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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은진미륵

깜보입니다 2020. 8. 29. 14:50

'은진미륵' 새까만 눈동자의 비밀…‘못난이 아니라 볼매였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못난이 은진미륵의 재발견

경향신문 2020.8월25일

 

고려 초 광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은진미륵(오른쪽)은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중엽 제작된 석굴암 본존불(왼쪽)과 곧잘 비교되었다. 석굴암 본존불이 ‘완벽한 신체비율, 비불비인(非佛非人)의 표정, 불타의 신비와 자애’ 등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은진미륵은 중국의 5대10국과 한반도의 나말여초 혼란기에 쇠퇴한 불교조각을 반영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 때문에 은진미륵은 조각품이 아닌 한낱 돌기둥으로 폄훼되어 ‘최악의 졸작’이니 ‘못난이 불상’이니 하는 혹평을 들었다.

 

 

“이걸 어떻게 새겨 넣은 거지?” 지난 2007년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의 정비사업에 전문가로 참여한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현 학예실장)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아파트 6층 높이(18.12m)의 은진미륵 불상에 비계를 설치해 올라간 것도, 얼굴을 코 앞에서 친견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은진미륵의 눈과 마주친 순간 최선주 학예연구관은 숨이 멎는 듯했다.

 

밑에서 보기엔 눈을 돌(화강암)에 새긴 뒤 눈동자와 눈의 양 옆 내외안각 주름 부분을 검은 색으로 채색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 보니 그게 아니었다. 따로 흑색 점판암에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제작한 뒤 미리 파놓은 원판(화강암)의 눈 모양에 정교하게 끼워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전율,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따로 조각한 점판암 눈동자는 물론 눈 양 옆의 (내외안각) 주름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했다니….”

 

“이렇듯 거대한 불상의 눈을 코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뭔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최실장은 아직 학계에도 보고하지 않은 은진미륵의 눈 사진을 촬영 13년 만에 처음으로 필자에게 공개했다. 공개한 이유가 있다. 이 정도 디테일한 은진미륵의 눈이 어떻게 이 불상이 ‘못난이’의 오명을 떼고 ‘국보’로 거듭났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높이 18.2m에 달하는 거불인 충남 논산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 흔히 은진미륵으로 통한다. 좌대와 상·하체, 덮개 등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 이어붙였다.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제공

 

혹평에서 극찬까지

 

“…전체적인 균형미는 없다. 머리부분이 지나치게 크고 면상(面相)이 평범하며 의상의 수법이 간결하다.”(세키노 다다시·關野貞)

 

“3등신에,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삼각형 얼굴은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한국 최악의 졸작이다.”(김원룡)

 

지독한 ‘얼평’(얼굴평)이다. 삼등신, ‘얼큰이’(얼굴 큰 사람), 삼각형 턱, 미련남, ‘패테’(패션테러)도 모자라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니…. 일제강점기 세키노 다다시(1867~1935)만 그랬다면 몰라도 한국 고고 미술사학의 개척자라는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1922~1993) 역시 그런 평가를 내렸으니 어쩔 것인가.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이 10여년전 아파트 6층이 넘는 높이의 은진미륵을 실사하면서 찍은 눈동자 사진. 밑에서 보기에는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검은 색으로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올라가 보니 원판 화강암을 파내고 흑색 점판암으로 조각한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을 정교하게 끼워넣은 것으로 확인됐다. | 최선주 실장 제공

 

바로 은진미륵에 쏟아진 악평들이다. 소위 ‘불격모독’일 수 있지만 김원룡 등의 평가를 더 살펴보자.

 

“은진미륵은 (불상이라기 보다는) 그저 돌기둥(石柱)에 불과하고 그 위에 의미없는 선이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다…신라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진….”

 

그러면서 김원룡은 “이 불상에 한국인이 놀란다면 그 사이즈(18.12m) 때문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외국인의 눈에 원시인처럼 보인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렇게 세키노(<조선미술사>·1932년)와 김원룡(<한국미의 탐구>·1978년) 등 영향력있는 학자들의 공개적인 험담 탓에 ‘은진미륵’은 최근까지도 ‘못난이 불상’이니 ‘최악의 졸작’이니 하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아무런 변명도 못한채…. 그나마 못생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조성시기(968년·고려 광종)가 알려진 불상이라는 점 덕분에 인심 쓰듯 까짓 것 보물(제218호·1963년)로 대접해준 인상이 짙다.

