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 가면 '기필코' 보고 와야 한다는 다리
[세상을 잇는 다리] 한 도시의 영광과 쇠락을 모두 지켜 본 강경 미내·원목다리
[이영천 기자]
논산엔 자매처럼 닮은 두 개의 3경간 무지개다리가 있다. 강경에 있는 미내다리가 언니고 채운면에 있는 원목다리가 동생이다. 둘 사이 직선거리는 2.7km에 불과하다. 같은 지역에 유사한 무지개다리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같은 기술진이 축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은진미교비(恩津渼橋碑)는 미내다리가 1731년(영조7년)에 축조되었다 기록하고 있다. 논산에 가면 3가지는 꼭 보고 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관촉사 은진미륵과 개태사 가마솥, 그리고 강경 미내다리다.
번성하던 강경을 잇는 미내다리
▲ 미내다리 정면 모습 논산에 가면 꼭 보고 와야 한다는, 3경간 무지개다리다. 상판 유려한 곡선이 인상적이다. 구불구불한 강경천을 동-서로 잇던 다리로, 유로변경으로 제내지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강경천 고수부지로 옮겨 복원하였다. |
ⓒ 이영천 |
강경천을 미하(渼河) 혹은 미내(渼奈)라 불렀는데, 다리는 여기서 차운해 붙인 이름이다. 다리 곁에 1983년 1월 세운 사적비는, 은진미교비 내용 일부를 적고 있다. 비는 '강경사람 석설산과 송만운, 황산 사람 유부업과 승려 경원, 설우, 청원, 여산 사람 강명달, 강육평 등이 협력하여 돈을 모아 다리를 놓았다' 기록한다. 참여한 지역 면면으로 보아, 다리는 여러 고장의 물산을 강경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옛 지도를 보면 미내다리가 있던 강경천은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이다. 일제강점기 수로를 정비해 굽은 강을 곧게 펴자 제방 위치가 변하였다. 다리는 제방 안쪽 제내지(堤內地)에 방치되어 관리가 부실해지고 여기저기 무너져 내린다. 1998년 해체하여 복원에 착수한다. 사라진 부재를 새로 만들고, 강경천 고수부지 제외지(堤外地)로 이전한다. 2003년에 이르러 복원을 끝마친다.
미내다리를 건넌 물산이 강경포구에 모인다. 강을 타고 충청내륙으로, 바다를 통해선 서해안 곳곳으로 실려 나갔으리라. 금강으로 들어온 해산물은, 강경포구에서 보부상들 손을 거쳐 전라·충청 곳곳에서 사람들 밥상에 올랐을 것이다.
▲ 미내다리 측면 무지개 틀과 잘 다듬어진 벽석이 세련된 양장을 걸친 신여성을 연상시킨다. 무척 화려하다. 귀틀돌이 이루는 유려한 곡선이 미인의 눈썹을 닮았다. 활처럼 휜 곡선이 측면에서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멀리 호남선 KTX 철길이 보인다. |
ⓒ 이영천 |
미내다리는 길이 30m, 높이 4,5m, 너비 2.8m의 3경간 무지개다리다. '삼남 제1교'라 불렀다는 기록에 걸 맞는 규모다. 석재는 밝고 환한 화강암이다. 남에서 북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는 강경천 동서방향을 잇는다. 가운데 무지개 틀을 양옆보다 높게 만들어, 다리 전체 형상을 미인의 눈썹처럼 굽어지게 만들었다.
무지개 틀 쐐기돌이 귀틀돌 밖으로 돌출되어, 정점에서 멍엣돌 역할을 한다. 벽석에 결구된 멍엣돌도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여기에 귀틀돌을 결구시켜 눈썹 모양 유려한 곡선을 탄생시킨 것이다. 상판은 돌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 미내다리 가운데 무지개 쐐기돌 3개 무지개 중 가운데 무지개 쐐기돌의 한쪽 끝이다. 눈은 장승이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 옆으로 귀와 갈기를 새겨 넣었다. 혹자는 호랑이라 말하지만, ‘귀면와(鬼面瓦)’에 새겨진 도깨비처럼 보인다. |
ⓒ 이영천 |
가운데 무지개 쐐기돌 형상이 독특하다. 선암사 승선교처럼 궁륭엔 아래로 돌출된 돌이 보인다. 모양이 훼손되어 정확한 모습을 확인하긴 어려우나, 귀면(鬼面)으로 추정된다. 벽석 밖으로 돌출된 쐐기돌 한쪽 끝에도 알 수 없는 동물형상이 새겨져 있다. 눈은 장승이고 코는 뭉툭하며, 얼굴 양 옆으로 귀와 갈기를 새겨 넣었다.
