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나는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처음 그 소식을 들었다. 순간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과 함께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한참을 '멍' 때리며 그냥 TV모니터만 쳐다보았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막막해지고 무거워짐을 느낄 때 문득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란 구절이 떠올랐고 ' 그래, 참 노무현 전 대통령 답다'는 마음 속의 긍정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노무현 증오의 화신이었던 보수신문들은 이 추모열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 아마도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자살하다니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혹은 그렇게 당당하고 떳떳하다면 살아서 재판을 통해 진실을 가려야 하지 않은가? 그는 결국 도피한 것이다'는 프레임을 가지고 노무현의 죽음과 그 죽음에 담긴 의미와 기억들을 지우려고 시도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갑제를 비롯한 그들은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럴 땐 제발 벗어났으면 했으나 역시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란 비극을 접하면서 겹쳐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망국(亡國)의 군주 고종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상설이라는 양반(후에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고 독립운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내용인 즉, ' 나라는 이미 망했고 전하께서 망국의 책임을 느끼시고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서 명예라도 건지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라'는 내용이었다. 상소의 내용을 조금 더 풀어보면 전하가 죽음으로 일제 침략(을사조약)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천만 한국인들이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의지와 꿈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결국 전하는 죽음으로 나라를 되살려야할 의무와 책임을 지녔다는 내용이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고종은 자살하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그것도 비루하고 구차한 '이왕전하'라는 호칭으로 1919년까지...
우리 역사에서 조선왕조 이후로 국가 지도자였던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과오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졌던 지도자가 있었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정부패와 폭정으로 일반 백성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폭군들과 암군(暗君)들이 언제 한번이라도 '내 탓에 그리된 것이다'고 죽음으로 책임진 적이 있는가?
그리고 20세기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진지 이제 60여년이 지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전까지 8명의 대통령이 나왔으나 누가 자신의 과오나 잘못에 대하여 죽음으로 책임진 사람이 있었던가?
이승만? 그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준 대표적인 국가지도자였다. 한국전쟁이라는 극도의 위기상황에서 국군이 해주로 북진하고 있다고 구라를 치면서 서울이 함락되던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여 야반도주했던 인물.. 그래도 그 경황없는 야반도주의 와중에도 한국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챙기던 동물적인 감각, 거기에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28일 서울을 수복한 다음 맨 처음했던 짓거리가 다리가 끊겨 미처 피난가지 못했던 100만이 넘는 서울 시민들을 공산주의에 찬성하고 동조한 사람이라고 몰아세워 부역자 재판을 통해 수만명의 시민을 학살한 책임회피의 막장을 보여준 사람.(다리는 누가 끊었는데...) 4.19 혁명과정에서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고 결국 해외로 쫓겨나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마지막 모습까지 무책임의 정수를 보여준 사람.
박정희는 이 점에서는 행운아였다. 그가 스스로 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는 결코 아니었지만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유신독재의 책임을 간접적인 형식이나마 짊어졌다는 점에서 동정을 받을 수 있었고, 결국 그의 비명횡사는 유신독재의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는 효과를 가져왔으니까.
최규하와 윤보선은 한국 현대사의 전환기에 국가지도자로서 어디까지 비겁하고 방관자적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가를 실감나게 보여주었다. 최규하는 죽는 그 날까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윤보선 또한 5.16 군사쿠데타 때 사회 혼란을 막기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두 달 넘게 대통령직에 계속 있음으로 해서 결국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헌법을 유린한 쿠데타를 인정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말하고 싶지도 않다. 김영삼이나 김대중 또한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책임지려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는 않았다. (화려한 립서비스만 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이명박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였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주연은 이명박이고 조연은 검찰과 국세청 그리고 보수언론이었다는 점은 대다수 국민들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으니까. 사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택에는 가족이나 측근과 같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액수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자괴감, 퇴임 후 이전 행정부를 운영했던 전직 대통령으로서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과 용산참사와 같이 무수히 희생되고있는 대한민국 서민들을 바라보면서 느낀 자책감, 그리고 역주행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막고자 한 마지막 저항의 몸짓과 책임감의 발산이라고 생각한다.
비겁하다, 조폭 보스의 의리를 보여주었다고 주절거리는 저 보수언론들에게 외치고 싶다. 우리 역사에서 저만큼 처절하게 자기 주변의 허물이나 과오를 죽음으로 책임진 국가 지도자를 말할 수 있으면 말해보라고.
또 하나 조폭과 흡사하면서 조폭의 운영원리조차도 제대로 모르는 사이비 조폭언론들에게 묻고 싶다. 어떤 폭력 조직의 오야붕(최고 보스)이 죽음으로 부하들을 보호하고 죽었냐고.. 조폭세계에서 오야붕(최고 보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차라리 체포되어 감옥에 가면 갔지. 죽는 건 중간 보스나 하수인이 죽을 뿐이다. 아마 그들이 떠올린 일본 정치판(자민당)의 계파정치에서도 오야붕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선거 실무책임자나 자금 책임자가 오야붕 혹은 계파를 보호하기 위해 책임지고 자살하는 모습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듯이 그 분은 63년 인생의 시간을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사신 것 같다. 자신에게 엄격한, 그래서 자기 주변의 사소한 허물조차도 혹독하리만치 책임지려했던 그 모습에서 '바보'라는 별명이 정말이지 삶의 마지막까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훌륭한 죽음과 훌륭한 삶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난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던 국가지도자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그분의 선택에 너무도 가슴이 쓰리고 아프다. 차라리 그냥 약간의 흠결은 있었지만 사람냄새가 물씬나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국가지도자로 남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최고로 책임감이 강했던 서거한 국가 지도자가 아니라 최고로 인간적이었던 살아있는 전직대통령이었기를 ... 너무 때늦은 후회와 미안함이 온 가슴을 가득 채운 후에야 ....
그가 살아왔던 길을 보면서 희망을 품고 기대하였지만 취임 후 그의 모습을 보면서 비판자로 돌아섰던, 그리고 그의 진심과 책임감을 '준비없는 이별'을 통해서야 겨우 확인했던 수많은 '바보 국민들' 중의 하나였던 나 또한 살아남은 자의 의무( = 기억해야 할 의무)를 안은 채, 그가 죽음으로 마련해 준 버팀목에 기댄 빚진 자의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