등들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한 인간의 영고성쇠와 한 국가의 영고성쇠,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비애가 극명히 대비되어 드러나는 하루였다면 지나친 비약일런지요?
맞은편 산자락 나뭇가지에는 어린아기 솜털같은 눈록(嫩綠)색 안개가 끼고 아침부터 무겁던 하늘에선 한 두송이 춘설이 흩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봄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모양입니다.
궁궐 지킴이들을 위해 특별히 안내 해설을 맡아주신 대구대학 장희흥 교수님, 문화체육과 강점순님 우리를 안전하게 답사지로 데려다 주신 방학명 기사님과 남양주시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밤 춘설은 내가 살고있는 하남의 검단산과 강건너 예봉산에 설화(雪花)를 하얗게 피워 냈습니다.
2001. 3. 27.
정 진 순
musimujong@hanmail.net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무시무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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