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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보입니다 2020. 12. 29. 09:24

'백제 8가지 무늬 전돌' 중 최초·최고의 산수인물화 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2020. 12. 29. 06:00 댓글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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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37년 충남 부여 규암면 외리에서 발견된 ‘문양전(무늬 전돌)’ 중 산수인물화의 시원으로 꼽히는 ‘산수무늬 전돌’. 하단에 물, 중앙에는 산과 나무, 그리고 윗부분에는 하늘을 그렸고, 오른쪽 하단부에 스님인지, 도인인지 모를 신비의 인물이 암자로 보이는 팔작기와 건물을 향해 걷고 있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아니 금관이나 반가사유상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 1960~2019년 사이 해외전시를 다녀온 한국문화재 순위를 집계한 자료를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게서 받았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금관(국보 87호 금관총 출토·5회·1895일)은 8위, 금동반가사유상(국보 83호·7회 2255일)은 3위에 머무른 대신 ‘부여 외리 문양전’(보물 343호·22회·6408일)이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위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91호·8회·2650일)와 비교하면 회수로는 3배 가까이, 일수로는 2.4배나 많다. 59년 동안 22회였으니 사람으로 치면 그야말로 뻔질나게 ‘기내식’을 먹은 셈이다.

1960~2019년 사이 문화재의 해외 반출횟수별 순위. 문양별로 8점이 일괄로 보물지정된 ‘부여 외리 문양전’이 압도적인 1위를 달렸다.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자료


■백제 예술의 대표선수

필자는 물론 이 외리 문양전의 문화재적 가치는 지극히 높다고 지적했지만 ‘영혼이 별로 없는 리액션’이었음을 실토한다. 즉 외리 문양전이 8점이나 되고, 특히 ‘산수문전’(8회·2116일)과 ‘귀신문전’(8회·2738일)의 경우 비슷한 문양이 2점씩 있으니 해외나들이에도 부담이 적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게다가 전돌은 금은 세공품과 같은 정밀한 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훼손 가능성도 그만큼 적다는 것에 착안했다.

덕분에 해외전시 때마다 ‘백제의 대표선수’로 단골 출품될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했다. 1993년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287호)가 출토되었으니 앞으로 백제 문화의 에이스 유물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보았다.

외리출토 무늬전돌의 도상을 보면 연화·와운·반룡·봉황무늬는 원형, 봉황산수·산수인물·연대귀형·산수귀형은 사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이내옥의 논문에서


한마디로 금동대향로 같은 엄청난 유물이 나왔으니 이제 ‘문양전’은 에이스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부여 외리 문양전’을 필자가 시쳇말로 ‘띄엄띄엄’ 본 것이었다. 각종 자료를 공부해보니 이 ‘문양전’이 금동대향로와 함께 백제 예술의 ‘투톱’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선 ‘부여 외리 문양전 일괄’이라는 문화재 명칭이 너무 어렵다.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가 새겨진 전돌 세트(묶음)’라 하면 어떤가. ‘무늬가 새겨진 전돌 세트’ 가운데 국내 최초·최고의 산수인물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유물의 가치를 한껏 높이고 있다.

8개 문양은 잘 보면 서로 이어지도록 제작되어 있다. 사각형 형태의 전돌들과 원 형태의 전돌들끼리 어울린다. |KBS ‘천상의 컬렉션’ 캡처


■열지어 바닥에 깔린 무늬전돌

1937년 3월 9일 충남 부여 규암면 외리에 사는 농부가 보리밭에서 나무뿌리를 캐다가 무늬가 새겨진 사각형의 전돌과 와당을 다수 발견했다. 농부의 신고를 받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사무촉탁인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가 현장에 파견됐다. 아리미쓰는 4월18일에서 5월3일까지 보름간 150평을 긴급 발굴했다.

