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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깜보입니다 2008. 2. 1. 17:04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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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 금산사 미륵전(金山寺 彌勒殿)
장르구분 : 불교건축
지정종목 : 국보 제62호
용도별 구분 : 불전, 미륵전
제작시기 : 1994년 해체보수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관련인물 : 진표율사(眞表, 7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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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금산사는 모악산(母嶽山) 기슭에 있는 산지가람(山地伽藍)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1)에 왕의 복을 비는 사찰로서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작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734년(신라 성덕왕 33)에 진표(眞表) 율사가 이곳에서 순제(順濟) 법사에게 출가하여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부사의방장(不思義方丈)에 들어가 미륵(彌勒)과 지장보살(地藏菩薩)으로부터 계법을 전수받고 다시 돌아와 762년(경덕왕 21)부터 766년(혜공왕 2)에 걸쳐 금산사를 중창하였는데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존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후 금산사는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그 후 후백제 견훤(甄萱)의 지원으로 사찰을 일신 중창하였고 고려시대에는 1079년(고려 문종 33)에 혜덕(慧德) 왕사가 주석하며 사찰을 중창하였다. 혜덕의 뒤를 이어 도생(導生) 승통과 원명(圓明)대사가 불사를 계속하여 이때 이루어진 대가람이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
1598년(선조 31)의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모든 전각과 산내 암자까지 회진되었는데 전후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 대사가 중창을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미륵전과 대적광전(大寂光殿), 만세루(萬歲樓), 대장전(大藏殿) 등 현존하는 건물들이 이때 중건되었으나 중창의 범위가 대사구(大寺區)에 한정되어 광교원과 봉천원은 복구되지 못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물의 구조와 특징  
[미륵전 활주]
미륵전은 미래에 출현할 미륵부처님이나 미륵보살을 주불로 모신 불전이다. 또한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용화세계를 이룩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용화전(龍華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금산사의 주불전(主佛殿) 중 하나인 미륵전은 3층 불전으로써, 초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씩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3벌대로 쌓은 장대석축 위에 낮은 장대석 기단을 두었는데 20m에 달하는 높이와 비교할 때 기단부가 너무 낮다. 기단 위에는 자연석을 덤벙주초 방식으로 놓고 민흘림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여 초층 축부(軸部)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다포계(多包系) 형식인데 초층에는 평방 위에 포작(包作)을 올렸으나 2층 이상에서는 창방 위에 바로 포작을 배열하여 특이하다. 제공 외단은 앙서 형태로 처리하였고 내단은 운궁(雲宮) 형식으로 처리하였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변화된 형태들이 혼재해 있다. 특히 초층 공포의 3제공과 2층 공포의 3제공 일부에 비스듬히 깎여진 부분이 있는데 이는 하앙(下昻) 구조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호는 전면 어간에 4분합문, 협간에 2분합문, 툇간에 외짝문을 달아 개방하였고 2층과 3층에는 전면에 채광창을 두었는데 이는 창을 통해 내부로 들어온 빛이 거대한 수직공간과 불상을 비추어 장엄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만들고자 의도한 듯하다. 후면에는 지붕으로 나갈 수 있도록 판문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팔작 형식이며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浮椽)을 설치한 겹처마 형식이다. 초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 
  도면 및 이미지  
[배치도]
[정면도]
[종단면도]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전북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 김봉렬, 공간사, 1994

관련사이트
- 문화재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