 

그런데 2년 전인 2018년 2월8일 문화재위원회 국보심의 회의에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문화재위원들이 “중후하고 역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조형미를 갖췄고 통일신라와는 완전히 다른 파격과 신비의 미적 감각을 담은…가장 독창성 짙은 불교조각”이라고 입을 모은 것이다. 이에 은진미륵은 만장일치로 보물에서 국보(제323호)로 승격 지정됐다.

은진미륵과 석굴암 본존불의 전신 비교. 예전에는 석굴암 본존불(오른쪽)과 비교되어 ‘못난이’ 딱지를 얻은 은진미륵(왼쪽)이지만 최근들어 파격과 신비의 미적감각을 지닌 가장 독창성 짙은 작품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못난이’에서 ‘상남자’의 부캐를 얻은 셈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비교된 외모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은진미륵은 이와같은 극과 극 ‘얼평’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이 은진미륵의 외모를 석굴암 불상, 특히 본존불과 비교했기 때문이었다. 8세기 중후반(751~774년) 완성된 석굴암을 두고 세키노 다다시는 “완전히 신라의 장인들의 창의로 이뤄졌고…일본은 물론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김원룡은 “석굴암 불상은 당나라 불상(천룡산 석굴·보경사 석불)을 기본으로 하면서 숭고·청순한 정신미의 절정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특히 석굴암 본존불은…완벽한 신체비율, 비불비인(非佛非人)의 표정, 석면을 흐르고 있는 생명력을 통해 불타의 신비와 자애로 보는 이를 감싸주고 있다.”

 

여기서 ‘외모 비교’가 들어간다. 김원룡은 “그러나 신라멸망 후 고려의 불공들은…예술가 기백이나 기술을 완전히 잊어버린다”고 전제하면서 그 중에서도 은진미륵을 콕 집어 ‘디스’한다.

 

“그 단적인 예가 유명한 논산의 미륵불이다. 조각이 아닌 돌기둥(석주), 불공(佛工)이 아닌 석공(石工)의 작품이 신라 이래 석불 전통의 종지부와 같은 기념비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은진미륵은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의 중간에 세로 일렬로 달린 철제 고리 3개가 심상치 않다.이곳에 금동불상이 설치되어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탈취했다고 한다. 둥그런 미간 가운데는 커다란 백호(白毫·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는 부분이다. 1960년 백호에서 지름 30.5㎝ 크기의 커다란 원형동판이 발견됐다. 백호의 지름이 30㎝가 넘을 정도로 불상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최선주 학예실장 제공

 

 

■촌티나는 못난이 불상

 

‘은진미륵’은 왜 이런 비교를 당했을까. 김원룡의 석굴암 평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8세기 신라불상의 얼굴은 숭고·청순한 정신미 등…석굴암 불상은 실재하는 인간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요즘이라면 석굴암 본존불을 ‘꽃미남’이라 일컬었을 것이다. 그런 ‘꽃미남’에 견주면 은진미륵은 우락부락하고 거친 ‘삼등신 얼큰이’였으니 가차없이 폄훼된 것이다.

1872년(고종 9년) 제작된 ‘은진지도’에 표시된 은진미륵의 보관에 불상이 표시되어 있다. | 신은영의 논문에서

 

 

이 ‘못난이’는 곧 ‘촌티’로 치부됐다. 즉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지방 호족들이 곤경에 빠진 백성들의 불안감을 없애려고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향토색이 강한 불상이 되었고, 따라서 통일신라의 양식과는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들면서 평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불교미술학자인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1918~2011)의 평가가 주목할 만 하다.

 

“18m 거불이니 몸체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또 토속적이라서 학자에 따라서는 혹평을 가하고 있지만 기념비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황수영은 “고려시대 조각 기법의 퇴조 때문에 뛰어난 작품을 만들지 못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무시해버리려는 태도는 성찰돼야 한다”고 재평가했다. 그러나 이것도 은진미륵은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석굴암처럼 뛰어나지는 않다는 평가였다. 한마디로 꽃미남 주연배우는 아니고, ‘토속적인 용모를 갖춘 성격배우’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이마 정면에 존재했던 금동불상 말고도 4면에 관을 고정한 흔적이 남아있다. 보관의 4면은 금동제 화관을 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보관 4면에는 금동제 화관을 둘렀고, 정면에는 정면의 철제 고리에는 금동불상을 걸어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맨 위에는 임금이 쓰는 면류관 형태의 덮개가 의미심장하다. 최선주 실장은 이것을 은진미륵을 조성한 고려 광종과 연결시킨다. | 한정엽 사진작가 촬영

 

■“원초적인 힘이 보인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은진미륵은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게된다. 은진미륵에게서 “거대하고 묵중한 괴체(塊體)로 단순화됐지만 양감이 느껴지고…강한 원초적인 힘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자비로운 보살이 아닌 강한 신비감을 담고 있는 위압적인 모습이다. 이제까지 관촉사 보살상을 설명해왔던 쇠퇴양식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매우 강렬하게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한다.”