혹자는 호랑이라고 말한다. 내 눈엔 '귀면와(鬼面瓦)'에 새겨진 도깨비로 보인다. 도깨비를 새겨 재앙을 막고 잡귀와 병마(病魔)의 침범을 막아주길 빈 것으로 추정한다. 북쪽 무지개 틀 쐐기돌 한쪽 끝엔 용머리를 새겨 넣었다. 혹자는 '미내'와 용을 상징하는 우리 말 '미르'를 연계하여 말하기도 한다.
전라·충청 수부(首府)를 잇는 원목다리
▲ 원목다리 모습 채운면 야화리에 있는 3경간 무지개 다리로, 미내다리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수수한 모습이다. 벽석은 막돌과 다듬은 돌을 섞어 쌓았다. 직접 바라보고 있으면 정감가는 모습에 한참을 서 있게 만드는 다리다. |
ⓒ 이영천 |
원목다리는 의자왕이 많은 꽃을 심고 즐겼다는 채운면 야화리에 있다. 전라와 충청의 수부(首府)인 전주와 공주 최단거리 길목으로 방축천을 잇는 다리다. 야화리는 저자거리가 번성했을 개연성이 높은 마을이다.
현재 모습도 그랬을 거란 생각을 갖게 만든다. 원목이라는 다리 이름도 '간이역원과 길목'이 합성되어 만들어졌다. 원항(院項)다리라고도 부른다. 길이 16m, 높이 2.8m, 너비 2.4m의 아담한 규모다.
3경간 무지개다리로, 가운데 무지개 틀이 양쪽보다 약간 높다. 미내다리와 비슷한 모습이다. 가운데 무지개 쐐기돌을 귀틀돌 밖으로 내밀어, 양 끝에 용의 얼굴을 새겼다. 멍엣돌을 결구시켜 상판을 만들었으나 바닥은 흙을 다졌다. 후대에 변형된 것으로 추정한다.
▲ 가교석비와 원목다리 전라와 충청 경계역할을 하는 다리로 1900년 홍수 때 파괴되었다. 이를 승려와 백성들이 자금을 모아 재가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판이 흙으로 다져진 원목다리 모습이 인상적으로 보인다. |
ⓒ 이영천 |
상판 곡면은 둔탁한 편이다. 유려한 미내다리 곡선엔 미치지 못한다. 하천이 좁고 하상 깊이 차이가 미내다리와 다른 모양을 만들어냈다. 벽석은 자연에 있는 막돌이 주를 이루고, 일부 다듬은 돌들도 섞여 있다.
가지런한 미내다리 벽석보다 훨씬 정감이 가는 수수한 모양새다. 미내다리가 세련된 양장에 멋을 부린 신여성이라면, 원목다리는 수수한 무명옷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때 묻지 않은 시골처녀라 할 만하다. 둘은 서로 닮았으면서 다르다.
강경의 영광과 쇠락을 모두 지켜본 다리
논산 서측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강이 유유(悠悠)하다. 계룡산과 대둔산, 미륵산과 크고 작은 산자락이 논산을 감싸고 있다. 산들이 남동북 삼면에서 경계를 지으며, 분지를 이뤄냈다. 오로지 서쪽 금강을 향해서만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그 끝에 강경이 자리한다.
계룡산과 대둔산에서 흘러온 논산천이 동에서 서로, 익산 미륵산에서 흐른 물 강경천이 남에서 북으로, 석성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들어 일제히 한곳으로 모여든다. 이들 물줄기가 오목하게 모여드는 곳에 강경포가 자리한다.
▲ 1930년대 강경포구 전경 옥녀봉 아래 논산천이 금강으로 흘러 드는 곳으로 추정된다. 강경포구에는 매일 큰배 100여척이 정박하고, 시장에는 상인 1만여 명이 몰려들어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에 촬영된 사진을 통해, 이 시기에 이미 쇠락한 강경포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
ⓒ 논산시청 |
굽이쳐 흐르는 금강 물줄기로 보아, 강경은 곡류하천 측방침식이 일어나는 곳에 입지하였다. 단단한 암반이 하상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포구 앞 수심은 깊고 물 힘이 세, 흙이 퇴적되지 않는다. 그만큼 강기슭 항구인 '하항(河港)'으로써 천혜의 요건을 갖추었다. 강폭은 400m가 넘어 큰 배가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서해를 오르내리는 갖은 물산이 강경으로 몰려든다. 내륙 하항으로 원산과 더불어 조선 2대 포구이며, 대구·평양과 더불어 조선 3대 시장으로 이름을 떨친다. 백여 척 이상 커다란 상선(商船)이 늘 드나들고, 하루 1만여 명 상인들이 북적인다. 전라·충청 내륙의 물산과, 서해·남해에서 잡힌 물고기들이 주요 품목이다. 중국으로 들고 나는 물건들도 지천이다. 강경에선 구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고 육로와 수로, 해로를 이용하기엔 최적의 도시다.
