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예산 이광임선생고택
이광임선생고택 (충남유형문화재 83호)
이남규선생고택에서 저수지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길옆에 이광임고택이 있다. 이문원선생의 말로는 12대 조상에서 갈려진 같은 문중이라고 한다. 이광임선생고택은 1870년(순조 25년) 이산해선생의 9대 손인 이광임이 건립하였고 사랑채는 그의 아들인 이승우가 증축한 것이라고 한다. 이광임선생고택은 좌측에 방산저수지를 끼고 있고 앞의 천방산을 바라보며 동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광임고택의 배치는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의 우측이 돌출되어 안채는 ㄱ자의 형태를 보인다. 돌출된 부분은 3칸으로서 두 칸은 부엌이고 한 칸은 안방의 일부이다. 그리고 좌측에 중문이 배치되어 있어 전체로는 튼 ㅁ자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건물이 옆으로 길게 배치되어 상대적으로 상당한 규모의 집으로 느껴진다. 사랑채는 7칸 반으로 규모로 길게 배치되었으며 안채 역시 7칸 집(측면 2칸)이 길게 늘어져 있어 안채의 마당은 매우 넓고 시원하게 느껴진다.
사랑채 전경
집은 거의 동향에 가깝게 배치되어있는데 이것은 남동향 또는 남향으로 배치할 경우 집이 앞산에 가려 전망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앞산을 안산으로 바라보면서도 북동쪽의 시원한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배치되었다. 이러한 배치 의도는 사랑채의 우측 끝에 누다락을 설치함으로서 더욱 명확하게 보여진다. 사랑채는 전후퇴집으로 방의 배치가 좌측으로부터 한칸반의 규모의 온돌방 한 칸, 대청 두 칸, 온돌방 두 칸, 누마루 한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남규선생댁과 같다.
안채의 평면 형식도 매우 흥미롭다. 중문에서 가장 떨어져 있는 곳에 안방이 자리잡고 그 앞에 부엌 두 칸이 자리잡았다. 안방은 두 칸 규모인데 한 칸은 몸체에서 돌출되어 있어 안채를 출입하는 사람을 잘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중문에 인접한 안채 좌측 3칸은 공공성을 가지는 실로 구성되어 있어 다른 곳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채 안에 객실이 들어와 있는 것이 특이하다. 조선말 내외의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던 시절 객방이 안채에 들어와 있는 것은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기교수는 "내·외법구분이 모호해지는 배치구조"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객방이 된 것은 일제시대일 수도 있다. 과거에는 다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내외의 문제가 완화된 1900년 이후 객방으로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 설사 객방이라고 해도 다른 집안사람이 들어와 잔 것이 아닌 집안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한다.
중문의 모습
안채에서 또 하나 살펴볼 부분은 객방과 광 사이에 있는 제실이다. 제실이 안채에 붙어 있는 경우 대부분 대청에 벽감을 만들어 위패를 모시거나 대청에 인접한 방을 제실로 사용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데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방 한 칸을 제실로 쓰고 앞에 의례를 위한 조그마한 마루 한 칸을 설치하였다. 구조로 보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만 조그마한 마루에 오르고 다른 사람들은 마당에서 대기하는 방식으로 하였을 것이다.
이 집과 이광임선생의 고택은 여러모로 닮았다. 수준은 이남규선생댁이 훨씬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데 기법상으로는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건축시점을 보면 이남규선생댁이 1846년에 지어졌고 이 집은 1870년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집을 지을 때 이남규선생집을 많이 참고 한 것 같다. 사랑채의 방의 구성이 비슷하고 안채 건넌방 쪽으로 따로 제실을 만든 것이라든지 안채의 구조기법도 이남규선생의 집과 비슷하다. 단지 목재가 튼실하지 못하고 목수의 솜씨가 조금 떨어지는 감이 있다. 우선 목재가 튼실하지 못한 것은 조선말로 갈수록 목재수급사정이 나빠지는데 몇 십 년 차이에서도 좋은 목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둥상부를 띠 쇠로 보강하는 방법이 같은 것 등 목구조를 구성하는 방식도 비슷한 것이 이남규선생댁을 지은 목수의 제자뻘 되는 사람이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문에서 본 안채 전경
부엌 쪽에서 본 안채
한국의 건축문화재에 있는 평면도를 보면 사랑채 외부의 배치가 현재와 다르다. 도면을 보면 사랑채에 이르려면 4단 이상을 오르도록 되어있다. 즉 사랑채가 주변보다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지형을 기반으로 과거의 모습을 추정해보면 사랑채 앞에 그런대로 널찍한 마당이 있었고 그 밑으로 건너편 동산과 사이에 얕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평면도 상으로 보면 이 집도 이남규선생댁처럼 대문간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새로 도로를 만들면서 계곡을 메꿔 과거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주변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켜버렸다.
지금은 사랑채 기단이 한 단만 남아있어 권위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집이 아담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예전 이 집을 오르려면 상당한 위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예전에는 집이 사방을 굽어보는 모습으로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저수지도 있고 도로도 높아져 예전의 기분이 나지 않지만 예전에 이곳을 들어오려면 멀리서부터 높은 곳에 있는 집을 바라보면서 들어왔을 것이다. 또한 집이 주변 풍광도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굽어보는 풍광은 지금보다 더 장대하였을 것이다.
대청에서 바라본 사랑채
또한 입면도를 보면 중문간이 초가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초가였는지 또는 기와였던 것이 후대에 초가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던 것 같다. 복원할 때 이 문제에 대하여 깊게 논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가로 복원하여도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행랑채가 초가로 되어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중요하지 않은 건물에 치장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다고 한다면 무조건 기와집으로 복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광임선생 댁과 이남규선생댁의 앞에는 각각 정려각이 있다. 이남규선생댁 앞에는 孝婦成均進士李尙賓妻申氏之門이라는 효부정려가 보호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광임선생댁에도 광무 팔년(1904년)에 하사된 정려가 있다. 정려에는 孝子贈後仕中學校官李承瑜之門 光武八年八月日 命旌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남규선생댁의 정려는 검은 바탕에 하얀글씨로 되어있고 이광임선생댁의 정려는 붉은 바탕에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이광임선생댁의 정려는 국가가 하사한 것이고 이남규선생댁의 것은 국가가 하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정려가 각각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안이 대대로 효를 중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