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3000년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를 졌을까?

깜보입니다 2007. 11. 5. 20:28
3000년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를 졌을까?

3000년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를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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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이다.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할 즈음 나는 부여의 한적한 시골 진흙탕에서 3000년전 청동기인들이 쌀을 재배했던 논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2000년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호주에 가 있었다. 대학원 진학을 보류하고 호주에 가겠다고 하니 당시 나의 지도교수였던 충남대학교 고고학과의 박순발 교수는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니 알아서 해라!’ 라는 짧은 격려(?)를 해주셨다. 어린 나이에 그 한마디가 큰 상처였음은 분명한 일이지만,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에 진학할 때까지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의 연구원 자리 하나를 비워 두신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감사드렸던 기억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맡게 된 임무는 바로 현재 부여군 규암면 노화리 일대의 경작유적 발굴이었다. 지금이야 저수지다 수전이다 등등 다양한 형태의 저습지 발굴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저습지 발굴이라고 하면 다들‘경험이 없어서’,‘잘 몰라서’등등의 하소연하기에 급급할 정도로 어려운 조사 대상이었다.

...발굴조사 중간에 신임 현장 책임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신임 책임자에 대한 현장 인부들의 텃새, 이전 조사결과에 대한 점검 등등 많은 고민거리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40명 가까이 되던 발굴조사 인부들을 8명으로 구조조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여덟 분이 결국 40명 이상의 역할을 해 주셨고, 지금도 인연이 되어 부여지역에서 발굴조사하고 있는 여러 현장에서 베테랑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주시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것은 이전 조사결과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모든 일이 그러하듯 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듯이, 특히 저습지 성격의 유적을 조사해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는 큰 어려움이었다. 만약 내가 농촌 출신이던지, 아니면 농사에 대한 경험이 있던지 했으면 농사를 짓던 유적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법도 한데, 그런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사가 쉬는 날이면 농사를 짓지 않는 주변의 논과 밭을
찾아서 삽질도 해보고, 차를 몰고 집에 가거나 할 때면 이쁜 아가씨보다는 길옆에 보이는 논과 밭에만 시선이 가곤 했다.

...그런 시절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출발하는데,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가 바로 봄여름가을겨울의 Bravo My Life였다. 현장에서 나온 흙을 마치 천마총의 봉분처럼 쌓아 놓았던 back dirt 위로 짙은 안개와 함께 석양이 질 때, ‘서툴게 살아왔지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용기를 위해 Bravo!'라는 노래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부여 구봉-노화리 유적 발굴조사를 계기로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는 대전 노은동, 부여 합송리 등등 저습지 관련 유적들을 잇따라 발굴하게 되었고, 저습지 발굴조사 경험을 살려 한국고고학보에「유적의 형성과 후퇴적과정에 대한 기초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게재할 수 있었다.

...부여 구봉-노화리 유적은 마을 농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의 규암면 노화리와 서쪽의 구룡면 구봉리로 나뉘어져 있는데, 발굴조사 범위가 농로를 기준으로 양쪽 50m 범위를 포함했기 때문에 명칭을 구봉-노화리 유적이라고 정했다. 부여에서 구룡면으로 들어가는 왕복 4차선 도로 공사 구간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도로 공사가 어느정도 완료되어 당시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길이 없다.

...유적 전반에서 아래서부터 청동기시대-백제시대-조선시대 논 경작층이 확인되었는데(자연적인 원리에 의해 아래 쌓인 흙이 위에 쌓인 흙보다 빨리 형성됨), 주목받고 있는 것은 청동기시대 논 경작면이다. 부분적으로 논둑도 잘 남아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논의 범위를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물을 공급하기 위한 관개수로의 평면형태도 변화하면서 관개범위가 확장되었다. 기존에 일부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경작층이 확인된
예는 몇몇 있었지만, 논둑과 관개수로, 게다가 청동기인들이 논 위를 밟고 다녔던 발자국이 평면적으로 다양하게 확인된 것은 의미있는 결과였다.

...또한 논농사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농사도구(예를 들어 반달형돌칼, 갈돌 등)가 관개수로 내부와 논바닥에서 수습되었던 것 역시 큰 성과였다. 일반적으로 논유적에서는 무덤이나 집자리처럼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지는 않는다. 농사를 짓는 경작면이기 때문에, 지금과 마찬가지로 논바닥의 이물질들이 경작과정에서 솎아지기도 하고, 대부분이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일시에 폐기되기 때문이다. 그러서인지 2년에 걸친 발굴조사 수습된 유물은 사과상자로 채 1상자가 되지 않는다(어찌보면 행운일 수도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청동기인의 발자국을 고등학교때 미술솜씨(?)를 발휘해서 석고로 떴던 것, 그리고 백제시대 우마차의 수레바퀴 자국 근처의 소 발자국을 떴던 것이다. 청동기인의 발자국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손꼽아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논 구획의 규모는 대략 4× 3m 정도로 작았는데, 백제시대의 23× 7m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42× 23m로 커진다. 이것은 아마 논에 물을 공급하던 관개체계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농사방법의 개량과도 연관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청동기시대 논 아래에서는 많은 나무조각들이 들어가 있는 자연수로가 확인되었는데, 그 자연수로 내부에서도 농사도구의 하나인 반달형돌칼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조사된 청동기시대 논보다 이른 시기에 주변에서 그 자연수로를 활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발달형돌칼이 출토되었던 자연수로 내부의 나무조각들에 대해 연대를 측정(방사성탄소연대법)한 결과 기원전 1300년을 상회하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반도에서 최소한 기원전 1000년경에 이미 논농사가 시작되었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반달형돌칼 등의 논농사 관련 유물)들이 함께 소개될 수 있었다.

...또한 OSL이라고 하는 새로운 연대측정법을 도입하여 흙의 퇴적연대를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기존에 많이 활용되던, 그리고 요즘에도 각광받고 있는 절대연대측정법은 방사성탄소연대법이다. 절대연대측정법이란 분석 대상의 연대가 언제인지를 통계학적 확률을 통해 결정하는 방법으로 그 결과는 구체적으로‘지금부터 몇 년’으로 나온다. 방사성탄소연대법의 가장 큰 맹점은 기본적으로 분석시료의 성격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인데, 탄소를 함유하고 있는 동물의 뼈, 식물의 잔재 등 생명체의 잔존물에 주로 한정된다.

...부여 구봉-노화리 발굴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OSL 방법으로 토양을 직접 사용해서 연대를 측정하였으며, 그 결과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값과 연계되어 OSL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갑자기 장마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장마비가 쏟아져 내리는 날이면, 뻘흙 속에서 발이 빠져 가면서 다급하게 유적을 비닐로 덮던, 삽을 들고 진흙 사이에 배수로를 파던, 현장 컨테이너에서 밤을 새우면서 양수기에 기름을 채우던 추억이 떠오른다. 2001년 부여 구봉-노화리 유적과의 인연 때문일까. 난 지금 함안 성산산성 저수지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이성준
게시일 2007-04-06 13:4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