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외관계에 있어서 조선시대를 보는 눈은 어떠할까? 대부분은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와는 문을 닫고 살다가 결국 서구 근대화의 파도를 넘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폐쇄적인 외교 노선을 고수한 나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이러한 인식에는 조선의 멸망을 지배층의 무능과 정치 외교의 부재로 돌리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세세히 들여다보면 조선시대의 외교 역량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국가적으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고수하면서도 중국과 일본 및 주변국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서양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밀려오던 18세기 이후에는 청나라를 통해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에도 그다지 인색하지 않았다.
과거 중국이나 일본으로 떠난 우리 선조 학자들은 기행문 형식으로 외국의 풍물과 역사, 지리를 기록하였다. 청나라 기행문인 『연행록』이나 일본 기행문인 『해사록』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대한 정보를 담아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으며, 『지봉유설』 등의 백과사전에서는 서양의 학문을 수용하려 했던 선구적인 지식인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96년 민영환 일행의 기행문에서는 이미 100년 전에 세계를 일주한 선조들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에 전통시대, 세계와의 개방적인 만남을 시도한 저술들을 통해 선조들의 세계 인식이 결코 폐쇄적이지 않았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과의 만남
조선은 중국과 기본적으로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하였다. 형식적으로 큰 나라를 섬기는 예를 취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중국이라는 우방을 통해 국방의 안정을 찾고, 선진 문화를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하는 실리적인 성격이 짙었다. 1636년 청나라가 건국되고,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외교 노선은 크게 갈리게 되었다.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청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생각한 척화파와 실리를 찾아 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화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전란으로 크게 홍역을 치른 조선은 청과 화의를 맺고 본격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해 나갔다. 청나라로 파견된 사신을 ‘연행사燕行使’라 불렀고, 연행사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이 도입되면서 청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 갔다. 그리하여 청나라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北學 사상이 제기되기에 이르렀으며, 홍대용·박제가·박지원 등은 연행의 경험을 토대로 해 조선 사회에 북학 사상의 씨를 뿌렸다. 이후 1778년, 박제가는 청나라에서 체험한 견문을 토대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이론에만 깊이 빠져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와 백성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였다. 『북학의』는 그 제목에서 보듯,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의 시대사상으로 자리 잡기 위한 기반의 역할을 하였다. 박제가는 상업과 유통의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전통시대에 미덕으로 생각했던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생산을 증대시키자는데 힘을 실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의 이론과도 흡사하다. 다음으로 『열하일기』는 조선 후기 북학파를 대표하는 학자 박지원이 1780년 청나라를 다녀온 후, 1783년에 완성한 기행문 형식의 책이다. 박지원은 44세 때 사신단의 일원으로 연경에 들어갔다가 황제가 피서 차 쉬고 있던 열하를 거쳐 돌아왔다. 그가 이곳에서 약 2개월간 견문한 내용을 정리한 『열하일기』에는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한 지식인의 실학 정신이 녹아 있다.