 

어떤 연구자는 한발 더 나아가 “우미(優美·뛰어나게 아름다움) 그 자체가 미의 기준이 아니”라면서 석굴암 불상과 은진미륵을 새롭게 비교한다.

 

“8세기 중기 이후의 통일신라 조각이 조화와 통일성을 추구했다면 고려 전기 충남 거석불은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을 표출하고 있다. 아름답지 않다던가 비례에 맞지 않는다던가 하는 단순논리는 재고돼야 한다.”(조수진의 ‘충남지역 거석불에 대한 고찰’ 논문에서)

 

은진미륵은 이 즈음부터 석굴암 불상과 같은 ‘꽃미남’은 아닐지언정 원초적인 힘을 갖춘 카리스마 넘치는 ‘부캐’(부캐릭터)인 ‘상남자’로 재평가됐다. 어찌보면 다양한 캐릭터를 인정하는 시대흐름에 은진미륵이 당당하게 합류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은진미륵의 긴 귀 중간에 걸쳐 3줄로 길게 늘어뜨린 보발(寶髮)의 곡선처리가 정교하다. 귀 중간으로 보배로운 머리카락이 지나가는 표현장식이다. 거대한 불상의 규모와 대비되는 조각가의 섬세함이다. 오른손은 철제 연화 가지를 들었다.

 

 

■솟아오른 바위에 새긴 키다리 불상

 

이제 은진미륵을 찬찬히 뜯어보자.

 

“여기엔(관촉사) 크나큰 석상 미륵존이 있으니(有大石像彌勒尊) 내 나간다 나간다며 땅속에서 솟았다네(我出我出湧從地) 눈처럼 하얗게 우뚝이 큰 들을 임하니(巍然雪色臨大野) 때로는 땀 흘려 군신을 경계도 시키는데(時時流汗警君臣)….”

 

고려말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등장하는 ‘관촉사’ 시이다. 목은의 시에 등장하는 ‘땅속에서 솟았다”는 싯구는 무얼 가리키는 것일까. 절의 역사를 기록한 <관촉사 사적기> 등에 따르면 고려 광종 19년(968년) 한 여인이 충남 논산 은진현의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다가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가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없고 큰 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광종은 혜명 스님에게 “그 바위에 불상을 조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명을 받은 혜명은 기술자 100여명을 데리고 현장에 가서 970년부터 37년에 걸쳐 불사를 마무리했다.(1006년·목종 9년)

 

이외에도 은진미륵이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국란(國亂)이 생기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도 빛을 잃었다는 등의 다양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 불상은 화강암 자연 암반을 발로 조각한 대좌 위에 거대한 2개의 돌로 상하체, 즉 머리와 팔각형 보관, 몸과 어깨를 조각하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덮개)를 따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4개의 커다란 석재를 짜맞추어 거대한 불상을 만든 것이다.

은진미륵은 두 팔뚝을 겨드랑이에 붙여 허리부분에서 두 손을 위로 들어올리고 있다. 왼손은 허리와 평행을 취하면서 손목만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의 형태를 취했다. 오른손은 철제 연화 가지를 들었고, 손바닥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손가락에는 손톱까지 새겼다.

 

불상의 높이 18.12m, 둘레 9m에 달하고 귀 길이와 미간의 폭이 1.8m씩이고, 머리 위에 쓴 보관 높이가 2.43m나 된다. 그렇다면 불상의 발로 조성한 대좌 위에 각각 조각한 상체와 하체, 그리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 등을 어떻게 옮겨 하나로 짜맞췄을까. <관촉사 사적기>에 따르면 완성된 은진미륵 몸체를 옮기는데만 1000여 명이 동원됐다. 여기서 관련 설화가 등장한다.

 

즉 무거운 각각의 부위를 짜맞출 묘안을 고민중이던 혜명 스님이 마을 앞 강가를 걷고 있는데 두 동자가 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두 동자는 하나의 돌을 놓고 그 주변에 흙과 모래를 채운 뒤 또 다른 돌을 굴려 기존의 돌 위에 포갰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혜명 스님은 손뼉을 쳤다.

