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스크랩] 불꽃놀이

깜보입니다 2012. 1. 29. 14:47
   

화염이 하늘에 치솟고…”

                  中도 놀란 조선 불꽃놀이


 

"화염이 하늘에 치솟고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 2008년 8월 중국베이징의 밤하늘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정확히 590년 전인 태종18년(1418년) 1월1일 조선의 한양 내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실시된 불꽃놀이를 묘사한 조선왕조실록의 한 구절이다.

▲ 경복궁 근정전 앞 뜰

 

조선 시대 때 불꽃놀이는 화산붕(火山棚), 화붕(火棚), 화희(火?), 방화(放火)라 불렀고 구경하는 것을 관화(觀火)라 했다.


불꽃놀이는 조선 초부터 연말연초와 외국사신이 방문했을 때 축하의 차원에서 하던 공식행사였다.

 

불꽃놀이를 하려면 화포(火砲)의 첨단기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무기를 관장하던 군기감(軍器監)이 행사를 주관했고 장소는 궁궐 안이었다.

  

군기시 (고려·조선 관청) [軍器寺, 군기감, 기기국]

고려와 조선시대 병기·기치(旗幟)·융장(戎仗)·집물(什物) 등의 제조를 맡던 관청.

고려 목종 때 군기감(軍器監)으로 처음 설치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 민부(民部)에 병합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부활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 군기시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392년(태조 1)에 군기감으로 설치되었으나 역시 1466년(세조 12) 군기시로 개칭했다. 1884년(고종 21)에 폐지되면서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겼다. 관원으로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명, 또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을 선발하여 2명의 제조(提調)를 두었다. 주부(主簿) 이상 2명은 구임(久任)으로 했다. 또한 그 밑에 각 분야의 장인(匠人)을 배속시켰다. 한편 1434년(세종 16) 북방개척과 사무의 번다함을 이유로 권직장(權直長) 20명을 배속했다. 또한 활과 화살의 제작을 위해 궁인(弓人) 90명, 시인(矢人) 60명을 배속시켜 3번으로 나누어 교체했다.


 

왕실의 위엄을 백성들에게 과시하려던 목적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불꽃놀이가 가장 성행했던 때는 태종과 세종 치세였다.

 

고려 말부터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화포개발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이 때가 되면 그 기술수준이 명나라를 넘어서려 하고 있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은 직후인 세종1년(1419년) 1월 명나라 사신 황엄과 유천이 불꽃놀이를 보고자 했다.

 

황엄(黃儼) : 환관태감(宦官太監)으로 조선 세종임금 때의 명나라 사신(드라마 “대왕세종” 참고)


 

그래서 사신들의 숙소인 태평관 앞에 화산붕을 설치하고 불꽃놀이를 실시했다. 사신들의 반응이다.

 

태평-관(-館) :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와서 머무르던 숙소. 지금의 서울 태평로에 있었다


 

"유천은 흥미있게 보다가 놀라 들어갔다.

 

다시 나오기를 두 번이나 했고 황엄은 놀라지 않는 체하였으나 낯빛은 약간 흔들렸다."

양로연을 마친 정조가 화성행궁의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마치고 불꽃놀이를 하는 광경을 담은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의 일부입니다. 땅속에 화약을 묻어 터뜨리는 방법으로 일종의 매화법(埋火法)으로 불꽃이 지상에서 수십 미터 높이까지 치솟아 올랐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후에도 화약의 개량작업이 계속되면서 조선의 화포가 명나라를 능가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세종13년(1431년) 10월15일 세종이 신하들에게 사신이 왔을 때 화포를 보여주어야 할 것인지를 묻자 의정부 찬성으로 있던 허조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허조 (고려·조선 문신) [許稠] 1369(공민왕 18)~1439(세종 21).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郞) 윤창(允昌)이며,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전의시승(典儀寺丞)에 임용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건국 후 좌보궐·성균전적·이조정랑·집의·경기도관찰사·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 초기 예악(禮樂)·과거·도량형 제도의 정비와 유교적 윤리관의 확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407년(태종 7) 명나라에 가서 여러 제도 및 공자묘(孔子廟)를 자세히 조사하고 돌아와 조선의 문묘에 원대(元代) 주자학자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한대(漢代) 유학자 양웅(揚雄)을 제외시켰다. 1411년에는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 상제(喪制)를 정했으며, 1418년 세종 즉위 후에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시행하게 했다. 또한 1422년(세종 4)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하여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간 복무하게 했으며 연좌제를 금지했다. 1423년에는 〈속육전〉 편찬에 참여하여 1430년 이를 완성했다. 과거제 역시 사장(詞章) 중심을 배격하고 배송강경(背誦講經)을 주장했다. 한편 1393년에 만든 주척(周尺)을 1430년 새로이 교정하여 양전법(量田法)의 기준을 삼게 했다. 1438년 우의정·영집현전춘추관사·세자부가 되었으며 이듬해 좌의정·영춘추관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본국(조선)의 화포의 맹렬함이 중국보다 나으니 사신들에게 이를 보여주어서는 안됩니다." 국가기밀 사항이었던 것이다.


물론 예전부터 해오던 행사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었다.

