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예禮가 살아 있는 옛古스러운 공간 종택을 찾아서

깜보입니다 2007. 12. 11. 19:34
예禮가 살아 있는 옛古스러운 공간 종택을 찾아서


핵가족 시대가 대세가 되어버린 이즈음과는 달리, 예전의 대가족 시대에는 가문의 왕래가 빈번했다. 집안의 행사나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모여 의논하고 고민하며, 함께 희비를 나누었다. 종가집이라 불리는 종택이 주된 모임 장소였다. 문중 사람들이 모이는 종택의 예법은 늘 근엄하였고, 예법이 엄정할수록 가문의 격이 높았다. 오래된 명문가의 종택에서 고풍스러움과 함께 격식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전통과 예법에서 기인할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격의 가치도 변하고 있다. 가치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예禮가 무뎌지는 현실이 안타까운 이즈음이다. 명문가의 종택을 찾아 우리네 주거 공간이었던 한옥의 아름다움과 함께 선조들이 지켜왔던 옛스러운 전통들을 만나 본다.


고성이씨 탑동파종택


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 철길 뒤편으로 세 곳의 문화유적지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신세동 칠층전탑,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정침 군자정, 그리고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이다.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바짝 붙어 지나치는 기차소리가 자주 정적을 깬다. 본래 낙동강변에 자리한 풍광 좋은 이곳에 기차길이 놓이게 된 것은 아픈 사연이 있다. 일제 치하 당시의 일이다. 민족정기 말살정책으로 일제는 이곳 탑동파종택과 임청각을 없애고 그 자리에 철길을 놓으려 했다. 그렇게 되면 정기가 끊어져 더 이상 안동에 큰 인물이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고성이씨 문중에서는 각처에 도움을 청했고, 결국 많은 돈을 들여 현재의 위치로 철로가 지나가도록 설계를 변경시켰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라는 큰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 탄압 정책으로 법흥사는 약 3~4칸 규모의 작은 절집으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조선 숙종 11년(1685)에 좌승지였던 이후식 공에 의해 지금의 종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에는 집을 지을 당시의 신기한 설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당시 승지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내려온 이후식 공이 이곳에 집터를 잡고 안채를 짓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절을 허물고 불상들을 낙동강변에 버렸는데, 다음날이 되면 버려졌던 불상들이 다시 제자리에 와 있고 또 버리면 다시 와 있고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느 날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말하기를 “이 집은 나의 집터인데 왜 나를 몰아내고 네가 여기다가 집을 지으려고 하느냐, 내가 너의 자손들을 잡아 가리라.”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후식 공은 정말로 두 아들을 잃게 되었다. 결국 집 짓는 일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영특하고 총명한 손자가 조부의 용기를 북돋웠다고 한다. 이후 손자의 정성어린 위로와 함께 다시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다시 부처님이 현몽하여 “손자의 생기와 효심을 어여삐 여겨 집을 짓도록 허락하니 추후에라도 부처님을 잘 받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현재 탑동파종택에는 안채, 영모당, 정우재, 북정, 사당 등이 남아 있으며 3칸 짜리 대문채(행랑채)가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성이씨가 안동에 정착한지 22대, 500여 년의 세월 동안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간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안동 양반사회에서 도산서원 전교와 함께 최고의 명예직으로 여겨졌던 안동 유향좌수留鄕座首가 고성이씨 문중이 가장 많은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현재 종택에는 탑동파 15대 종손인 이재익 씨(69) 등 3대가 살고 있다.


퇴계종택

안동시 도산면에 자리한 퇴계종택은 퇴계의 손자인 이안도가 지었다. 말년에 안동으로 내려온 퇴계는 고향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후학들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안도는 할아버지의 자취가 배어 있는 한서암 동남쪽에 후손들이 살 집을 마련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퇴계의 10대손 이휘녕이 원래 집 건너편에 또 한 채의 집을 세웠다. 그러나 퇴계종택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을 겪게 된다.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진 가운데 1895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당시 안동에서도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이때 의병장을 맡은 이가 퇴계의 11대손인 이만도였다. 이렇게 시작한 안동의 항일운동이 끊이지 않고 계속 확산되자 일제는 1907년, 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종택을 불질러버렸다. 지금의 퇴계종택은 13대손인 이충호가 1929년 인근 다른 집안의 종택을 사들여 새로이 옮겨 세운 것이다. 숙종 때 학자 권두경이 퇴계를 남달리 흠모해 세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도 함께 재건하였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향으로 앉은 퇴계종택은 크게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正寢 : 주택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집 또는 방)이 있는 영역, 동쪽 약간 뒤로 처진 위치에 ㅁ자형 정침과 같은 규모와 양식의 5칸 솟을대문과 추월한수정으로 이루어진 영역, 추월한수정 영역 뒤쪽에 접한 솟을삼문과 사당이 있는 영역 등 총 34칸으로 구성되며, 넓이는 2119㎡에 이른다.