 

불상 쌓기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자 일순 두 동자가 사라졌다. 혜명스님은 아이들의 탑 쌓기 놀이에 착안해서 불상을 세웠다. 사람들은 혜명스님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진 두 동자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 했다.

은진미륵의 하체. 발아래로는 바람에 펄럭이는 천의 자락과 이에 상응하게 힘차게 흘러가는 구름이 조각되었다. 이 불상을 조성했다는 혜명 스님의 표현력과 독창성을 반영한다. | 문화재청 제공

 

볼수록 매력덩어리

 

최선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의 논문(‘고려 초기 관촉사 석조여래입상에 대한 연구’)을 통해 은진미륵의 매력을 살펴보자. 은진미륵의 이마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그 보관 밑에 굵직한 머리카락이 곱슬의 형태를 이룬다. 그 머리의 한 끝이 3단을 이뤄 커다란 귀의 중앙부분을 걸쳐 어깨 뒤로 늘어져있다. 둥그런 미간 가운데는 커다란 백호(白毫)가 있다. 백호는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을 일컫는다. 수정 같은 보석을 끼워 넣는 부분이다. 1960년 은진미륵의 백호에서 지름 30.5㎝ 크기의 커다란 원형동판이 발견됐다. 백호의 지름이 30㎝가 넘을 정도로 불상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은진미륵의 발부분. 양발은 몸통을 이루는 돌과 별개로 자연석 암반 위에 직접 조각했다. 그 위에 몸통을 올린 것이다. 통통한 발가락에는 거대한 조형과는 어울리지 않게 잘 다듬어진 발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얼굴을 보자. 이마가 좁고 양쪽 볼이 넓은 삼각형 형태인데 눈·코·입이 꽉 차게 표현됐다. 눈은 미간의 선을 따라 옆으로 길게 표현됐고, 눈동자와 내외안각 주름은 앞서 밝혔듯이 검은색 점판암을 조각해서 끼워넣었다. 코는 둥그런 미간에서 길게 내려져 낮게 삼각형을 그리고 있다. 이 얼굴은 대중적으로는 ‘삼등신 얼큰이’라며 손가락질 받았던 부위다.

 

하지만 최선주 실장은 달리 보았다. 꽉찬 눈·코·입을 두고 ‘평면적인 얼굴의 이미지를 완전 극복했다’고 했다. 긴 눈과 검은색 눈동자를 두고는 ‘위엄있게 보인다’고 했다. 또 입술의 면처리는 ‘매우 원만하고 치밀하게 표현돼있다’고 했고, 깊게 파진 인중을 두고는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했다.

 

이 뿐이 아니다, 3줄로 길게 늘어뜨린 보발(寶髮)의 곡선처리를 두고는 ‘어색한데 없이 머리카락을 정교하게 다듬었다’고 극찬했다. 또 두툼한 띠로 표현된 ‘천의(天衣)’ 끝단을 두고는 ‘마치 바람에 날려 젖혀진 듯 하다’고 치켜세웠다. 왼손은 허리와 평행을 취하면서 손목만 꺾어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댄 수인(手印)의 형태를 취했다. 오른손은 황금색(혹은 자금색) 연화 가지를 들었고, 손바닥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관촉사와 은진미륵의 전경. 압도적인 은진미륵의 크기 때문에 절이 오히려 작아보인다. | 문화재청 제공

 

■일제가 빼앗아간 금동불상·화관

 

이마 위에 표현된 원통형 보관도 매력덩어리다. 보관의 중간에 세로 일렬로 달린 철제 고리 3개가 심상치 않다. 또 보관의 4면에 걸쳐서도 관을 고정했던 철제흔적이 남아있다. 1743년(영조 19년) 기록인 <관촉사사적기> 등과 후대의 증언을 토대로 살펴보면 보관의 4면은 금동제 화관을 둘렀고, 정면(철제 고리)에는 금동불상을 걸어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논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동호회(죽암문인협회)가 쓴 <관촉사유적기>(1949년)에는 관련 증언이 등장한다. 즉 “보관의 4면을 둘렀던 금동제 화관은 1881년(고종 18년) 민비(명성황후)의 명에 의해 제거됐고, 정면의 금동불상은 1907년 어느날 일본인들이 그물을 타고 올라가 탈취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무엇 때문에 논산 지역에 있는 은진미륵의 금동화관을 제거하라는 명을 내렸겠는가. 일본인들이 금동불상과 금동제화관을 다 훔쳐가면서 ‘민비’ 운운하는 헛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짙다. 1907년이면 일본의 궁내대신(장관)이라는 자(다나카 미쓰야키·田中光顯·1843~1939)가 백주에 개경 인근에 우뚝 서있던 경천사 10층석탑을 뜯어갔던 바로 그 해다. 일국의 장관이 남의 나라에 와서 멀쩡한 고층탑까지 뜯어가버린 무법천지였으니 은진미륵의 금동불상 및 화관을 탈취하는 일도 여반장(如反掌)이었으리라.

