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선사道義禪師와 진전사지부도
진전사지를 몇 차례 다녀오고 도의선사에 대한 글을 썼으면서도 아직 도의선사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느껴 도의선사에 대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헌 제 1조와 제 6조에 의하면 우리 조계종曹溪宗은 도의국사를 초조初祖로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선사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탑비문에 전해지는 몇 기록과 조당집 등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 도의선사에 대한 글은 링크한 <선종의 신라 전래에 대한 소고>참조
http://blog.naver.com/seongho0805/150071944221
대표적인 도의선사의 소개에 글인 조당집에는 건중建中 5년(784년) 입당하여 오대산을 참배하고 운수행각을 한 후 보단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조계산 육조 혜능의 조사당을 참배하고 서당지장을 지도를 받고 득도하여 인가를 받으면서 도의道義라는 법명을 받은 후 백장회회를 방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조당집 2/동국대학교 역경원/238쪽) 조당집에는 “그 밖의 것은 비문과 같다(餘如碑文)”이라고 하고 있어 도의를 행적을 적은 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록은 고승비문에 기록된 단편적인 기록뿐이다. 고승비문에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설악산에 은거했다는 기록(지증대사비문,보조선사비문)과 북산에는 도의가 남악에는 홍척이 있었다는 기록(지증대사비문), 진전사에 있는 영탑을 예배하고 진영을 참배했다는 기록(비로사 진공대사비문)이 있고 체징과 중국에서 만나 같이 부처님 법을 배우다 도의가 먼저 왔는데 후에 체징이 귀국했을 때 흥덕대왕이 도의와 체징을 두 보살로 칭송했다는 기록(진감선사비) 등이 있다. 이런 비문의 기록은 단편적이어서 도의선사의 행적을 복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그간 조계종 종조宗祖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 도의에 대한 연구 논문은 그리 많지 않다. 2010년에 출간된 <도의국사 연구>라는 책에 있는 논문이 도의에 대한 연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도의와 도의에 관련된 논문은 2003년에 발표된 <元寂 道義의 생애와 禪사상/정동락>,<신라도의국사부도의 연구/정호영> 그리고 단행본으로 2005년에 출간된 <도의국사와 진전사/정호영> 정도이고 기타는 선종사禪宗史에 관련하여 나온 부분적인 언급 정도다.
이런 자료로 도의의 행적과 사상을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가 보여준 선사상과 영향 그리고 가지산문의 발전과정에 대한 것은 본인의 영역이 아니므로 다루지 않기로 한다. 또한 본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지금 진전사지에 있는 부도가 ‘도의의 부도인가’하는 문제와 탑비가 존재했는가 그리고 언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것이므로 그에 대한 것을 중점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도의가 왜 진전사로 들어갔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우선 기존의 종파인 화엄종과의 불화설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비문에 나와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822년에 있었던 김헌창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경주로 갈 수 없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그를 후원해줄 세력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의국사 연구/85-87쪽)이런 여러 설중에서 김헌창의 난과 연관성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김헌창은 명주도독이었던 김주원金周元(무열왕 6세손)의 아들이다. 김주원은 선덕왕 사후 왕위 계승서열 1위였으나 김경신(38대 원성왕/내물왕 12세손)의 정변으로 명주(현 강릉)으로 내려와 있었다. 이런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김헌창은 무열왕계의 대표로서 시중까지 올랐으나 반대파에 의해 물러난 후 무진주, 청주, 웅주도독을 지낸 후 웅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무진주는 현재 전라도 광주지역이고 웅주는 현재 공주지역이다.
여기서 김헌창의 관할지역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곳은 중국과의 중요한 교통로였던 지역이다. 따라서 도의가 중국에서 돌아왔다면 전라도나 충청도 어느 곳으로 들어왔을 것이고 이런 소식이 김헌창에게도 들어갔을 것이다. 따라서 고승에 대한 예우로 김헌창의 배려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그가 보조선사나 지증대사 비문에 기록된 것처럼 기존 화엄종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나타내자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후 경주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 세력이 김헌창과의 관계를 빌미로 배척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결국 김헌창의 아버지인 김주원의 배려로 설악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진전사에 들어간 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쌍계사 진감선사비문에 <태화 4년(830, 흥덕왕 5년)에 귀국하여 불교의 최상승 도리로 우리나라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편지를 보내 환영하고 위로하며 “도의선사가 전날에 이미 돌아왔고, 스님께서 이어 돌아오시니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적에는 흑의이걸黑衣二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누더기를 입은 뛰어난 스님을 친견하니 하늘에까지 이름이 가득한 자비스런 위엄이 있어 온 나라가 기쁘게 기대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 땅에 상서로운 곳을 만들겠다.” 하였다.>(교감역주 역대 고승비문 : 신라편/143쪽)
이 글을 보면 도의가 귀국한지 9년 째 되는 때인 830년에는 도의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선사의 반열에 올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때까지는 도의가 생존해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의의 생몰년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정해보면 20세 쯤 입당하였다면 37년간 중국에 있다가 귀국한 해가 821년 이므로 이때 57세 전후가 될 것이다. 입당시기가 조금 늦었다고 해도 60세 쯤 되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선사들이 당시 사람들보다는 장수하여 70세 이상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830년에는 70세 쯤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의는 830년 이후 가지산문의 2대조인 염거가 입적한 844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가지산문을 개창한 체징의 비문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체징 비문에는 염거선사가 도의를 법을 이어 억성사에 주석하였고 체징이 억성사로 가서 그를 섬겼다고 했다. 