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향비(埋香碑)- 매향 향나무를 묻다
당신은 100년, 아니 1000년 뒤를 생각하며 어떤 일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그 일은 지금이 아닌 나의 다음 생을 위한 것이다. 저 먼 훗날의 그 누군가를 위한 일이자,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삶을 위한 일이다.
그 일을 한 사람들이 있다. 고려 충선왕 때인 1309년 8월, 강원 고성의 삼일포. 지역 관리·스님·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향나무를 바닷가 곳곳에 묻고 그 과정을 기록한 비석을 호수변에 세웠다. 35년 뒤인 1344년 8월, 이번에는 전남 영암군 엄길리에서 스님과 주민들이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은 뒤 인근 철암산의 큰 바위 작은 틈에 그 경위를 새겨놓았다. 고려 왕조가 쇠퇴하며 새 세상을 향한 열기가 꿈틀거리던 1387년 8월,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서도 4100명이 모여 역시 향나무를 갯벌에 묻고는 전후 사정을 담은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워놓았다.
이들처럼 향나무를 묻고(매향) 그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은 비석(비)이나 바위(암각)를 매향비(埋香碑)라 한다. 지금까지 전국에서 10여기가 발견됐다. 비석은 없어지고 탁본만 있거나 문헌기록에 나타난 것까지 합하면 20여기로 추정된다. 고려 말~조선 초에 주로 세워진 매향비는 역사적·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소중한 금석문 문화재다. 그런데 왜 향나무를, 하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묻었을까, 향나무를 갯벌에 묻는 매향의례를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 매향비를 아시나요? 10여기 현존
고려 말에서 조선 초, 해안가 갯벌에 향나무를 묻은 사람들…
그들은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10여기의 매향비(암각)를 시대별로 보면 고려시대 매향비로는 ‘사천 흥사리 매향비’ ‘영암 엄길리 매향비(암각)’가 대표적이다. 이들 매향비는 각각 보물 614호·1309호로 지정돼 있다. 또 전남 영광의 ‘법성 입암리 매향비’, 충남 당진의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암각)’ 등도 있다. 특히 ‘법성 입암리 매향비’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각 매향의례를 치르고 새긴 명문이 함께 있다.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에는 시기가 다른 매향 기록이 보인다.
이들보다 시기가 훨씬 앞선 매향비인 강원 고성의 ‘고성 삼일포 매향비’는 안타깝게도 비석은 사라지고, 그 탁본만 남아 있다. 이 밖에 평북 정주, 의주 등에도 고려시대 매향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비석인 ‘영암 정원명 석비’(전남 영암)도 일부에선 매향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지만 비문이 닳아 비석 성격을 명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매향비로는 전남 해남의 ‘해남 맹진리 매향비(암각)’, 섬에서 발견된 신안의 ‘신안 암태도 매향비’, 영암의 ‘영암 채지리 매향비’, 장흥의 ‘장흥 덕암리 매향비(암각)’, 경남 사천의 ‘삼천포 매향비(암각)’, 충남 예산의 ‘예산 효교리 매향비(암각)’ 등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전남 무안 등의 매향비가 알려져 있으며, ‘삼천포 매향비(암각)’는 1418년 매향의례를 한 뒤 세웠는데 한 해 전의 매향의례도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함께 모여 매향의례를 치르고 매향비를 세운 사람들은 누구일까. 매향비 비문을 분석하면, 그 주체는 지역 주민과 일부 스님이다. 물론 지방관리가 동참한 경우도 있다. 지역 주민들은 자체 조직인 ‘향도(香徒)’나 ‘계(契)’의 일원으로 매향의례에 참여했다. 향도, 계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부터 신앙생활이나 마을의 공동사업, 상호부조, 친목도모 등 다양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조직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이 변하기도 했지만 공동 목적을 위해 만든 주민들의 조직체다. 그 구성원은 10여명에서 수천명에 이르는데, 실제 매향비에 나타난 참여인원도 그렇다. 1387년 세워진 ‘사천 흥사리 매향비’에는 무려 4100명이 참여했다.
매향비의 형태는 대부분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고, 크기도 높이 1m 내외다. 바위의 경우엔 주로 산속에 있되, 눈비가 들이치지 않거나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 명문을 남겼다. 영암 엄길리, 해남 맹진리 경우가 전형적이다. 다만 ‘당진 안국사지 매향비(암각)’는 고려시대 사찰터에 남아 있다. 배 모양을 닮아 ‘배바위’라 불리는 큰 바위에 새겨졌다. 매향비의 서체는 해서·행서·전서 등인데 대부분 투박하고, 글자 크기도 일정하지 않아 당시 지방의 문자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매향비는 민중들의 생활처럼 소박하다.
■ 간절하게 꿈꾼 더 나은 삶, 세상…
먼 미래에 올 미륵불에게 올린 귀한 공양물 침향…
민중들은 갯벌에 향나무를 오랜 세월 묻어두면 침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매향비들이 세워진 장소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이 있다. 고려·조선시대 모두 해안지역이다. 구체적으로 바닷물과 민물이 합쳐지는 갯벌 주변이다. ‘사천 흥사리 매향비’처럼 지금은 간척사업 등으로 지형이 변했지만 세워질 당시엔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들이다.