일본과의 만남
조선은 초기부터 일본과 교린 정책에 입각한 외교관계를 맺고 교류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일본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에 대한 정보를 한 차원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한 학자는 신숙주였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 25)에 일본에 다녀온 뒤 1471년(성종 2) 왕명을 받고 『해동제국기』를 편찬하였다. 『해동제국기』는 신숙주의 서문과 7장의 지도, 「일본국기日本國紀」, 「유구국기」, 「조빙응접기」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의 자연환경과 국내 정세, 대일 외교의 연혁 및 각종 의례 등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해동제국기』는 이후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의 필수 서적이 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에 일시적인 냉각을 가져왔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과의 국교 재개는 예상 외로 빨리 이루어져 1607년에 국교 회복이 타결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어 1811년(순조 11)까지 조선 후기에만 총 12차례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통신사로 다녀 온 조선의 사신들은 일본 견문록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세렴의 『해사록』, 조명채의 『봉사일본시견문록奉使日本時聞見錄』, 남용익의 『부상록扶桑錄』, 김지남(역관)의 『동사일록』, 신유한의 『해유록海遊錄』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이들 작품을 통해 시기적으로 일본의 정치, 문화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통신사들은 대부분 일본과의 학술문화 교류에 대비해 각 분야의 1인자들만을 골라 뽑았는데, 그 수가 대략 4백에서 5백여 명에 달할 정도에 대규모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에서의 통신사 행렬은 수천 명의 사람과 말이 있는 대장관의 행렬을 이루면서, 일본 열도를 최대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통신사가 도착하면 일본 최고의 화가들이 그 행렬을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비싼 값에 팔렸으며, 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여겼다. 또한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는 조선 붐이 불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통신사 일행들은 겨울연가, 대장금 등 최근에 불고 있는 한류 열기의 원조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서양과의 만남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예수회 소속 서양 선교사들이 천주교의 전도를 위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서양 르네상스시대 과학 기술의 성과도 함께 소개하였다. 또한 이들에 의해 세계지도를 비롯한 천문·수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저작들이 한문으로 번역·간행되었으며, 이 한역서학서들은 천리경·자명종 및 「천하도지도」와 「곤여전도」 등의 신문물과 함께 조선에 수입되었다. 이수광이 저술한 『지봉유설』의 제2권 「제국부諸國部」의 ‘외국조’에는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리치가 지은 『구라파국지도』와 『천주실의』의 내용과 서양 각 나라에 대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익의 『성호사설』의 「천문문天文門」에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이밖에도 18세기말에는 「천하도지도」와 같은 세계지도가 수입되어 세계에 대한 기본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 19세기 서양의 과학과 문화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을 주장한 학자는 이규경이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우리나라와 중국 및 기타 여러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지리, 경제, 사회, 자연환경 등에 대해 고증한 내용을 분류·정리하였다. 호를 오대양 육대주를 상징하는 ‘오주’로 할 만큼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컸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나아가 천주교까지 널리 소개하였다. 바야흐로 조선 말기무렵이었던 1896년 러시아에서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황제 즉위식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러시아와의 긴밀한 외교관계 수립으로 열강의 침략을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으로 혼란했던 시절이 바로 이 때다. 고종은 민영환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 조선을 대표하는 사절로 삼아 러시아로 파견하였으며, 왕명을 받고 인천항을 출발한 민영환 일행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거쳐 다시 대서양까지 횡단하였다. 힘겹게 도착한 러시아 모스크바 성의 크레믈린 궁전, 일행은 여행의 피로 속에서도 자신들의 여정을 치밀한 기록으로 남겼다. 『부아기정 赴俄記程』, 『환구일록』, 『환구음초』가 바로 당시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과 자료집이다. 이들 책에는 러시아로 가는 여정 중에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독일 등 세계의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견문한 서양 열강의 산업·군사·의술·교육·문화와 이에 대한 감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열린 세계로 한걸음씩 다가서는 조선 지식인의 모습 을 접할 수 있는 선조들의 책이다.
언제나 게을리 하지 않은 선조들의 외국어 학습
뿐만 아니라 넓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작업은 외국어 학습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요즈음 못지 않게 체계적인 외국어 학습이 이루어져, 잡과雜科에 역과譯科라는 시험을 두어 외국어를 구사하는 통역관을 관리로 뽑았다. 이에 따라 외국어에 대한 학습의 필요는 여러 학습서를 탄생케 하였다. 중국어 교본인 『노걸대』와 『박통사』를 비롯해, 일본어 학습서인 『첩해신어』 등이 그것이다. 또한 외국어 전문 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을 두었고, 『통문관지 通文館志』라는 책에는 역대 이름을 날린 역관들의 활약상을 담았다. 이들 책들은 조선이 결코 패쇄적이고 고립적인 나라만은 아니었음을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글 : 신병주 박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진 제공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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