체징이 도의선사가 살아있었다면 체징이 도의를 직접 뵈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체징은 837년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이전 몇 년간 염거선사를 모셨을 것이므로 30년을 조금 지난 때 입적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도의는 830년에서 835년 사이에 입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진전사에 있는 부도가 도의의 부도인가는 다음 비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로암 진공대사보법탑비문에는 진공대사가 설악산으로 찾아가 서당西堂의 법을 우리나라에 전한 OO대사의 유허를 답사하고 영탑에 예배하고 진영을 추모하며 제자의 의식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 고려편 1/117~8쪽)여기서 OO대사는 문맥상으로 도의를 의미한다고 주)에서 밝히고 있다. 이때가 진공대사가 구족계를 받은 874년 이후이므로 이전에 부도와 진영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로 볼 때 초기에 도의가 전법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830년 이전에 회복하여 제대로 전법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염거라는 제자를 키울 수 있었고 체징이 염거에게 배운 후 도의를 앞세워 가지산문을 개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체징은 자신의 불안한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오히려 체징이 도의를 앞세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조범환은 그의 논문 <신라 하대 도의 선사의 설악산문 개창과 그 향배>에서 중국에서 돌아온 후 고향인 웅진(현 공주)근처의 장곡사에 머물렀지만 무염이 개창한 성주산문에 밀려 무진주(현 전주) 황학사로 이거했다고 한다. 즉 자기고향에서조차 법문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위상이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체징은 도의를 끌어들여 산문의 위상을 높이려 했고 추후에 나라에서 육조혜능이 주석했던 보림사寶林寺와 같은 절 이름을 내림으로서 추인을 해주었던 것이라는 것이다.(도의국사 연구/101-2쪽)
이런 사실은 체징이 활동할 즈음에는 도의라는 존재는 거의 선법을 우리나라에 전한 조사祖師로서의 위상을 찾고 있었던 것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비로사 진공대사비에 나오는 OO대사 역시 도의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확인할 사항은 탑비의 존재여부이다, 탑비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비로사 탑비문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정영호의 <양양 진전사 유적조사>에 의하면 탑비는 최초 이곳을 조사할 때도 없었다. 진전사지역은 수복지역이라 조사가 없었다가 1965년 진전사지에 있는 탑을 신흥사로 이건하려는 시도가 있어 급하게 조사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정영호가 급히 내려가 조사한 결과를 부도는 도괴되어 있었고 탑은 되괴되기 직전 상태였다고 한다.
이것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여 급하게 탑을 국보로 부도를 보물로 지정하고 후에 다시 복원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1968년 해체 복원이 완료된 것이라 한다. 복원 당시 삼층석탑 초층탑신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고 구슬 1개만 발견되었고, 부도 역시 이때 복원한 것이다.
정영호의 <신라도의국사부도 연구>에 의하면 부도 탑신 받침에서 사리공이(26.5cm*29cm*9.5cm)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화장이라는 장법이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초기 선사들의 비문에서도 화장을 하였다는 기록이 신행(704-779)의 비문에 있는데 화장하고 36년 만에 진영을 그리고 부도를 세워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교감 역주 역대고승비문 : 신라편/65,67쪽) 그러나 그 이후의 선사들에게서 화장을 했다는 것은 흥령사 징효대사 비문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부도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화장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사리공의 깊이가 낮다는 것이 특이하다. 다른 사리공은 깊고 사리기가 집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사리기가 들어갔을지 궁금하다.
또한 탑비의 이수가 부도가 있는 서쪽 사면 아래서 발견되어 부도 서쪽 공터를 발굴한 결과 적심석과 강회다짐이 발견되어 탑비가 부도 서쪽에 세워졌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것으로 조당집에서 말한 “그 밖의 것은 비문과 같다(餘如碑文)”는 것이 비문을 기본으로 썼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또한 조당집에 나오는 원적元寂이라는 법명은 혹시 시호諡號가 아닐까 한다.
추 기
<양양 진전사 유적조사>에 있는 조사 당시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탑에 있는 사리장치는 일본인이 훔쳐간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출입을 하지 못하게 하여 사리장치의 모습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부도도 당일 탈취한 것인데 전체를 보물을 탐색하느라 기단까지 완전히 도괴시킨 것이라 한다. 부도 상부의 보주는 현장에서 수습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이장이 계곡에서 발견한 것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라 한다.
그리고 부도가 시원 양식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양식상의 시대 검토는 다음 번 기회에 가지려 한다.
참고문헌
도의국사 연구/김광식 엮음/인북스/2010년
조당집 2/동국대학교 역경원/2004
元寂 道義의 생애와 禪사상/정동락/한국중세사학회/한국중세사연구 14/2003년 4월
襄陽 陳田寺址 遺蹟 調査/정영호/역사교육연구회/역사연구 11,12/1969년 4월
新羅道義國師浮屠의 硏究/정영호/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신라문화재 학술발표논문집 24/2003년 2월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이지관/가산문고/1994년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1/이지관/가산문고/1994년
김헌창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7377
김헌창의 난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3g2089a
김주원 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8161
'문화유산e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빛의 예술 나전칠기 (0) | 2013.01.16 |
---|---|
[스크랩] 별을 향한 우리 조상의 경외심과 탐구 정신 (0) | 2013.01.15 |
(펌)범종 (0) | 2012.12.21 |
(펌)회룡포 (0) | 2012.12.21 |
[스크랩] 천신과 지신에게 근본에 대해 보답하다 (0) | 2012.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