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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지누의 절터 톺아보기 /선림원터

깜보입니다 2007. 10. 11. 16:14
화엄과 禪을 함께 머금고…그래서 진정 아름다운 곳


선림원터(禪林園址)로 가는 길, 곧추 선 산들은 겨우 길 하나만 열어 놓았을 뿐 눈꼽재기창 만큼 인색하게 하늘을 보여 줄 뿐이었다. 그 창으로 바람이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몸이 날아 갈 듯 휘몰아치다가 엇모리나 엇중모리로 띄엄띄엄 다가드는 바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율려(律呂)이기도 했다. 그는 소나무 숲을 지날 때와 마른가지만 남은 숲을 지날 때 서로 다른 소리를 냈으며 바위에 부딪히면 소리도 없이 스러질 뿐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잠시 바람이 자는가 싶으면 새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콩새며 박새 그리고 쑥새들이 무리를 지어 나뭇가지를 옮아 다니거나 낙엽을 뒤지며 재잘거리는 곁으로는 미처 얼어붙지 못한 계곡의 물소리가 볶는타령으로 지나가곤 했으니 미천골의 새벽은 자연의 소리로 가득 차 더 없이 아름다웠다.

영하 17도의 그늘을 덮어 쓴 절터, 발에 밟히는 풀마저 얼어붙은 듯 습기란 습기는 모두 서걱거렸으며 금당터의 주춧돌에 손을 대면 면도칼에 손을 베일 때의 섬뜩한 느낌이 전해왔다. 두어 시간, 바람도 피하지 않은 채 마냥 서성댔다. 이윽고 높은 산을 넘어 햇살이 찾아 들자 마른 숲이 머금은 냉랭함은 사라지고 밤새 솟구친 서리는 윤슬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피안을 바라보듯 반짝이는 그곳을 그윽한 눈길로 보고 있었다. 그는 돋보였지만 그가 돋보이는 것은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돋보이는 것은 정작 그늘 때문이지 싶었다. 바람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선 굵은 콘트라베이스나 비올라 소리처럼 둔중한 울림으로 몰아쳤다. 그 탓에 절터는 어수선한 듯 했지만 바람의 틈바구니에 고즈넉함이 숨어 있었다. 한차례 바람이 지나가면 그제야 움을 틔우는 고즈넉함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햇살과 그늘, 어수선함과 고즈넉함은 서로가 돋보이려 애를 쓰지 않았다. 그저 엄벙덤벙 마구 어울려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결코 가지런하지 않았으며 들쑥날쑥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소박(素樸)이었다. 노자(老子)가 이야기 한 소박은 모든 꾸밈이 제거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생겨나지 않은 본디의 자연을 일컫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는 그들에게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기에 부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자연을 만나러 가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절집이나 절터로 가는 길에 오로지 부처만 만나려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오히려 그를 만나기 위해 자연을 먼저 만나야 한다.

대뜸 경전 몇 줄 외운다고 또 그 앞에서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한다고 그가 만나지는 것은 아닐 터 부처를 만나려면 자연을 거쳐야 하는 것은 그에게로 가는 문 아닌 문과도 같은 것이다. 자연 속에 부처가 있는 법이고 부처는 자연을 머금고 있으니까 말이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한겨울임에도 선림원터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다. 선화(禪花)다. 나는 겨울이면 언제나 그 꽃이 그리웠다. 쨍하도록 코끝이 시린 날이면 선림원터로 찾아 들어 잔뜩 웅크린 채 그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뜸 그 꽃이 피는 시간에 맞춰서 가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새벽부터 절터를 서성이며 그를 기다렸다. 그늘에서 양지로 다시 꽃이 피어나기까지 혹독한 바람의 시간을 견디다가 이윽고 그를 만나는 것은 숭고한 기다림이 시간이었다.

절터에 앉으면 산은 눈앞을 가팔막지게 막아서고 비탈에 매달리듯 나무들은 뿌리를 내렸다. 그 산 마루로 힘겹게 올라선 햇살이 그늘진 숲으로 내려 꽂히자 나뭇가지는 하나씩 꽃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꽃잎도 없는 꽃, 가지로부터 둥치에게로 또 나무 전체가 환하게 꽃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닫집처럼 선림원터를 장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만하면 금당에 모셨던 부처도 흐뭇하게 미소 지었을 것이며 이곳에서 선정에 들었던 그 많은 선객들도 때 맞춰 손을 놓고 바라보았으리라.


선 화

햇살이 그늘진 숲에

내려 꽂히자

나뭇가지는 눈부신 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겨울에 피는 선의 꽃.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다. 한 눈 팔다 돌아보면 꽃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늘 밖에 없었다. 지나 간 것이다.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둑시근한 그늘만 남았고 숲은 우울해 보였다. 빛이 없는 그늘은 힘이 약하고 그늘을 지니지 못한 빛은 허망하다. 빛의 아름다움은 그늘이 만들어 주는 법이고 그늘은 빛으로 인해 더욱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니까 말이다. 자연은 어느 하나가 주연이거나 조연인 법은 없다. 그들은 모두가 주연이거나 혹은 조연들이다. 모래알이거나 혹은 집채만 한 바위일지라도, 한 포기 풀이거나 천년 묵은 고목이거나 간에 그들의 가치는 서로 다르지 않다. 자연 속에서는 어느 것 하나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모두에게 빛나는 아름다운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을 조감(鳥瞰)하느냐 관견(管見)하느냐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빛과 나무의 환희에 찬 유희를 만나러 선림원터에 올 때 마다 들고 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낭혜 무염선사(無染禪師)의 말 한마디이다. 보령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최치원이 글을 지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郞慧和尙白月光塔碑)’에 따르면 낭혜는 제자들에게 늘 말했다고 한다.

