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동아시아에서 한국 문화의 새로운 위상- | ||||||||||||||||
1.한류는 흘러가고 있는데... 한류(韓流)는 오늘의 한국 문화를 논하는데 가장 중요한 화두로 되어 있다. 20세기 말, 중국과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타이완, 싱가폴 등 동남아 각국에서 한국의 TV드라마, 영화, 대중음악, 게임 등이 일으킨 한류의 흐름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 인도, 중동, 이집트, 멕시코 등지로 퍼져가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미국과 유럽에 까지 확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한류는 뜻밖의 성과이다. 역사상 우리는 중국과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는데 우리가 만든 문화가 남의 나라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이 사실이 처음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한류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한국인들은 “가슴 뿌듯한 쾌거”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의아스러움이 떨쳐지지 않아 이것은 필시 ‘일시적인 풍조’일 것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류는 쉬지 않고 더 큰 물결을 이루며 멀리 멀리 흘러가고 있다. 이제는 이 한류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고 확산시키는 일이 당면한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관광부에서는 2003년에 대중가요의 국제교류를 위해 설립한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을 한류 전담 재단으로 기능을 확대시켰고, 2005년 4월에는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한류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에 관한 공청회> 까지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류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는 쉬운 과제가 아니다. 한류에 관한 공청회의 제목에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라는 표제가 붙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류에 대한 해석의 다양함과 복잡함은 대개 두 가지 요인에서 나온다. 첫째로 한류란 우리에 의해 ‘기획된 흐름’이 아니라 수용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의해 일어난 국제적인 문화 반응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한류가 왜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들이 한류속에서 어떤 점을 좋아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과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류의 성격은 수용자의 측면에서 살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로 한류라는 것을 거창하게 말하자면 한국이 늘 ‘문화 수신국’ 내지 ‘문화 수입국’ 이었는데 바야흐로 ‘문화 발신국’ 내지 ‘문화 수출국’으로 그 위치가 바뀐 현상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역사상 문화의 중심부에서 남에게 영향을 끼쳐본 역사적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류를 받아들이고 있는 문명수입국에게 문명수출국의 입장에서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서툴고 미숙할 수밖에 없어 나오는 고민이다. 한류라는 현상을 문화산업의 수출이라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이는 큰 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한류는 드라마, 게임, 음반 시장의 수출이라는 눈앞의 경제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한류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명석한 분석과 현명한 대처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문명의 수신국에서 문명의 발신국으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면 그에 따른 임무가 따로 있을 법이니 그것이 무엇이고 그에 따른 어떤 조치가 뒤따라야 하는지를 면밀히 세워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2.세계사의 문화권적 이해 한류를 논하면서 “한국은 세계(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해본 역사적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듯 말한 것에 대해 혹자는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발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류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에 당황스러움 내지 막막함이 생긴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에서 세계사적 시각이 은연중에 결여되어 왔던 점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아주 모순된 두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나는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히 높아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해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는 역사적으로 남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항시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는 열등의식이다. 이 열등의식을 해소하기 위하여 흔히 나타내는 반응은 “일본은 우리의 영향을 받고 살아왔다”며 고대 한일관계를 강조하는 모습과 고구려와 고조선을 과도하게 부풀려 해석하는 폐쇄적 국수주의의 태도이다. 한국인의 역사인식과 의식구조에는 이처럼 ‘고도한’ 문화적 자긍심과 ‘불필요한’ 열등 의식이 공존하고 있는데 나는 이 모순된 인식을 교정하지 않는 한 한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대처 방안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세계사적 지평으로 넓힐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사에 대한 이해와 서술은 한국사 자체에만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사의 정체성은 오히려 동아시아 역사의 틀에서 바라볼 때 더욱 명확해 진다. 독일의 미술사가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이라는 저서에서 한 문화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는 문화권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사실상 19세기 이전까지의 세계사적 시각이란 문화권적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며 한국의 역사는 바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었다. 동아시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개는 중국, 한국, 타이완, 일본, 그리고 베트남, 즉 한자 문화권을 상정하고 있다. 