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생가(明成皇后 生家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46호)
명성황후는 최근에 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많아진 것은 "명성황후"라는 국내창작오페라의 성공과 TV에서 방영한 "명성황후"라는 드라마가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명성황후가 과연 어떠한 생을 살았고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그 평가의 문제는 사학자의 몫이고 내가 관심이 있는 건축과는 그리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생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명성황후의 생가"라는 것보다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 집만의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지어진 이유부터가 전혀 다르다. 모든 집은 계속해서 살아갈 목적으로 지어진다. 그러나 명성황후 생가는 처음에는 시묘살이를 하기 위한 여막廬幕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잘 지어진 기와집이 여막이라고 하니, 조그마한 초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것으로 생각해왔던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한다. 옛날의 시묘살이는 지금의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일상의 생활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손님도 맞이하고, 농사일도 관리하고, 먼 곳이 아니면 조문과 같은 경우 외출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약간의 음주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묘살이동안 거처하는 묘막에도 온돌이 설치되었고 시종이 같이 동행하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시묘살이를 하는 사람은 한 집안을 이끌어 가는 가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집안일에 대하여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수년간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곳 생계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계와 관련된 것은 돌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생활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면 시묘살이에 대한 오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해도 집의 규모가 여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다. 신영훈 선생은 이것을 여막이라기보다는 시봉청侍奉廳으로 해석해야한다고 하였다. 여막이든 시봉청이든 과거에는 집안의 형편에 따라 여막의 규모도 달랐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민유중(1630/인조 8-1687/숙종 13)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이러한 집안의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이다. 여막 뒤편 나지막한 동산 위에 있는 묘와 신도비를 보아도 그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인은 영의정을 지냈더라고 해도 묘에 호석을 둘려 있는 경우는 없다. 이 묘에는 호석이 둘려있고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의 글이 숙종의 친필인 것만을 보아도 그 집안의 위세를 알만하다. 그러한 집안의 묘막이 거적때기로 가려진 집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집안의 위세에 걸맞게 묘막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성황후 생가는 최근에 주변 정비사업을 하면서 복원된 것이다. 여흥 민씨집안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을 군에서 매입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1976년 안채를 중수하고 1995년에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중건하고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과거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나머지 건물들은 최근에 신축한 것이다.
6년전 이곳을 찾았을 때 관리인의 이야기로는 50년 전까지도 밖의 행랑채까지 완형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가세가 기울어 집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지자 집주인이 조금씩 헐어 화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행랑채와 사랑채가 사라졌다고 한다. 어쨌든 복원된 집과 원래의 집은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 안내문에는 "비가 서있는 곳까지 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지금의 복원도 과거의 모습이 정확하게 복원된 것은 아닐 것이다. 안채에서 본 사랑채(사랑채너머 행랑채가 보임) 원래의 모습대로 집이 복원되었을까 하는 문제는 사랑채와 안채사이가 서로 너무 개방적이라는 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집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이렇게 개방적 구조를 가진 예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복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개방형 구조로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쨌든 건물의 가치로만 바라본다면 어쩌면 그리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이란 것이 왜 지어져서 어떻게 변화되어갔는가 살펴본다는 것에 의의를 가진다면 한번쯤은 찾아볼 가치가 있는 집이다.
여막의 용도로 지어졌기 때문에 집의 규모가 크지 않다. 안채의 대청도 그리 높게 만들지 않아 권위적인 풍취를 찾기 힘든다.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자제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어쨌든 여막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려 하였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집은 민유중이 돌아가신 직후 또는 돌아가실 때를 즈음하여 지었을 것이다. 대략 민유중이 돌아가신 1687년 전후로 지어졌을 것이다. 꽤 오래된 집이다. 이 집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창문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양여닫이창문 가운데 문을 닫기 위한 수직부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것이 옛날 방식이다. 이러한 점이 집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집이 집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때는 바로 사람이 살고 있을 때이다. 마치 보기 위한 모형처럼 잘 다듬어진 집을 볼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기 위해 찾아가는가?" 하는 회의가 든다. 이 집을 찾아온 대부분의 관광객이 단체 관람객이었다. 그 중에서는 한류의 열풍을 타고 찾아온 대만관광객도 있었다. 요사이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가면서 부쩍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예전 이곳을 찾아왔을 때만해도 집에 들어가기 위하여 관리인을 찾아 문을 열고 서야 들어갈 정도였으니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 실감한다.
그러나 이제 "명성황후생가"는 집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고 말았다. 너무 깨끗해진 환경과 포장된 도로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살던 집들이 사라지고 나니 박제화된 허상만이 남았다. 건물 안에 남겨진 인형들 그리고 영어번역기에서 나오는 생경한 소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집이란 사람이 숨쉬고 생활하는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을 느끼지 못한다면 제대로 집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집을 보존한다는 명제를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깨끗함이 아니라 생활이 담겨있는 보전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돌아가신 분의 행적을 기록해놓은 비석으로서 한(漢)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시작되어 종2품 이상의 품계를 받았던 사람에 한하여 세웠던 것이다. 민유중이 사망한 뒤 30년이 지난 1707년에 만들어진 이 신도비는 현재는 민유중의 무덤과 함께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어 있어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매우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신도비이다. 뛰어난 솜씨라는 것이 단순히 조각의 솜씨가 좋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신도비에는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힘이 있다. 거북 형상의 귀부가 갖추어져 있는 신도비는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 많이 만들어졌던 부도비에 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부도비나 신도비는 고려말부터 간략화되어 형식적으로 변화하고 힘도 약해진다.
그러나 이 신도비는 매우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머리가 민유중의 무덤을 향하고 있는 거북을 보면 지금이라도 달려갈 것 같은 힘을 느끼게 한다. 비신 위에 올려져있는 이수하부에는 용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전 시대를 통해서도 보기 힘든 양식이다. 어쨌든 이 신도비는 보물 제 584호로 지정된 구례의 윤문효공신도비나 보물 제 1395호로 지정된 도갑사 도선·수미비에 비하여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왜 이 신도비가 국가지정문화재로 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