… 교종과 선종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

무염선사의 이 말 한마디는 몹시 큰 것이지 싶다. 그는 교와 선을 서로 반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직렬로 두지 않고 병렬했기 때문이다. 선교쌍수인 것이다. 한국전쟁 통에 화재로 녹아내린 선림원의 종은 40대 애장왕 5년인 804년에 만들어졌다. 그 종을 만드는데 상화상(上和尙)으로 참여한 순응(順應)은 802년에 해인사를 세우기 시작했던 인물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일컫는 것이며 선의 숲이라는 선림(禪林)은 그 이름만으로도 서로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가. 그러나 최치원이 쓴 해인사의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에 따르면 순응은 36대 혜공왕 2년인 766년에 당나라로 가서 교리를 깊이 연구하고 또 선을 공부하고 왔다고 한다.

… 조사인 순응대덕은 신림(神琳)대사에게 공부하였고 대력 초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쪽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승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가서 도를 얻었다. 교리를 철저히 연구하고 선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으며 나라로 돌아와서는 영광스럽게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화엄의 숲 속에 선이 꽃으로 피어 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제는 그동안 내가 가졌던 교와 선은 서로 같지 않다는 지독한 편견을 버릴 때가 된 것 같다. 조금 전, 눈앞에서 황홀한 유희를 베풀던 빛과 나무들도 그랬다. 그늘이 없으면 결코 햇살을 받은 나뭇가지가 꽃처럼 아름다울 수 없었을 것이며 빛이 없었다면 그늘은 그저 덤덤하게 모든 것을 덮어 버리고 말았을 것 아닌가.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연이었으며 그림자의 두께와 그늘의 농담 그리고 빛의 강약이 그 모든 것들의 깊이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교와 선 또한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들은 서로에게 깊이와 넓이를 주는 관계일 뿐 서로 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부처를 만나는데 화엄은 무엇이고 선은 또 무엇일까. 선림원터가 진정 아름다운 까닭은 그 둘을 모두 머금었기 때문이다. 선만이 그곳에서 꽃피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은 대롱으로 보는 것이리라. 그 탓에 찾는 이 드문 선림원터를 다녀오면 내 생각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 같은 즐거움이 있다. 생각이 넓어지면 바라보는 눈 또한 깊어질 터,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아마도 49대 헌강왕 6년인 873년에 이곳을 다시 일구어 절집을 크게 일으킨 홍각선사(弘覺禪師) 탓일지도 모른다. 김원(金)이 글을 지었던 홍각선사의 탑비는 이제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았지만 비문에 그를 두고 “법의 바다를 건너게 해 주는 나루터이자 다리(法海津梁)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다리가 아직 선림원터 어딘가에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을 인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선림원터/

염거화상.보조선사 머무르며

교와 선이 오가던 곳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터는 화엄과 선종이 만나는 곳이다. 804년, 교와 선을 오갔던 순응화상이 종을 만드는데 참여했는가하면 우리나라 선종의 조종(祖宗)이라 불리는 도의선사의 선법을 이어받은 염거화상이나 보조선사 체징 그리고 873년에 절집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홍각선사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로 미루어 초기 선종이 화엄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짐작 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절터에는 3층 석탑과 석등 그리고 홍각선사의 부도라 짐작되는 부도탑의 대좌가 남아 있으며 홍각선사의 탑비 중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3층 탑 뒤로는 금당터가 석등 앞에는 조사당터의 주춧돌이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홍각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부도탑의 운룡문은 빼어나다. 나라 안에서 드물게 보는 것이기도 하려니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부도탑과 여주의 고달사터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을 포함한 부도탑 2기가 중대석을 운룡문으로 장엄한 것이 서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로 미루어보면 홍각은 혜목산문(惠目山門), 곧 봉림산문(鳳林山門)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 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여주의 고달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조선사 체징과의 관계를 보면 그는 가지산문에 속하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체징은 도의선사에게서 이어지는 염거화상이 세운 억성사인 이곳 선림원에서 선정에 들었으며 47대 헌안왕 4년인 860년 장흥에 보림사를 세우며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었던 인물이다. 홍각은 이미 체징이 가지산문을 세운 10여년 후에 선림원으로 들어 와 금당과 불전을 이루었으니 그들이 직접 만난 적은 없을 테지만 이어지는 선법을 끊지는 못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절터는 아래로는 축대를 쌓고 위로는 비탈진 경사면을 깎아 만들었다. 또 법계를 중시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선종사찰에 어김없이 지어졌던 영당 혹은 조사당터가 석등 앞에 남아 있어 선종사찰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모습이다. 양양의 진전사터와 산청의 단속사터와 마찬가지로 초기 선종사찰들이 모두 경주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깊은 산 속으로 들어 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기득권을 지닌 화엄의 배척 때문이었다. 선림원터가 미천골 깊은 곳에 자리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지누/ 前 ‘디새집’ 편집장



[불교신문 2109호/ 3월4일자]


* ‘톱다’는 샅샅이 뒤지며 찾는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
출처 : 불교 인드라망
글쓴이 : 해바라기(心印道)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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