현재 퇴계종택에는 15대손인 이동은(99) 옹과 16대손 이근필(75) 씨, 17대손 이치억(32) 씨가 함께 살고 있다. 허나 올해 8월, 이치억 씨 부부가 아들을 낳아 이제는 4대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들 종손 3대는 가학家學도 잇고 있는데, 가장 먼저 이동은 옹은 일제시대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왜놈 교육은 받지 말라.”는 문중의 엄명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아들 근필씨는 대학 졸업 후 평생을 교직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 고향의 초등학교 교장으로 옮겨 정년퇴임하였다. 손주인 치억씨 또한 이를 이어받아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유교철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퇴계의 존재가 그렇듯 안동의 수많은 명문가 중에서도 퇴계고택이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2001년 퇴계 탄신 500주년을 맞아 안동에서 ‘세계유교문화축제’가 열렸을 당시, 2,000여 명의 대인원이 한자리에 모여 제사를 올렸다.

농암종택

낙동강이 안동으로 흘러드는 청량산 자락 뒤편, 기묘한 단애의 산과 휘도는 강이 어우러진 풍광 좋은 마을 분강촌에 농암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농암종택은 ‘농암가’,‘현거어부가’ 등으로 영남 시가문학을 선도한 농암 이현보가 태어나고 성장한 집이다. 현재 이곳에는 직계 자손들이 650여 년에 걸쳐 살아가고 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사람은 농암의 고조부 이번으로 1370년 무렵에 이를 완성하였다. 농암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기에 농암종택으로 불리운다. 종택은 이천여 평의 대지 위에 사당, 안채, 사랑채, 별채, 문간채로 구성된 본채와 긍구당, 명농당 등의 별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긍구당은 1350년 이헌이 지은 건물이며, 명농당은 1501년 농암이 44세 때 귀거래의 의지를 표방하여 지은 집으로, 벽 위에 ‘귀거래도’를 그렸다. 종택과 분강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은 여러 종류인데, 특히 1526년에 그린 ‘분천현연도’는 농암 당시의 풍광이 잘 나타나 있다. 농암종택에 전해져오는 보물 중에는 ‘화산양로연’이라는 그림도 있다. 화산양로연의 내력은 대략 이렇다.

1519년 농암은 안동부사로 봉직하였는데, 부府 내의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청사마당으로 초청하여 성대한 양로연을 베풀었다. 이 양로연은 1511년 영천군수 시절 ‘쌍청당양로연’을 잇는 행사로, 맹자의 ‘남의 부모를 내 부모처럼 섬긴다’는 ‘老吾老以及人之老’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농암은 이 자리에서 고을 원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는데, 이 ‘색동옷의 희롱’은 중국의 ‘노래자老萊子의 효도’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농암의 생애에서 ‘효孝’는 ‘적선積善’과 더불어 일관된 지향점이 되는 것으로, 이는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종택 사랑마루에는 선조 임금이 농암 가문에 내린 ‘적선積善’이란 어필이 걸려 있다. 크기가 무려 1m나 되는데, 농암의 아들 이숙량이 왕자사부의 벼슬을 받아 선조 임금께 나아가 사은숙배하니 임금이 “너의 집은 적선지가가 아니냐” 하며 즉석에서 써서 하사했다고 전한다.


안동장씨 경당종택

안동장씨 종택인 경당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종택은 제월대와 광풍정이 있는 봄파리에 있었으나 약 24년 전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중건되었다. 이 집을 지은 경당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의 문하로, 영남학파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성리학자이다. 경당은 퇴계의 양대 제자인 김성일과 류성룡, 남명의 제자인 정구 등 3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 결코 나이와 관행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학식과 덕망은 깊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과 수행에 정진하는 삶을 택했다. 그가 학봉과 서애라는 두 거유巨儒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과 지척 간에 살았고, 학봉과 인척 관계였던 인연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학봉과 경당종택은 한 마을에 있다. 학봉과 경당 집안 간의 인척 관계는 400여 년을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당의 12세손인 장성진 씨(69)는 “지금도 집안의 대소사는 학봉 집안과 의논하여 결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경당 가문의 내력 중 특이한 것은 대대로 전해져오는 음식 맛이다. 경당의 무남독녀였던 안동 장씨 정부인은 한글 요리책인 ‘규곤시의방閨是議方’을 편찬하기도 했는데, 그 가풍은 요즘도 그 모습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당종택에는 여느 종택이나 고택과 달리 솟을대문이 없고 전체적으로 단촐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건물의 형태는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민도리집으로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이다. 건물의 앞면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달려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로 전체 6칸으로 구성된다. 사랑채에는 경당고택敬堂古宅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지촌 김방걸의 종손인 남정 김구직의 글씨다.  


▶글 /사진  남정우

게시일 2007-12-04 10:3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