관촉사 은진미륵의 앞면과 측면, 그리고 뒷면. 크기가 워낙 커서인지 가까이서 보나 멀리서 보나 그 규모를 실감하기가 어렵다. | 문화재청 제공

 

■면류관 쓴 은진미륵?

 

또하나 은진미륵의 특징 가운데 이중 사각형 형태의 보개(덮개) 또한 심상치 않다. 이 보개의 형태가 임금이 쓰는 면류관과 비슷하다는 것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광종을 지칭한다.

 

광종(재위 949~975년)은 고려의 건국 과정에서 크게 성장한 호족세력을 억누르려는 이른바 왕권강화책을 쓴 임금이다. 나말여초 혼란기에 양인에서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조사해서 다시 양인으로 되돌리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956년) 과거제를 실시했다(958년). 바로 이 과정에서 왕의 권위를 크게 부각시키려고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태조 왕건(877~943·재위 918~943)은 936년(태조 19년) 논산 인근의 연산에서 신검(재위 935~936)의 후백제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 항복을 받아냈다. 태조는 이 역사적인 승전을 기념하려고 연산에 개태사와 삼존불상(높이 4.51m, 3.84m, 3,72m)을 세웠다. 광종은 그런 태조의 기상을 이어받아 후백제의 옛 영역인 논산·연산 지역의 호족 앞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고 개태사 삼존불상보다 4배 이상 큰 거불(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임금의 면류관 형태의 이중 사각형 보개는 바로 광종의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충남지역에는 은진미륵과 양식과, 제작시기가 비슷한 불상이 더 있는데,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입상(보물 217호)가 바로 그것이다.

은진미륵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충남 부여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미래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가 10m나 되는 거구이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비슷하다. |문화재청 제공

 

■‘배역의 땅’ 다스리려고?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후백제의 서기 어린 땅과 원한 품은 백성들의 결합을 차단하기 위해 ‘비보(裨補)’ 차원에서 18m가 넘는 은진미륵을 조성했다는 견해이다(신은영의 ‘관촉사 석조보살연구’ 논문에서).

 

‘비보’는 산천지세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절이나 탑을 세워 나쁜 땅을 진압하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비보사탑풍수’라 한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의 8번째는 ‘차현 이남과 금강 바깥쪽은 배역(背逆)의 땅’이라 규정해놓았다.(<고려사> ‘세가’) 북쪽을 향해 흘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금강의 모습이 마치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배역의 땅’을 진압하고 다스려야 했다. 이렇게 ‘비보사탑풍수’의 차원에서 조성한 것이 은진미륵과 같은 거대불상이라는 해석이다.

2007년 은진미륵의 상황을 점검하는 연구자들. 대략 아파트 6층 높이의 아찔한 곳에서 불상의 눈부위를 조사하고 있다.|최선주 실장 제공

 

■‘상남자 미륵’

 

필자는 최근 오랜만에 은진미륵을 친견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무리 잘 봐줘도 ‘꽃미남’ 소리는 못하겠다. 그러나 1000년 이상 꼬리표처럼 붙었던 ‘못난이’의 오명은 이제 털어버려도 좋을 듯 싶다. 굳이 남자로 표현하자면 시쳇말로 ‘상남자’가 꼭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도 이왕 만들 거 시쳇말로 꽃미남으로 조성했으면 어땠을까. 태조 왕건의 ‘훈요10조’ 중 4조에 그 해답이 나와 있는 것 같다.

 

“우리 동방은 중국 풍습을 본받아 문물 예악 제도를 모두 그대로 준수했다. 그러나 지역이 다르고 사람의 성품도 각각 같지 않으니 구태여 억지로 맞출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고려 ‘장삼이사(張三李四)’ 얼굴을 조각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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