다시 한번 빌헬름 보링거의 견해를 빌리면 각 문화권에는 중심부 문화와 주변부 문화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중심부 문화만이 위대하고 주변부 문화는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르네상스 전개 과정에서 독일과 네덜란드의 르네상스가 주변부 문화라고 해서 낮게 평가되는 일이 없으며 그들이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되는 일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펴져나감으로 인하여 유럽 문화권의 르네상스는 보다 풍부한 내용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나 한국이 동아시아의 주변부 문화 성격을 지녔다는 점은 이런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은 근 2천년 동안 중국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중국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한(漢)족에 의한 제국을 경영하면서 주변의 민족들과 어떤 식으로든 외교, 국방 관계를 맺었다. 그것이 이른바 중화(中華)와 4이(四夷)를 분리하는 화이(華夷)정책이다. 화이정책이란 쉽게 비유해 말해서 중화는 거대한 ‘재벌화’를 꾀하면서 주변의 민족들은 ‘구멍가게’식으로 왜소화. 야만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이 정책은 어느 정도 들어맞아 역사상 존재했던 많은 민족들이 해체되고 오늘날 중국은 90%의 한족과 10%의 55개 소수민족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변방의 이민족 중 흉노와 한국과 베트남만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시황은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무제는 한국과 베트남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강행하여, BC 108년에 한국의 북부에는 한사군(漢四郡)을, BC 111년에 베트남의 북부에는 한구군(漢九郡)을 설치하였다. 한국의 한사군은 400년 뒤 고구려의 힘에 밀려 철수되고, 베트남의 한구군은 약 1천년간 지속한 뒤 철수하였다. 이후 중국은 한국과 베트남에 식민지를 시도한 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항시 경계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수나라는 한국의 고구려가 강성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 국력을 다하여 수양제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 왔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약 400만 정도였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두 차례 침공을 물리쳤고, 수나라는 그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선 나라가 망할지언정 고구려의 강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성장을 막으려는 중국의 의지는 결국 당태종에 의해 실현된다. 이와 같이 중국 입장에서 한국과 베트남이 얼마나 신경을 쓰이는 존재였는가는 668년 평양에 안동(安東) 도호부를 두었을 때 같은 해 베트남 하노이(河內)에는 안남(安南)도호부를 두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동쪽과 남쪽의 안정이 그들로서는 국방상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중국은 한국과 베트남에 대해서는 국방 정책을 외교적 전략으로 바꾸어 중국의 정치 외교적 종주권을 인정하는 한 그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이른바 조공(朝貢)제도를 강화하였다. 일본의 경우는 바다 멀리 위치해 있음으로 해서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이로움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공제를 유지하였고 일본은 견당사(遣唐使) 등의 이름으로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한국, 베트남, 일본 등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라이샤와가 <동양문화사>에서 한국과 베트남을 “중국 모델형 국가”라고 규정한 것은 이런 배경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 중국의 한족 왕조는 한국을 지배할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민족인 몽고족이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침입해 왔지만 고려는 27년간 완강히 저항하여 원나라로 하여금 고려를 예외적으로 사위나라(부마국)로 삼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원나라의 사위나라로 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대원제국의 사위나라로 대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베트남은 바다에서 몽고군을 물리쳤고, 일본은 태풍 덕분에 전란을 면했다. 병자호란 때 한국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인 청나라에 굴복하는 수모를 받게 된다. 사실 이 때도 청나라 황토시(청태종)는 인조의 항복을 받으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해체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조선의 저항만 불러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다시는 명나라 편에 서지 않는다는 약속과 그에 대한 볼모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중국이 한국에 대하여 보여준 민족적 독립성은 사실상 우리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조선족, 안남족, 몽고족 만이 모국을 갖고 있는 민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중국에 흡수되어 티베트나 위글처럼 중국문화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동아시아 역사속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그 결과는 한국을 위해서도 동아시아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라이샤워는 <동양문화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국은 비록 중국 때문에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통 크기의 나라이며. 인구는 보통 나라보다 더 많다. 어떤 이는 한국이 미국의 일개 주인 미네소타보다 조금 더 클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왜소함을 강조하지만, 한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즈를 합친 것보다 별로 작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 이 말은 역사적으로 볼 때 더욱 합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3.한국문화의 정체성-고려청자의 예를 통하여 한 문화권의 문화적 전파는 흔히 중심부 문화가 주변부 문화에로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물흐르듯이 흘러들어가는 것으로 말한다, 이것이 언필칭 문화전파론이다. 그러나 한 문화권의 문화가 전개된 실상을 보면 일방적 내지 의도적 전파가 아니라 주변부 문화의 적극적 수용이라는 면이 더 강하다. 독일의 르네상스에서 알브레히트 뒤러가 보여준 노력 없이 그것이 가능했겠는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한류 역시 하나의 문화 전파인데 문화공급국인 우리가 의도적으로 기획한 것이 아니라 문화수신국의 적극적 수용에서 일어난 현상인 것과 같다.