하지만 발굴기간이 짧았던데다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는 등 악천후가 겹쳤고, 유적의 파손이 심한 상태여서 제대로 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늬전돌은 완형만 42점(조각까지 포함하면 150여점)이나 확인됐다. 전돌세트는 나지막한 대지와 보리밭 사이의 얕은 땅 밑에서 남북방향으로 9m 정도 열지어 있었다. 그렇게 발견한 무늬 전돌 완형 42점 가운데 상태가 좋은 8점을 1963년 보물로 일괄 지정했다. 옂

1937년 3월9일 농부가 나무뿌리를 캐다가 발견한 당시의 ‘무늬전돌 세트’. 남북방향으로 길이 9m나 열 지어 놓여있었다. 무늬가 새겨진 면이 하늘 위를 향했지만 일정한 질서나 규칙적인 배열은 보이지 않았고 위아래가 뒤바뀌어 있기도 했다.|아리미쓰 교이치의 발굴보고서에서


■8점 8색의 무늬

발견된 무늬전돌은 모두 8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산수인물·산수봉황·산수귀형·연대귀형·반룡·봉황·와운·연화 무늬 등이다. ‘산수인물’은 상단엔 상서로운 구름 아래로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하단에는 물이 있고 한 인물이 걸어가고 있다. ‘산수봉황’은 구름과 봉황이 있는 전돌이다. 상단에 삼산형 봉우리가 솟아있고, 하단에는 산수풍경을 새겼다. ‘산수귀형’은 산수를 배경으로 상단에 물결무늬의 구름위에 둥근 바위를 딛고 서 있는 도깨비 무늬이다. ‘연대귀형’은 연꽃모양으로 만든 대좌 위에 도깨비가 서있다. ‘반룡’은 구슬을 꿰어서 이은 타원형의 띠안에 S자 모양의 용(승천하지 않은 반룡)이 새겨져 있다. ‘봉황’은 원안에 우아한 자태의 봉황 한마리를 배치했다. ‘와운’은 연꽃 무늬의 작은 원심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8개의 와운문이 원을 이루고 있다. ‘연화’는 구슬을 이은 타원형에 연봉무늬가 있고, 원 중심의 씨방이 크며 이를 중심으로 10개의 꽃잎이 있다. 꽃잎마다 덩굴무늬를 새겨놓았다.

5세기 중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무용총 벽화(위사진)에 얼룩무늬 모양의 물결치는 듯한 산세가 표현됐다. 그러나 산세가 인물보다 작고 무엇보다 둥둥 떠있는 느낌이다. 7세기 초의 강서중묘(밑 사진)에 표현된 산세는 그나마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산세 역시 고분 벽화의 주제가 아니라 배경이나 부가물로 표현돼있다.|이내옥의 논문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산수인물화

이중 산수무늬 전돌은 중국을 포함해서 7세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산수화, 그것도 인물을 곁들인 산수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늬 전돌 세트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전돌을 보면 하단에 물, 중앙에는 산과 나무, 그리고 윗부분에는 하늘을 그렸다. 하늘(천)과 땅(천)을 표현한 것인데, 결정적으로 인물이 보인다. 즉 오른쪽 하단부에 스님인지, 도인인지 모를 신비의 인물이 암자로 보이는 팔작기와 건물을 향해 걷고 있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그림에 천, 지, 인이 다 들어가 있는 셈이며, 산수에 인물이 곁들여진 산수인물화”라고 평가한다.

물론 5세기 중기 고구려 벽화인 무용총(중국 지안·集安)에서도 얼룩무늬 모양의 물결치는 산세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산은 말을 탄 사냥꾼보다 크기가 작다. 또 화면에 뿌리없이 떠있다. 무용총 벽화의 주제는 사냥이지 산수화가 아니다. 7세기대의 고구려 벽화인 강서중묘(평남)에서는 그래도 발전된 의미의 산세가 보인다. 하지만 그 벽화에서도 역시 산수가 주제는 아니다.

반면 백제에서는 산수 그 자체가 주제인 유물이 보인다. 예컨대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납석불보살병입상’의 뒷면에 새겨진 산악도를 보면 부정형의 부드러운 산세가 위로 중첩되면서 요동치듯 면을 가득 채운다. 19개 산봉우리가 좌우로 연결되고 매우 율동적이다. 산세가 표현하는 선들이 마치 춤추듯 살아 움직이고 있다. 산이 주제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백제인의 미감은 바로 외리 출토 ‘무늬 전돌’과 1993년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에서 꽃을 피운다. 이중 산수인물무늬 전돌은 면 전체가 기암괴석과 중첩된 산들로 가득 차있다. 거기에 인물과 팔작기와 누각이 부수적으로 등장한다. 하늘에는 유려한 선묘의 구름들이 흘러간다. 후대 산수화가 갖춰야 할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이 백제의 산수인물화를 두고 ‘산수화의 탄생’이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 뚜껑(왼쪽)과 부여출토 납석불보살병입상(왼쪽 사진)에 표현된 산수. 특히 ‘납석불보살병입상’의 뒷면에 새겨진 산악도는 부정형의 부드러운 산세가 위로 중첩되면서 요동치듯 면을 가득 채운다. 19개 산봉우리가 좌우로 연결되고 매우 율동적이다. 산이 주제로 등장했다.|이내옥의 논문에서