왜 굳이 갯벌에, 하필 향나무를 묻었을까. 당시 민중들의 불교신앙과 관계가 깊다. 불교에서 향은 차·등(초)·꽃·과일·쌀과 함께 ‘육법공양(六法供養)’으로 불리는 중요한 공양물이다. 향은 등불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깨달음·해탈의 향기라는 상징성을 지녔다. 불교가 들어온 이후 좋은 향은 사찰은 물론 지배계층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침향(沈香)이 그러했다. 침향은 은근한 향기가 나는 목재로 역사서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는 침향목으로 사리함을 만들거나 불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신라 흥덕왕 대에는 수입품인 침향을 신분에 따라 사용을 제한하기도 했다.
100년, 1000년 후의 누군가를 위한 그들의 행동은
오늘의 곤궁한 삶을 위로받고 더 나은 세상을 열려는 몸부림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투박한 글씨로 새겨진 ‘매향’의 기록…
그 안에 그들의 열망이 담겨 있다
침향은 민중 불교의 상징인 미륵신앙 속에서 미륵불에게 올리는 귀한 공양물로 여겨졌다. 미륵신앙의 근본경전 중 하나인 <미륵하생경> 등 불경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불 열반 후 56억7000만년이 지나 출현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차례의 설법으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부처다. 그 미륵불의 세계(용화세계)는 평안함 속에 지혜와 기쁨이 넘치며 온갖 꽃이 피어나는 이상적 낙원이다. 삼국시대부터 민중들 사이에선 이상세계인 용화세계에 살아가기를 염원하며 미륵불을 경배하는 미륵신앙이 퍼졌다. 나라와 사회가 혼란스러워 현실의 삶이 힘들수록 민중들은 미륵세계를 열망했다. 더 나은, 새로운 세상인 미륵세계는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겐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민중들은 그 미륵불에게 침향을 공양하고자 했고, 향나무를 바닷물·민물이 만나는 곳에 오랜 세월 묻어두면 침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묻어두는 그 시간이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1000년에 이른다. 따라서 침향을 위해 향나무를 묻는 매향의례는 그 자체가 민중들의 정성 가득한 공양의례였다. 실제 향나무를 땅속에 묻을 경우 썩어 없어지지만 공기가 통하지 않는 갯벌 속에선 온전히 보존된다. 갯벌·습지유적에서 고대 선박이나 목제품 등 수천년 전 문화재들이 지금도 거의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는 이유다. 갯벌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향나무는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물에 넣으면 가라앉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안지역에 매향비가 많은 것은 향나무를 묻을 갯벌도 이유지만 해안가 사람들 삶이 상대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고려 말~조선 초의 해안지역은 관리들 수탈은 물론 왜구들의 노략질이 심했다. 더 어려워진 곤궁한 삶, 미래에 대한 불안은 미륵불을 찾아 기대게 만들었다. 매향비들이 주로 세워진 시기도 바로 이때다.
지금 전해지는 매향비들은 당시의 매향의례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문화유산이다. 매향비 비문들 곳곳에는 미륵세계에서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이 엿보인다. 더욱이 매향의례는 자신을 위해 공덕을 쌓는 일이기도 하지만 수백년, 1000년 후의 누군가를 위한 거룩하고 성스러운 행위이기도 했다. 더 나은 세상이 열리기를 희망하는 몸부림이다. 매향비 내용을 보면, 참여자들은 매향의례를 통해 미륵세계와 연결됨으로써 지금의 힘든 삶을 위로받고, 더 나아가 지역 공동체와 나라의 안녕, 왕의 만수무강까지 기원하고 있다. 매향의례는 또 지역민들의 유대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지금도 영광 법성의 입암리 마을에서는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매향제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역사서나 불교 문헌들에는 매향의례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지역민, 특히 해안가 민중들의 민간신앙이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매향비는 더 소중할 수밖에 없다. 매향비는 당시 민간 불교신앙과 매향의례, 불교문화사는 물론 공동체 조직의 활동상 같은 지역사회사 연구 등에 있어서도 소중한 자료다. 하지만 학계는 물론 불교계의 연구는 미진하다. 고려시대부터 매향비는 해안가 곳곳에 전해져왔고,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가 ‘고성 삼일포 매향비’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향비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다. 매향비 연구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해준 공주대 명예교수가 답사와 사료연구 등을 통해 학계에 알리면서다. 이해준 교수는 “최근엔 불교계 안팎에서조차 매향의례와 침향이 지닌 본래의 참된 의미와 가치, 상징성은 잊어버리고 상업적인 침향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매향비가 앞으로 더 발견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해독 가능한 명문이 보다 많은 매향비가 더 나와 매향의례와 매향비, 침향을 둘러싼 연구가 더 활성화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소박한 매향비들이 ‘너는 더 나은 세상, 1000년 뒤 그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듯하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