세계 문화사에서 종교적 전파를 제외하고는 중심부에서 주변부에 선물을 주듯 전해준 예는 거의 없다. 그러니까 한국의 문화가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국인 중국의 문화 영향을 받으며 궤도를 같이했다는 사실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갱신을 통하여 중심부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명에 낙오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중국의 문명에 낙오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은 정말로 피눈물 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신라시대 도당(渡唐) 유학생들은 보통 20년, 30년을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인생을 바쳤다. 혜초 같은 이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시 <신라 땅 고국을 바라보며(망신라)>를 남겼다. 고려시대 문익점은 고국의 의류 혁명을 위하여 목화씨를 밀반출해 왔다. 도둑질을 해서라도 문명을 일으키려고 했던 그 뜨거운 조국애를 볼 수 있지 않은가, 중국에 가는 사신들은 그들에게 지적으로 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보다 풍부한 문사철(文史哲)의 지식을 쌓았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때로는 극성을 보이면서까지 그들의 문명을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송나라 소동파 같은 이는 “고려 사람들은 영리하여 쉽게 배워 가니 함부로 가르쳐주지 말라”는 중국인 스스로의 경계를 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어느 것 하나 문명국으로부터 이것을 사용하면 좋을 터이니 너희도 가져가 써보라고 내려준 문화의 전파는 없었다. 그것은 물질 문화에서는 더욱더 그러하였다. 그 하나의 예가 도자기이다.
도자기, 그중에서도 자기의 발명은 위대한 탄생이었다. 인간이 사용하는 밥그릇, 반찬접시 등 식용기에서 아직까지 자기보다 더 위생적이고, 사용하기 좋고, 보기 좋은 용기는 발명되지 않았다. 자기를 최초로 발명한 것은 중국이었다. 고월자(古越磁)라는 초기 청자가 만들어진 것은 대개 4세기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이보다 1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10세기로 들어서면 완벽한 비색(秘色)청자를 만들어내고 12세기 송나라 휘종황제 때는 그 절정에 달한다. 중국에서 고월자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비색청자를 생산하는 것을 보고 고려인들은 열심히 노력하여 11세기에는 높은 수준의 고려청자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세기 인종, 의종 때는 송나라가 자랑한는 여요(汝窯)와 맞먹는 최상의 청자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를 비색(비색)청자라 불렀다. 나아가 고려인들은 청자의 약점인 문양의 문제를 상감 기법으로 해결하여 상감청자의 길을 열었다. 그것이 우리가 자랑하는 상감청자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청자에서 그 문양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고려인들의 상감기법을 수용하지도 않고 청백자의 길로 들어가 버렸다.
