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계룡시 두계 은농재
두계 은농재 豆溪 隱農齋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34호)
평면은 본인의 블러그 참조 http://blog.naver.com/seongho0805/150014730389
은농재는 사계 김장생의 8째 아들인 두계공의 자손이 누대로 살아온 집이다. 이 집은 나즈막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여느 집과는 달리 동북쪽으로 향을 잡아 앉아있다. 왜 이렇게 북향하여 집터를 잡은 이유는 풍수적인 의미보다는 이미 마을이 형성된 후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넓은 들을 바라보는 형국은 향의 불리함을 극복하고도 남을 만한 자리이다.
처음 집을 대하였을 때 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평대문이기 때문이다. 종부의 말씀에 의하면 과거에도 평대문이었다고 한다. 집의 규모가 수십 칸에 이르고 문묘에 배향된 사계 김장생의 후손인 집안에서 대문을 평대문으로 하였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내노라하는 양반집에서는 집안의 권위를 내보이기 위하여 억지로라도 솟을대문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대문으로 하였다는 것은 학자집안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채와 사랑마당
사랑채(은농재)
은농재의 옛모습(문화재청 자료)
1992년에 복원된 문간채 양쪽 모두 방이 늘어서 있는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대개의 경우 문간채는 집사가 기거하는 방 한, 두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광이나 헛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방이 많은 경우는 식객이 끊이지 않은 부자집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종부의 말로는 옛날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들이 이곳에서 머물다 가곤 했고 증조할아버지 때는 서당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이 된 듯하다.
사랑마당은 매우 넓었다. 이러한 규모의 사랑마당을 보기가 쉽지는 않다. 사랑마당이 워낙 넓다보니 오히려 4칸의 사랑채가 초라해 보인다. 사랑채는 높은 기단에 올려져 있어 매우 권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옛 사진을 보면 기단이 2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앞에는 낮은 교목이 심어져 있어 그렇게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최근 보수하면서 이러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 같은데 평대문을 갖춘 집안이 갖추어야할 모습은 아닌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사랑채 인 은농재 뿐이다. 대부분의 경우 집 전체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반면에 이 집에서는 바로 사랑채만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사랑채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집의 다른 곳은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채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초가였다고 한다. 언제 기와를 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재청 사진을 확인하여 보면 예전 사진의 기와도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인다. 따라서 이미 오래 전에 기와 지붕으로 교체되었던 것 같다. 사랑채의 구조는 3칸이 방이고 우측 한 칸이 다락과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으로 되어 있는 3칸 모두가 온돌로 되어 있는 것이 다른 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곳만의 특징이다. 사랑채에 대청 한 칸도 없이 모두 온돌로 되어 있는 경우는 없었다. 이러한 큰 규모의 집에서는 아마도 이 은농재가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안채 (안방이 있는 곳)
안사랑채와 중문
대 청
사랑채를 좌측을 돌아 중문을 지나면 안채이다. 안채 구조는 튼 ㅁ자로서 다른 집과는 구성방식이 다르다. 대부분의 경우 안채가 ㄱ자 형태 또는 ㄷ자 형태를 취하고 광채 또는 사랑채와 함께 ㅁ자 또는 튼 ㅁ자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ㄱ자 형태의 안채와 ㄷ자 형태의 안사랑채가 결합하여 튼 ㅁ자 형태를 이룬다. ㄷ자 형태의 안사랑채 앞쪽부분이 중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장독대와 사당이 있는 뒷마당으로는 안채와 안사랑채의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집은 안방이 들어가는 쪽에서 보았을 때 우측에 배치되어 있다. 대부분의 집이 들어서면 안방이 좌측에 배치되어 있으나 이 집은 우측에 배치되어있다. 대부분의 집에서 안채가 좌측에 있는 것은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보인다. 남향으로 배치된 집을 기준으로 정침의 동쪽에 사당을 배치하라는 주자가례에 따라 사당을 배치하고 나면 부엌과 더불어 여성공간의 중심이 되는 안방은 사당 반대쪽으로 배치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안방 및 부엌 공간이 사람의 출입이 많기 때문에 안방을 사당과 같은 쪽으로 배치한다면 사당 앞이 번잡해져 엄숙한 분위기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은농재에서는 사당을 주자가례에 의하여 우측에 배치하였지만 안방도 같은 위치에 배치하였다. 이러한 안채의 배치는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가끔 볼 수 있다. 이러한 배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마도 기능적인 문제를 더 우선하지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제사를 지낼 때 음식준비가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운반이 번거럽다 보니 사당과 근접한 곳에 부엌을 배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 당
이 집의 사당의 구조는 독특하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자그마한 사당으로서 일반 사당과는 달리 바닥이 지상에서 떠있는 마루구조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당은 바닥이 흙이거나 전으로 깔려 있고 마루구조라고 해도 대부분 벽체가 땅까지 내려와 있어 일반 집과 같은 구조이지만 이 사당은 마루하부가 들어올려져 있어 마치 누각처럼 느껴진다. 또한 기둥을 받치는 초석도 기둥과 같이 원형으로 되어 있고 화려한 단청을 올려 규모는 작지만 매우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지어진 시기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관심을 끄는 사당이다.