 

두어 달 후인 12월24일 허조는 "앞으로는 사신이 화붕을 보려고 할 때에 한해 잠깐 설치하여 보여줌으로써 화약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자 세종은 허조의 말을 옳게 여기면서 이렇게 답한다.

 

"사신이 (제대로 된) 화붕을 보게 되면 만일 중국에서 변고가 있어서 조선의 화약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것을 거부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두려운 일이다. 경의 말이 매우 옳으니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이후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는 화붕을 자제한 반면 일본이나 유구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는 맘껏 쏘았다.

 

류큐 왕국 [유구국流球國/琉球?]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류큐 제도에 있었던 왕국이다. 당시 정식 명칭은 유구국(流球國)이었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조선 등과의 무역으로 번영했으며, 무역에 참여한 류큐의 상인들은 결속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포르투갈 상인의 기록이 있다.


[역사]

이 부분의 본문은 오키나와의 역사입니다.

류큐 왕국은 1429년, 제3대 쇼하시 왕의 미야마 통일(三山統一)에 의해 성립되었다.


[건국]

14세기부터 오키나와 일대에는 왕권이 약해지고 각지에 왕을 자처하는 안지(지방호족)들이 생기면서 나카야마(中山), 키타야마(北山), 미나미야마(南山)의 미야마(三山)시대가 시작된다. 세 나라는 미나미야마의 쇼하시에 의해 통일되어 류큐 왕국이 세워진다.


 

명나라처럼 외교문제가 생길리 없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특히 불꽃놀이를 좋아했다.

 

세조8년 2월28일 유구국 사신이 궁궐 뒤뜰에서 관화하던 중 이런 조언을 했다.

 

"화포가 맹렬하여 천하에 비할 데가 없으나 다만 불꽃의 빛깔이 붉은색 일변도인 것이 아쉽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연거도의 일부입니다. 정조가 화성에 행차한 후 야간군사훈련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한 가운데 솟아 오른 것이 불꽃놀이의 모습입니다. 조선 정조 때 이의평(李義平)이 쓴 일기체 기행문인 화성일기(華城日記)를 보면 이것을 신기전(神機箭)의 모습이라 하였습니다.<ⓒ2007 규장각 소장>


 

놋쇠가루와 녹나무(樟木) 기름을 합하여 사용하면 불꽃의 빛깔이 흰색을 낼 것입니다." 유구국의 화포실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다.

 

녹나무 (식물) 녹나무과(―科 Lauraceae)에 속하는 상록교목.

제주도에서 자란다. 키는 20m 정도이고 어린가지는 황록색이다. 잎은 어긋나고 광택이 나며 3개의 잎맥이 나란히 나 있고, 어린잎은 약간 붉은색이 돈다. 꽃은 5월에 새로 나온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무리지어 피고 처음에는 하얀색을 띠지만 노란색으로 바뀌며, 꽃덮이조각은 6장이다. 수술은 12개가 4열로 배열되어 있는데 제일 안쪽의 수술에는 꽃가루가 없다. 꽃밥은 수술대 한가운데에 있으며 널따란 뚜껑이 열리듯이 터진다. 둥그런 열매는 10월에 보랏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익는다. 목재·가지·잎·뿌리를 수증기에 증류하여 만드는 장뇌(樟腦)는 강장제나 흥분제로 사용하는데, 주사약으로 만들어 호흡중추·혈관신경중추·심장 등의 자극제로 쓴다. 방충제·방부제·향료의 재료로도 이용하며 목재는 건축재나 가구재로 쓴다.



세조의 불꽃놀이 사랑은 불꽃놀이 장비와 장소의 다양화로 나타났다.

 

세조10년(1464년) 1월4일 새해를 맞아 경복궁 후원에서는 화산붕을 설치해 불꽃놀이를 실시하는 한편 북악산 정상에도 직상화(直上火)라는 최신 소형대포를 쏘았고 불화살(火箭)까지 함께 발사함으로써 일대장관을 이뤘다.

 

거침없는 세조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행사였다.


국가 행사로서 불꽃놀이의 쇠퇴는 성리학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성종 때 오면 신하들은 군사훈련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불꽃놀이를 자제해줄 것을 거듭 청한다.

 

성종은 워낙 불꽃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하들의 청을 거부하다가 결국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때부터 불꽃놀이는 임금의 개인적 유희로 전락했다.


연산군을 지나 중종32년(1537년) 다시 명나라 사신들에게 불꽃놀이를 공개하는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때 신하들은 이미 "명나라 사신이 불꽃놀이를 관람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굳이 보여 달라고 청하면 거부하기는 어려우니 소소하고 긴요하지 않은 화포만 쏘고 기밀에 속하는 화포는 쏘지 말게 하소서"라고 청하고 있다.

 

이후 명종 때 한번 불꽃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더 이상 한양의 밤하늘에 성산화(星散火)는 빛나지 않았다.

 

성산화(星散火) 불꽃놀이의 일종으로 요즘 볼 수 있는 하늘에 수를 놓는 불꽃놀이와 비슷한 형태이며, 화포에 장착해서 쏘아 전시에도 신호용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도.

 

불꽃놀이의 쇠퇴에 성리학의 번성이 영향을 준 때문이다.

(이한우)


출처 : 석굴암
글쓴이 : 조선통신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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