■백제인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

그렇다면 당대 중국은 어땠을까. 이내옥 전 부여박물관장의 논문 ‘백제 문양전 연구’(<미술자료> 72권 73호, 국립중앙박물관, 2005)에 따르면 산수화는 중국 육조시대(남북조 시대 중 남조 6개 나라를 지칭·229~589)에 탄생했다. 그러나 초기의 산수화는 미숙함이 역력할 뿐 아니라 육조시대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어서 그 면모를 알기 어렵다.

또한 중국에서 산수화가 발생할 때 물(水)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 이내옥 전 관장은 “외리 출토 ‘문양전(무늬벽돌)’ 중 귀형문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물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다”면서 “이는 상당한 수준의 산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이내옥 전관장은 “결국 산수가 화면의 주제로 등장하느냐가 산수화 탄생의 관건”이라면서 “백제의 경우 주제는 물론이고 완벽에 가까운 구도와 경물 배치 등 산수화로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밝힌다. 중국 육조 시대에 탄생한 고대 산수화가 백제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김성구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산수무늬 벽돌의 경우 좌우대칭의 안정적인 구도를 갖췄고 백제 특유의 원근법이 나타나 백제 회화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다”고 밝힌다.

외리출토 무늬전돌의 도상을 보면 연화·와운·반룡·봉황무늬는 원형, 봉황산수·산수인물·연대귀형·산수귀형은 사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다. 이를 두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동아시아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이내옥의 논문에서


안휘준 교수는 “5세기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구현된 산수화의 초보적 전통이 1세기 반 뒤에 이르러 백제에서 장족의 발전을 했다”면서 “이런 산수표현은 중국 육조시대에도 볼 수 없다”고 극찬했다. 안교수는 “가운데 토산들은 곡선적인 삼산형(三山形)을 이루며 도식화한 특징을 보이는데 이것은 순수미술을 단순화·도식화한 디자인의 모습”이라면서 “백제인의 빼어난 디자인 감각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밝혔다.

조원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문양전’에는 상상 속의 해중신산(삼신산)을 이상세계로 여기는 믿음이 녹아있다”면서 “이러한 삼신산 그림의 원류는 백제금동 향로와 무령왕릉 출토 은제 탁잔은 물론 조선시대 도자기에까지 구현되어 있다”고 전한다.

1993년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산봉우리(왼쪽 사진)과 외리 출토 무늬전돌 중 ‘산수인물무늬 전돌’. 산세가 중첩되어 가득 차 있다. 산수가 주제인 전형적인 산수화의 면모를 보여준다.|국립부여박물관 제공

 

■백제금동대향로와 동일인의 작품?

특기할만한 것은 이 외리 출토 ‘무늬 전돌 세트’가 1993년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점이다. 외리출토 ‘산수인물무늬 전돌’은 삼산형의 산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금동대향로의 몸체와 같고, 그 분위기는 향로의 뚜껑 그림과 유사하다. 또 봉황무늬도 향로의 꼭대기에 우뚝 서있는 봉황과 흡사하다. 앞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대좌부분의 용받침 문양은 외리 출토 전돌 중 ‘반룡무늬 전돌’의 평면구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때문에 외리출토 무늬 전돌 세트를 만든 장인과 금동대향로를 제작한 이가 혹시 동일인물이 아니냐는 추정도 나왔다.

무늬전돌의 제작시기는 7세기 초로 추정된다. 그 시대 중국은 수나라(581~618)가 남북조를 통일했지만 독창적 예술을 성립시키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존속했다. 그 뒤를 이은 당나라(618~907) 역시 제 문화를 이룩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반면 백제는 중국 남조(육조)와의 교류를 통해 문물을 끊임없이 수혈하면서 강하고 독자적인 문화의 전통을 만들어갔다. 어찌보면 백제가 중국 육조 시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결실을 따먹은 것일 수 있다. ‘외리 출토 무늬벽돌 세트’와 ‘금동대향로’가 그 결실이며, 미륵사탑과 정림사탑, 서산마애삼존불 등에서도 구현됐다고 할 수 있다.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전돌’ 중 연화와운무늬와 연화무늬 전돌과 같은 조각편이 다른 두 곳에서 확인됐다. 부여 쌍북리의 가마터에서는 연화와운무늬 조각 2점이, 왕흥사지에서 연화무늬 조각 1점이 나왔다. 백제시대 쌍북리 가마터에서 제작된 무늬전돌이 백제시대 국찰인 왕흥사를 치장하는데 사용됐다가 백제멸망으로 왕흥사가 폐기된 뒤 외리로 옮겨져 다른 건축물에 재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찰인 왕흥사를 치장한 인테리어?

