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고구려비서 '영락칠년' 판독..광개토왕대 건립"
발견 40주년을 맞은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서 제작 시기를 유추할 연호인 '영락칠년'(永樂七年) 글자를 판독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0일 비석 전면 상단에서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문구를 확인했다며 "비석은 397년(영락칠년) 혹은 이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발견 40주년을 맞은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에서 제작 시기를 유추할 연호인 '영락칠년'(永樂七年) 글자를 판독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0일 비석 전면 상단에서 '영락칠년세재정유'(永樂七年歲在丁酉)라는 문구를 확인했다며 "비석은 397년(영락칠년) 혹은 이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즉 충주 고구려비는 학계에서 유력하게 검토한 장수왕(재위 413∼491)이나 문자왕(재위 491∼519) 시기가 아니라 광개토왕(재위 391∼413) 때 건립됐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또 다른 광개토왕비가 되는 셈이다. 영락은 광개토왕 연호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알려진 충주 고구려비는 사면에 글자를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멸이 심해 읽어내기 힘든 글자가 많은 상황이다.
이에 고 연구위원은 비석을 디지털카메라로 분할 촬영한 사진과 탁본 정밀 촬영 사진, 3D 스캐닝 자료,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을 비춰 사진을 찍는 RTI 촬영 데이터를 확보해 글자를 분석했다.
우선 고(故) 이병도가 꿈에 나타났다는 글자를 근거로 '건흥사년'(建興四年)으로 판독한 부분을 재검토했다. 이곳을 그는 비신(碑身)의 명칭에 해당하는 제액(題額)으로 봤다.
고 연구위원은 자료의 기술적 처리가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전면 상단부에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영락칠년세재'(永樂七年歲在) 글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정유'(丁酉)는 재(在) 왼쪽에 가로가 아닌 세로로 새겼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로쓰기와 세로쓰기 방식을 혼합하는 경우는 고대 간독(簡牘·글씨를 쓴 대나무나 나무 조각)과 서간문 등에서는 보이지만, 금석문에서는 흔하지 않은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락칠년세재정유'처럼 연호와 간지를 기재한 방식은 광개토왕비에 나오는 '영락오년세재을미'(永樂五年歲在乙未)나 국보로 지정된 고구려 금동불의 '연가칠년세재기미'(延嘉七年歲在己未)와 비슷하며, 이렇게 판독할 경우 본문의 '오월중'(五月中)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덧붙였다.
고 연구위원은 또 전면 제7행 15∼22자를 그동안 '십이월이십삼(또는 오)일갑인'(十二月이십<甘에서 세 가로획 중 중앙 가로획을 뺀 글자>三(五)日甲寅)으로 읽었으나, '십이월이십칠일경인'(十二月이십<甘에서 세 가로획 중 중앙 가로획을 뺀 글자>七日庚寅)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397년 음력 12월 27일의 일간지가 '경인'(庚寅)이라고 부연했다.
아울러 좌측 제3행 7자 부분 이하에서 '신유년'(辛酉年)으로 알려진 부분도 '공이백육십(사)'(功二百六十(四)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만 고 연구위원은 판독 결과에 대해 "또 다른 부분에서 간지가 드러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그는 충주 고구려비 연구 성과를 22일 서대문구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서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