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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만년 전 신비의 화폭, 반구대 암각화

깜보입니다 2012. 5. 9. 09:31

반만년 전 신비의 화폭, 반구대 암각화  관련이미지

반만년 전 신비의 화폭, 반구대 암각화


"우리 조상의 기원 알 수 있는 문화유적"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盤龜臺)는 사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업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새창)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의 반구대(盤龜臺)는 사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업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3천여 년 전(3000~5000년 전으로 추정), 누군가 바위 위에 그림을 그렸다. 사람은 물론이고 고래, 사슴, 호랑이, 멧돼지, 물고기 등. 과연 이 그림들은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까?

3천여 년 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주 먼 아득한 옛날이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바위에 그림을 그린 것도 신기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이 많은 그림들이 바로 울주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285)다. 20여 곳이 넘는 우리나라 암각화 중에서 가장 처음 시작된 곳이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의 서북쪽으로부터 26Km 떨어진 대곡천에서 발견되었다. 주변의 절벽 중 그림이 그려진 곳은 비교적 반반한 병풍 같은 바위 면이다.

전체 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로 대형 그림이다. 암벽 밑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무려 3.7m인데 유형별로 살펴보면, 사람을 비롯 육지동물, 바다동물 등 300여 점에 이른다.

반구대(盤龜臺)는 언양 대곡리의 사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업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산(265m)의 끝자락이 뻗어내려와 우뚝 멎은 곳에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솟아있고, 돌틈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그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대곡천(大谷川)의 맑은 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로 주로 물고기와 고래의 모습이 보인다. (새창)
▲ 반구대 암각화로 주로 물고기와 고래의 모습이 보인다.



"물 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

"물 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 1965년 겨울, 동국대 불교사적 조사팀은 마을의 한 아이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물속에 잠긴 암각화를 발견했다. 이렇게 발굴된 울주 반구대 암각화에는 유난히 고래그림이 많다. 당시 고래잡이가 널리 성했다는 증거다. 또 우리가 이 고래그림에 주목할 만한 이유는 당시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

그럼 먼 옛날 사람들은 고래를 어떻게 잡았을까? 3천년 전 시간 속으로 고래잡이를 떠나보자.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바다동물은 모두 64점, 그 중 고래그림은 58점이다. 고래, 개, 늑대, 호랑이, 사슴, 멧돼지, 곰, 토끼, 여우, 거북, 물고기, 사람 등으로 총 75종에 200여 점이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새창)
▲ 울주 반구대 암각화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그림 속 고래들을 보면 특징이 정확하다. 새끼 고래를 업고 있는 귀신고래, 머리가 사각형인 향고래, 아래턱에서 배꼽 뒤쪽까지 주름이 많은 혹등고래 등 종류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섬세하다. 이렇게 고래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고래를 잡았다는 증거일 터.


특히 해체한 고래그림은 투시적 표현으로서 오늘날의 고래해체 순서와 같다는 점으로 볼 때 당시 어로기술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로기술을 보여주는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먼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배가 떠나기 전, 오늘도 고래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주술사가 신에게 정성 가득한 기원을 올린다. 선서시대의 주술적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래잡이배에 탈 사람들은 모두 18여 명.

배의 한 쪽에는 고래를 잡기 위해 갈고 닦은 날카로운 돌작살이 묶여 있다. 드디어 고래 떼가 몰려오자 사람들은 용감하게 고래와 맞서 싸운다. 고래가 지칠 때까지 공격을 거듭하다 결정적인 순간! 고래의 심장부에 정확하게 작살을 꽂는 기술도 짐작할 수 있다.

잡은 고래를 끌고 마을로 돌아와 한바탕 잔치라도 벌였을 반구대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고래잡이의 과정을 바다가 보이는 이 바위에 누군가 하나씩 새겨 놓았던 것이다. 고래를 잡으려면 태화강을 따라 장생포까지 가야했는데 배가 필수였다.

숲에서 베어온 나무를 쪼개고 속을 파내서 만든 통나무배를 이용했다. 바로 조선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고래와 사슴이 겹쳐서 보인다. 바로 사슴은 고래를 잡아야 하는 선사인들에게 자연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의 자연신앙을 엿볼 수 있는 단서다.

여기에 또 다른 그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이 시작된다. 반구대 사람들 역시 정착 생활을 했다는 증거로 수렵그림을 암각화에 새겨놓았다. 큰 고래도 잡았으니 육지동물도 잡았을 것이다.