1899년 호남평야 미곡을 강탈하려는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킨다. 강경 항구기능을 확대하는데 군산 개항도 큰 몫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05년 을사늑약과 함께 경부선이 가설되자 물을 이용하던 물류 흐름이 급격히 철도로 옮아간다.
그 중심에 대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전과 가까운 강경은 이전 도시세력을 비교적 잘 유지해 낸다. 하지만 강경 주변에도 급격히 철도가 늘어난다. 대전∼강경선(1911), 익산∼군산선(1912)에 이어, 1914년 호남선이 완공된 것이다. 이로 인해 강경의 항구기능이 급격히 퇴화하기 시작한다. 낙후되고 느린 선박이, 빠른 철도를 따라 잡을 순 없었다. 결정적으로 1931년 장항선까지 개통된다.
한국전쟁 땐 시가지 70% 이상이 파괴되어 버린다. 차가운 자본은 쇠락한 포구에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다. 재생(Renewal)이 안 된 것이다. 이제 바닷가 작은 포구만도 못하게 되었다. 1970년 대 중후반을 전후하여 국제항 기능을 하던 군산항도 급격히 퇴화해 간다. 막대한 퇴적토가 항로에 쌓여, 큰 배를 접안시키기가 점차 힘들어 진다. 두 도시의 항구 기능이 덩달아 쇠락해 간다.
강경으로 몰리던 물산이 급격히 줄어들어, 포구로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1990년 금강 하구를 둑으로 막아버림으로써, 강경은 하항(河港)기능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만다. 젓갈 등 일부 특화된 물산으로 옛 명성을 유지하는 한적한 도시로 퇴락하고 말았다. 화려했던 과거의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다. 옛 영화(榮華)의 흥청거림이 금강 물결로 넘실거린다. 강물은 여전히 유유하다.
▲ 1913년 강경 시가지 전경 일제 강점기에 접어 들어 강경은 활발하던 하상운송 물류기능을 철도에 점차로 빼앗기기 시작한다. 사진 곳곳에 부호들이 살았음직한 저택들이 눈에 보인다. 강경은 조선 2대포구, 3대 시장 중 하나였을 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
ⓒ 논산시청 |
도시는 변화한다. 나이 들어가는 생명체처럼, 도시를 지탱하는 각 기능 간 흥망성쇠가 반복되어 치환되곤 한다. 하지만 강경의 쇠락은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과거 번성하던 도시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격히 쇠락해 버린 현상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근대화의 수혜를 가장 먼저 입었으면서, 근대화로 인해 가장 먼저 쇠락해 버린 도시가 바로 강경이다.
강경이 그만큼 반일정서가 강했다는 반증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중간 배후지였다. 후방에서 혁명전쟁에 필요한 갖은 물품을 지원했다. 또한 식민지배에 철저히 짓밟힌 경우에 해당한다. 교통수단의 변화에 적응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으로 빗겨간 대량·고속의 교통수단이 번성하던 한 도시를 깡그리 지워버렸다. 식민지 수탈기능 고도화를 위해, 우리 국토를 유린한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이다. 우리 국토 공간구조는, 이처럼 일제가 만들어 놓은 체계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해 신음하고 있다.
전라·충청 수부인 전주와 공주를 잇던 길에, 미내·원목다리가 있다. 다리는 강경으로 들고나는 모든 물산의 흐름과 사람의 발길, 역사의 무게를 오롯이 받아 안았다. 영욕의 무게를 견뎌왔다. 초라하게 늙어버린 두 다리가, 신고(辛苦)를 다 떠안아 준 것이다. 곧고 넓은 길만이 항상 최고는 아니다. 좁고 굽은 길이 좋을 때도 있다. 의연하게 남아 있는 미내·원목다리가 그렇다. 비록 초라하게 앉았으되, 무척이나 곱고 사랑스러우며 늠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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