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e이야기

부석사 조사당 벽화 보존처리

깜보입니다 2020. 6. 18. 09:37

부석사의 고려 벽화 최고 걸작 7년간 대수술 받는다

일제강점기 절 조사당 벽체에서 분리
석고 땜질 뒤 액자틀에 넣어 보관
최근 진단 결과 표면 변색과 균열 심각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26년까지 보존처리 작업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들이 부석사 옛 조사당 벽화의 표면을 안정화시키는 보양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부석사 옛 조사당 벽화 표면의 보양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습

 

‘쪼각쪼각 썩어버린 부석사 대벽화’

일제강점기인 1926년 10월6일치 <동아일보>에는 이런 제목의 문화재 훼손 고발 기사가 실려 당시 독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경북 영주군 부석면 봉황산에 있는 부석사 조사당에 두분의 보살과 네분의 사천왕상이 있는 동양제일의 진품 고려 벽화가 있는데, ‘작년(1925년) 5월에 (일본)동경 문부성 기사가 절에 가서 벽화를 목제함 속에 넣었던 바 그동안 부주의로 요사이에는 한조각도 쓸 수 없을만큼 전부 썩어버렸다더라’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부석사는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의 문화유산 에세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로 유명한 고찰이다. 썩어버렸다는 조사당 벽화는 무량수전 기둥, 대석단, 아미타소조상, 석등과 더불어 한국 불교미술사의 명작으로 꼽는 이 절의 보물들 중 하나로, 고려 벽화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부처를 양옆에서 수호하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은 우아한 귀부인의 자태로, 동서남북 사방을 호위하는 신인 사천왕(四天王)은 팔팔한 사나이의 기운찬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6폭에 나뉘어 그려진 이 불벽화가 <동아일보>의 고발기사가 나온지 96년만에 대수술을 받게 됐다. 최근 문화재 당국의 점검 조사 결과 표면 채색층의 훼손과 내부 균열이 매우 심각해진 상태임이 드러나 응급 수복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국내 사찰 벽화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기도 한 조사당 불벽화는 근대기 이후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6~18년 일본 문부성에서 파견된 수리기술자들이 600여년 묵은 6폭 벽화 화면 전체를 조사당 흙벽에서 뚝 떼어내 흰 석고를 여기 저기 바르며 균열을 땜질하고 6개의 덩어리진 액자 형태로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최신 문화재 수복 재료라고 여기고 석고를 붙였다고 추정되는데, 100여년 지나면서 균열이 되레 심해지고 석고도 백화 현상으로 변질되면서 그림 자체가 망가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난 2018년 이 벽화에 대한 첫 종합조사와 지난해 문화재청의 국가지정문화재 정기 조사에서 확연히 드러나 전면적인 수리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됐고 지난 2월 열린 문화재위원회가 보존 수복 조치를 의결했다. 이에 따라 여섯폭 벽화는 각기 여섯개의 밀봉 상자에 싸여 18일 사상 처음 절을 떠나게 됐다. 벽화는 이후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 산해 문화재보존센터로 옮겨져 벌레의 피해를 막기위한 긴급 훈증처리를 받은 뒤 정밀진단과 해체 수리 등의 대수술을 받게 된다. 관건은 일본인들이 당시 보수재료로 바른 석고를 얼마나 제거하고, 어떤 대체재료를 넣어 보수하느냐의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장성윤 문화재보존과학센터 연구관은 “100여년전 조사당 벽체에서 떼어내 석고를 바르고 액자틀 형태로 바뀐 벽화의 내부 구조부터 전혀 모르는 상태다. 일단 비파괴 검사 등을 통해 내부 구조와 석고의 침윤 정도부터 먼저 파악한 뒤 구체적인 보수 방식을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이 1910년대 콘크리트로 땜질했다가 20여년간 콘크리트를 걷어내는 해체 보수공사를 거쳐 최근 복원된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석탑와 비슷한 운명을 밟게 된 셈이다.

사실 옛 조사당 벽화의 보존 수복 문제는 문화재동네에서 오래된 이슈였다. 이미 1920년대 <동아일보> 등 언론에서 당시 벽화 수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낼 정도였고, 국내 문화재 학계도 90년대 이래 전면적인 보수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그럼에도 전면적인 보수 작업이 계속 미뤄진 데는 이유가 있다. 벽화 자체가 원래 사찰의 흙벽 위에 그려진 것으로 한국과 중국의 일부 사찰에서만 나타나는 희귀한 사례여서 회벽이나 나무에 벽화를 칠하는 서구나 일본의 수복 사례를 참고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었다. 또 벽화를 수복 보존하는 국내 학계와 업체의 기술적 역량이 최근까지도 미진해 섣불리 작업을 시작할 수 없었다는 점도 작용했다는게 문화재청과 학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벽화 수복 전문가인 한경순 건국대 교수는 “벽화의 전면 수리 보수가 뒤늦은 감은 있지만, 국내의 경우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벽화를 수리하고 보존하는 작업들이 진행됐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시기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연구소와 학계가 긴밀하게 연구 성과를 공유하며 가장 유효한 보수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노형석 기자, 사진도판 문화재청 제공

1989년 부석사 무량수전에 옛 조사당 벽화가 전시될 당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액자틀로 복원한 벽화의 실체가 드러나 있다.

                   벽화 표면의 보양작업 광경. 표면의 채색층이 일어나지 못하게 안정화시키는 작업이다.

               1916년 수리복원 이전에 찍은 조사당 벽화의 모습. 사천왕 가운데 북방다문천왕의 모습이다.

                   1916년 수리복원 이전에 찍은 조사당 벽화의 모습. 부처를 호위하는 범천상의 모습이다.

              1916년 부석사 조사당의 벽체에서 분리되기 전에 찍은 벽화의 사천왕상 중 서방광목천왕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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