이 집에서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별채이다. 담밖에 별도로 지어져 있는 별채는 종부의 말로는 신접살림을 위한 집이라고 한다. 갓 시집온 새 며느리는 얼마간 별채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자신도 그렇게 하였고 시할머니도 그렇게 생활하였다는 것을 보면 별채는 꽤 오래 전부터 신접살림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별채의 활용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러한 관습이 얼마나 오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집에 적응하는 기간 동안 반 독립생활을 하였다는 것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시할머니 때도 그렇게 사용하였다고 하니 시할머니가 시집올 당시의 개념으로서도 매우 파격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생활방식이다. 서로 다른 생활환경 속에 살아온 새 식구에게 가문에 적응하면서도 신접살림의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배려한 광산 김씨 가문의 지혜가 엿보이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별채와 봄 풍경(문화재청자료)
이 집의 대지는 3000여 평으로 별채 쪽은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 놓았다 지금은 많이 변형되었지만 방형의 연못이 남아 있고 철쭉과 같은 봄꽃을 많이 심어놓아 초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지금도 봄이 되면 유치원에서 소풍을 오는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잘 관리되고 있지 못해 조금 어수선하고, 정원에서 내다보이는 곳에 짓다가 중단되어 흉물스럽게 방치된 아파트가 남아 있어 분위기가 잘 살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좋은 경관을 가진 아주 아름다운 정원이었을 것이다. 봄에 찍은 두계 고택의 사진을 보면 철쭉이 만발하여 주변을 붉게 물들여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어 술 한잔의 흥취가 절로 날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집은 그간 많이 개조되어 있었다. 심하게 말해 무늬만 한옥이라고 할만큼 외부를 제외한 내부는 완전히 개조되어 있어 원래의 구조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개조는 변화되는 생활에 맞추어가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원형을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이 집을 종중宗中의 박물관으로 만들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계획이 있다고 한다. 서두른다면 연로하시지만 종손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찾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하루 빨리 복원사업이 이루어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를 바란다.
현재 이 집 앞에는 대단위 아파트의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너무 가까워서 은농재를 위압할 뿐만 아니라 은농재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가리고 있다. 이 대지도 얼마 전 현 종손이 매도한 것이라고 한다. 종부도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팔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된 것을 어찌할 것인가. 이렇게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면서 문화재환경을 훼손하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본다.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 나는 문화재 주변에 새로 지어지는 건물을 심사할 때 단순히 물리적인 환경만을 검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문화재환경을 보전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법을 더 강화해서라도 문화재의 경관을 훼손하는 행위를 더 이상 방치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재환경의 개념을 확대하여 문화재 주변환경에까지 보전의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추신 :
종부의 말씀으로는 현재 복원된 부엌의 뒤쪽의 건물은 잘못 복원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찬광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주변에도 많은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시집올 85년도 만해도 이곳의 분위기는 대전과도 사뭇 달랐다고 한다. 이곳은 예전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자신이 시집올 당시에도 집안에 6-7명의 하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사람이 떠나 자신의 큰애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는 하인이 한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시집와서 자신이 손수 장을 보러 가는 모습을 보고 시할머니가 "과거에는 아랫것들이 하던 일을 손주며느리가 직접한다."고 하면서 회한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현재의 은농재 전체는 최근 새로이 개수되었다. 대충 보아도 부재의 7-80%가 교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고친 부분에서는 과거의 느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다음에 복원사업을 할 때는 기법에도 관심을 가져서 보다 옛것에 가까운 모습으로 고쳐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