암각화 전체 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로 대형 그림이다. 암벽 밑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무려 3.7m인데 유형별로 살펴보면, 사람을 비롯 육지동물, 바다동물 등 300여 점에 이른다. (새창)
▲ 암각화 전체 크기는 가로 약 8m, 세로 약 2m로 대형 그림이다. 암벽 밑에서 윗부분까지의 높이는 무려 3.7m인데 유형별로 살펴보면, 사람을 비롯 육지동물, 바다동물 등 300여 점에 이른다.


이번에는 드넓은 들판으로 가 보자. 3천여 년 전, 어로와 수렵생활을 하며 살았던 선사시대 사람들. 과연 그들은 이 드넓은 산과 들에서 무엇을 잡아 먹으며 살았을까? 반구대 암각화에 가장 많이 표현된 육지동물은 바로 사슴이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이 시대의 사냥법이 무척 계획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팔을 부는 몰이꾼이 사슴을 요령있게 몰아주면 활을 든 사냥꾼이 때를 놓치지 않고 활을 쏜다. 사냥꾼 앞에는 사슴이 여러 마리가 있는데 집단적으로 사슴사냥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멧돼지와 같은 동물은 직접 만든 칼을 들고 용감하게 싸워서 잡기도 했고, 돼지나 사슴 같은 동물들을 울타리 안에 미끼로 넣어 호랑이 같은 힘센 동물들을 유인하기도 했는데 울타리 안에 돼지와 사슴이 있는 그림은 당시에 이미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고 호랑이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어로기술 만큼 당시의 사냥기술도 점차 발달되는 단계였다. 반구대 암각화는 같은 시기에 한꺼번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다. 지각변화가 일어나고 바다가 육지로 변하는 동안 조금씩 그려진 선사미술의 대표 작품인 셈이다.

소박한 이 그림들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 그림 속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이 꾸었던 꿈도 함께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이곳에 살며 그림을 그렸을 먼 옛날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3천여 년 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역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짐작케 하는 문화유산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다.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임신한 모습 등으로 표현했다. 다산을 갈망하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부분이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도 묘사되었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유추는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1965년 동국대 불교사적 조사팀은 마을의 한 아이로부터 물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암각화를 발견했다. (새창)
▲ 1965년 동국대 불교사적 조사팀은 마을의 한 아이로부터 물속에 고래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암각화를 발견했다.


반구대암각화, 다섯 단계에 걸쳐 제작됐다

한편 반구대암각화가 다섯 단계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는 논고가 2011년 12월 9일 발표돼 화제를 모았다. 한국암각화학회가 반구대암각화 발견 40주년을 맞아 서울 국민대학교에서 개최하는 학술토론회에서 한국선사미술연구소 이하우 소장이 '몇 번을 거듭한 것일까? 반구대암각화의 제작'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다.

이 논고는 옛사람들의 간절했던 삶의 모습을 담긴 반구대암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장은 반구대암각화는 대체로 다섯 단계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이해된다며, 제작의 첫 단계는 작살이라든지 배와 같은 것이 조사되는 걸로 봐서 신석기시대 후기로 생각되는 유적으로 여겨진다고 밝혔다. 전반적으로 이어지는 층위는 그것이 청동기시대의 여러 단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판단했다.

논문에서 암각화의 특성을 제1제작층은 고래사냥과 관련된 어로활동의 표현, 제2제작층은 생태관찰력이 잘 표현되고 유사성을 확보해 동종주술을 꾀하는 층위라고 밝혔다.

또 제3제작층은 동물번식, 풍요기원에 대한 인식, 신성시된 사슴이 주가 되며, 제4제작층은 어로활동과 관련된 주술과 회생의식의 층위, 제5제작층은 동물번식염원에서 비롯된 수렵의 금기와 관계된 특별한 동물이 표현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층별 현상에서 나타난 층간의 시간적 간격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암각화라는 표현수단을 도구로 지닌 유사한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적어도 그 환경이 지속하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자명하다고 밝혔다.



* 출처: e뮤지엄 / KTV한국정책방송원(행정정보DB) / 문화재청 / 울주군청

 

>https://www.knowledge.go.kr/jsp/theme/themeView.jsp?themeIdx=19167&dir=al&page=1&searchOption=all&searchValue=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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