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산실 조양회관 | ||||||
이 조양회관이 지어진 연혁은 이러하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전환하자 중국 만주 등에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독립운동가 서상일이 대구의 독립운동가 들의 뜻을 모아 달성공원 앞에 교육회관을 건립하게 된다. 조양회관 건축비는 대구구락부회원 각자 일정액씩 부담하기로 하고 부지는 서상일의 땅 500평으로 정했다. 당시 건축비는 4만3080원 50전이 들어간 대역사였다. 당시 일본 고동계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7개월 만에 완공하게 되었다.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서상일을 비롯한 지역민의 염원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서상일은 경북 성주에 있던 논과 대명동 산대못을 팔아 건축비를 충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건물을 완공했다. 건물설계는 당시 대구에서 건축업을 하던 윤학기가 했고 건축공사는 벽돌공장을 경영하던 백남채의 책임 하에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다. 이 회관에 사용된 목재는 압록강 근처에서 생산된 낙엽송을 사용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이 회관은 준공 후 당시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촌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민족계몽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밤이면 각종 청년단체에서 주재한 야학이 열려 향학의 열기가 뜨거웠으며 우국충정에 불타는 청년들이 밤낮없이 모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면서 조양회관은 직영하던 사진실, 인쇄시설도 남에게 임대하고 도서실과 대강당을 통한 사회계몽 활동에만 주력했다. 1940년대엔 일제의 말살 정책으로 건물 전체의 기능은 물론 동아일보 폐간에 따른 동아일보 지사의 폐업을 마지막으로 정지되고 말았다. 그 후 일본군대가 주둔하며 보급부대로 쓰던 조양회관은 해방 후 서상일의 청치참여(제헌국회의원)로 한민당사무실 ,6·25때는 유격대병영, 1955년 원화여중고 설립에 따라 교무실과 도서관으로 사용돼오다 1980년에 건설업체인 월성산업에 학교가 팔리면서 한때 존·폐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항일 독립운동 현장으로 역사적 가치에 못지않게 1920년대 건립된 건축물로서의 문화재적 가치도 인정할 만하다. 건축의 양식은 정면 중앙에 현관을 돌출시킨 당시 유행하던 양풍(洋風)이며, 건물의 평면 은 좌우 대칭형으로 정면 좌우 양끝의 계단실 부분이 약하게 도출되고 뒷면 중앙부가 뒤로 돌출해 전체적으로 십자(十字)형에 가깝다. 정면 중앙의 돌출된 현관은 4개의 사각 돌기둥을 세워 평지붕을 올린 형태이며, 돌기둥의 머리에는 주두(柱頭)를 간략히 표현하였다. 기둥 사이에는 반원형 아치를 틀어 장식했다. 돌출된 현관 상부의 지붕에는 작은 삼각형 박공을 만들어 위엄 있게 구성한 현관과 함께 정면성을 강조했다. 1층 평면은 현관을 중심으로 십자형의 중복도를 내고, 복도에 면해 각 실을 배치했다. 2층에서 가장 중요한 실은 강당으로, 이는 대중 강연 등을 고려하여 설계하였다. 건물의 외벽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으며, 창문은 오르내리기 창을 시설했다. 모든 창문의 화강석 다듬은 인방석(引枋石)을 연속으로 설치하여 수평성을 강조했다. 이 건물은 광복회 사무실 사용하는 것 이외에 항일운동 사료전시실에 ‘3·1운동 당시 대구시지역 주모자들에 대한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등 문서자료와 ‘애국지사 김태련이 대구형무소 복역 중 쓰던 밥그릇’ 등 유품, 일제시대 애두역·대구경찰서·안동형무소·항일운동가들의 사진 등 400여점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또한 2층 대강당에는 사방을 둘러싼 애국 열사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에서는 각 부문의 전문가들을 불러 시국강연, 국산품 애용, 상공업진흥 등에 대한 강연회를 자주 열었다고 하는데. 초청된 연사는 최남선, 윤백남 등이 있었으며 강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강당이 좁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양회관은 지방의 한 언론인 서상일과 지역민들이 불굴의 항일독립정신으로 세워진 건물로 오늘날에도 변색되지 않는 붉은 벽돌로 남아 당시의 독립정신을 전하고 있는 민족의 표상으로 영구 보존되어 길이 빛내기를 소망한다. ▷현충사관리소 소장 이항원 lhw1@ocp.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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