고려 이외의 어느 나라도 중국의 청자를 본받아 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중국과 우리나라 이외의 나라에서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을 보면 베트남이 안남사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15세기, 일본은 조선 도공들이 아리타(有田)에서 백자를 만든 17세기이며, 유럽의 자기는 17세기 말 독일의 작센 공국에서 마이센 백자를 만들면서 자기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니까 10세기에서 15세기 까지 500년 간 세계 자기의 역사는 중국과 우리나라만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에 고려마저 청자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세계도자사는 매우 밋밋했을 뻔 했다. 한국 문화의 정체성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성 속에서 독자적인 성격의 특질을 보여 주고 있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당당한 지분율을 갖고 있는 문화적 주주 국가인 것이다. 그 지분율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을 액면가(양)로 계산할 것인가 아니면 실거래가(질)로 산출할 것인가는 별도의 문제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일본 등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로 발전시킨 것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내용을 살지게 한 것이었다. 똑같은 중세 시대의 불상 조각이라도 중국의 불상, 한국 불상, 일본 불상, 베트남 불상의 모습이 다르다. 그 다양성이 바로 문화권의 풍부한 내용이다. 4.문화 중심 국가의 의무 주지하다시피 동아시아의 문화는 오래동안 중국이 주도해 왔다. 유럽의 경우 16세기엔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17세기엔 무적함대의 스페인과 대영제국. 18세기엔 나폴레옹의 프랑스, 19세기엔 비스마르크의 독일 등, 그 중심부가 이동해 간 것과 비교해 보면 그 문화적 환경이 아주 다르다. 한나라가 건국한 BC 200년 무렵부터 19 세기까지 치면 2천년이나 된다. 19세기 중엽, 그런 동아시아 문화권에 유럽 열강들이 밀려오는 서세동진으로 동아시아는 문화를 주도해갈 중심부를 잃게 된다. 그 엄청난 변혁의 계절에 일본은 재빠르게 서구의 제국주의를 배워 동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한번도 남에게 문화적으로 영향을 주어보거나 세계문화를 주도해 본 경험이 없었던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어가는 방향에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잇속만을 챙기는데 급급한 제국주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과 베트남,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에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중국을 침략해서는 남경 학살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들은 문화권을 주도해갈 위치에서 문화적 임무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고작해서 군사지배와 경제침탈을 통해 자국의 이익만을 챙겼다. 만약에 일본이 그 옛날 중국이 했던 역할을 수행했다면 일본도, 동아시아도 그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이고, 세계대전을 치르는 불행도 없었을지 모른다. 한 문화권에서도 장자(長子)의 역할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런 전력으로 인하여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문화를 주도해 나아갈 자격을 상실하였다. 주변의 어느 나라도 일본이 주도해 나아가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들이 그런 기미를 보이면 바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이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보이지 않고, 국가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따위가 이어지는 한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부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어, 그들의 GDP가 아시아의 다른 나라를 다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또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대를 건너뛰어 오늘의 상황으로 시각을 옮겨보자. 지난 반세기, 20세기 후반기의 동아시아는 사실상 문화권을 이끌어갈 중심 국가가 없었다. 더욱이 20세기 3/4분기는 냉전시대 죽의 장막으로 인하여 문화적 동질성을 가질 수도 없었다. 있다면 일본 뿐이었는데 일본은 어차피 그 자격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이 급성장하였다. 한국은 제3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되었다.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은 한국을 모델로 삼아 사회 발전을 꾀하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성공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까지 참고하기 때문에 속도를 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은 앞으로 10년이면 한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보면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는 데는 적어도 10년은 더 걸린다는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동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해갈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류는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한류의 문제는 동아시아의 문화적 환경이 이렇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인 자신들은 아직도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우리는 아직 남에게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그것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을 뿐 남에게 영향을 준다거나 남이 우리를 따라온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한류가 일어나 큰 사조를 이루고 있다니 실감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 자세는 자기 겸손이라는 점에서는 계속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동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해야 하는 소명을 부여받았는데 그 임무를 방기하는 일이라면 지난 세월 일본이 범했던 또 다른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 되는데 있다. 이미 동아시아 문화의 장자로서 처신해야 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아직도 개도국 시절의 처지만을 생각한다면 많은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악착같이 상품을 팔아 최대한 이익을 남겨야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과 이미 그 나라 시장을 점유한 상태에서 판매하는 전략은 달라야 한다. 한 집단의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문화를 주도해본 역사적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 순간에 상기하고 문화의 주변부에서 중심부에로 자리를 옮겨 앉았을 때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챙겨야 한다. 우선 우리는 왜 한류가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기획한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측에서 일어났고, 우리 자신은 우리의 문화가 그렇게 대단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수용하는 측의 평가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 한국 문화의 어떤 면을 동경하는 것인지 섬세히 살펴야 한다.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 현장에 있는 분은 분대로,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여러 예를 들며 면밀한 분석을 가하고 있다. 한류의 일익을 담당했던 실무자들의 증언, 현지 외교관들의 한류 현황 보고들, 그리고 문명비평의 입장에서 한류를 분석한 이어령 선생의 논저, 현지 특파원으로 한류 초기부터 여기에 주목해온 중앙일보 유상철 기자의 증언, 본격적인 한류 평론서를 출간한 백원담 교수의 저서들은 한류의 현장과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중요하고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연구, 보고서를 참고하고 내 나름으로 경험한 바를 종합하건대 내가 인식하고 있는 한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한류가 동아시아의 각국에서 일어난 경위와 흐름을 주도하는 장르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받아들이는 한류는 한국의 고유 문화가 아니라 현대화된 현재의 한국 문화이다. 그들은 어쩌면 서구의 세련된 문화를 더 동경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는 멀게만 느껴지는데 그것을 한국에서 재창출해낸 한국의 대중문화들은 낯설지 않은 친숙감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한국의 문화는 그들의 삶속에 바로 접목시킬 수 있다는 아시아적 동질감이 서려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한국 문화의 강점이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외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문화로 세련시켜 온 역사적 경험이 풍부하다. 불교, 유교 심지어는 기독교 까지 한국식 전통을 만들어냈고, 정치 사회 제도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모두가 중국 혹은 서구로부터 받아들였지만 모두 한국적 특색을 지니는 신기로운 재능과 기술을 보였다. 남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문화발전소’ 기능은 약했어도 ‘문화변전소’ 기능은 뛰어났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서구문화를 가장 세련되게 자기화 시키는데 성공했고, 아시아적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한류의 특징이자 한계 내지는 과제로 남는 부분이다. 한류가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확대될 뿐 우리의 고급문화가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여 비관적으로 말하는 견해도 간혹 보인다. 그러나 문화의 전파에서는 언제나 대중 문화가 선두에 서고 뒤이어 그것을 창출해낸 저변의 고급문화가 뒤따른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서구 문화를 받아들일 때, 마리린 몬로, 넷킹 콜, 엘비스 프레이슬리가 먼저 들어왔지 고급 문화가 먼저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대중문화에 얹혀 고급문화와 전통문화가 함께 실려 가도록 관, 민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류의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일방적인 전파가 아니라 아시아 제민족과 국가간의 교류라는 차원에서 진행될 때 오래 지속할 수 있고,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류를 마치 문화전쟁의 성취, 또는 문화제국주의적 성공으로 생각하며 일방주의를 보이는 순간 수용국으로부터 강한 저항과 거부 사태를 유발시킬 것이다. 지금 일부에서 한류에 대한 경계와 의도적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런 점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자기 방어 본능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한류에 대한 논의 중 가장 우려되는 것은 이것을 경제적 측면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한류 관계 자료들이 대부분 문화산업의 각국 수출 실태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가 한류를 ‘단군 이래 처음 맞는 호기회’라며 이것을 수출을 통한 국가의 경제적 이익만을 앞세워 이 참에 무엇도 해보자는 식이 되면 그런 한류는 더 이상 흐르지 않을 것이다. 참여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동아시아 물류(物流) 중심국가를 지향한다고 공식 선언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것을 실현해 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 관점을 물류에서 문류(文流)로 전환 내지 확대해서 그 구상을 펼쳐야 할 때가 되었다. 문류가 잘 되어야 물류로 지속 가능하다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화급히 요구되고 있다. 한 문화권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그 자리를 옮겨 앉았다면 당연히 그에 따른 임무가 뒤따른다. 그 임무 중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이다. 우리는 한때 선진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살아왔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지식과 기술을 배워왔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그런 혜택을 한류가 흐르는 나라에 베풀어야 한다. 그런 문화적 원조는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민간 차원 모두에서 시행해야 한다. 단군 갑자 이래 처음 맞은 이 호기회를 일시적 풍조로 끝나게 한다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 된다. 한류는 더 이상 화두가 아니라 실천 과제인 것이다.
[ 참고문헌 ] 1.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한류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에 관한 공청회>2005.4.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2. 박상규 <문화상품의 해외 진출 활성화 방안 연구-한류를 중심으로>2005.3 강원대 산업협력단 3. (재)아시아 문화산업교류재단 <한류 확산을 위한 동남아 한국문화상품 소비자 및 정책조사 결과 보고서> 2005.12.15 4. 백원담 <동아시아의 문화선택-한류> 2005. 도서출판 팬타그램 5. 유상철 외<한류의 비밀> 2005.4 생각나무 6. 페어뱅크, 라이샤워, 크래그 <동양문화사> (김한규 외 번역) 1991. 을유문화사 (J.Faibank, E.Reischauer A.Craig<East Asia>1990, Houghton Mifflin Company) 7. 김하중 <떠오르는 용, 중국> 2003. 11 비전과 리더십 | ||||||||||||||||
게시일 2007-01-25 11: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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