그렇다면 백제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늬 전돌 세트’는 어디서 제작되어 규암면 외리 유적에 묻히게 되었을까.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즉 1982년 부여 쌍북리의 백제 가마터에서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 전돌 중 ‘와운무늬’ 전돌과 같은 조각이 확인됐다. 또 1938년 6세기말~7세기초 국가사찰이던 왕흥사에서 출토된 연화무늬 전돌편(국립부여박물곤 소장)이 실은 외리에서 나온 ‘연화무늬 전돌’과 같은 것이라는 연구결과(홍사준의 ‘백제 왕흥사지 반출유물’, <고고미술> 92, 한국미술사학회, 1968년)도 발표됐다.

낙화암과 백마강 맞은 편에 있는 왕흥사는 557년(위덕왕 24년) 짓기 시작했고 634년(무왕 35년) 완성된 국가사찰이었다. “634년 2월 왕흥사가 완성됐는데, 채식이 화려하고 장엄했다. 임금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는 기록이 있다. 연구자는 조선시대 말부터 어느 순간에 왕흥사터에 존재한 유물들이 대거 반출되었고, 이때 왕흥사를 장식했던 무늬 전돌들도 외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백제문화의 절정기를 이끈 무왕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몄고 수시로 행차했던 사찰’이었다면 당시 백제 기와예술의 최고봉인 무늬전돌로 치장했을 가능성이 짙다. 그렇다면 이 무늬 전돌 세트는 백제왕실의 지시를 받아 부여 쌍북리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왕흥사 치장에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외리에서 바닥에 열지어 깔린채 발견된 무늬 전돌 세트가 실제로는 벽을 장식한 인테리어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즉 전돌들의 각변 길이가 29㎝ 안팎인데 두께는 약 4㎝ 정도로 얇은 편이다. 또 각 전돌의 네 귀 측면에 홈이 파여 있다. 이웃하는 전돌과 서로 연결시켜 고정하도록 제작됐다. 따라서 바닥재라기보다는 건물의 벽단에 사용된 장식재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낙화암과 백마강 맞은 편에 있는 왕흥사는 국가사찰이었다. “색깔과 장식이 화려하고 장엄했으며, 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는 기록이 있다. 백제 멸망 후 어느 순간 왕흥사터에 존재한 유물들이 대거 반출되었고, 이때 절을 장식했던 무늬 전돌들도 외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은 무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에 들렀을 때의 상상도.|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절정의 예술품은 말기적 증상인가

‘무늬전돌’을 공부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다. 무늬전돌은 물론이고, 서산마애삼존불과 금동대향로, 미륵사탑, 정림사탑 등 백제 예술의 정수라고 하는 작품들이 모두 멸망하기 직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뭐 글 중간에 언급했듯이 웅진 백제(475~538) 이후 끊임없이 중국 육조의 문물을 수혈하면서 나름대로 구축한 독자 문화의 역량이 막판에 한꺼번에 분출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백제의 창업주 온조왕(기원전 18~기원후 28)이 하남위례성을 쌓으면서 유명한 한마디를 남긴다. “온조왕 15년(기원전 4년)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게(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궁실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간첩 도림의 꾐에 빠진 개로왕(455~475)은 사치스러운 궁실을 짓고 웅장한 무덤을 조성하는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창업주의 유훈인 ‘검이불루 화이불치’ 정신을 까맣게 잊고 국고를 탕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려 쇠잔의 길로 접어들었다. 겨우 두 번의 천도를 겪고 나라를 추스렸지만 이번에도 475년의 전철을 밟은 것이 아닌가.

6~7세기 사비백제 시대는 백제 예술의 절정기였다. ‘무늬전돌 세트’를 비롯해 금동대향로와 정림사 5층석탑, 그리고 백제의 미소로 통하는 서산마애미륵삼존불, 미륵사탑 등이 모두 이때 제작됐다.


절정의 예술 뒷면에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채 사치향락에 젖어든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기야 신라 역시 그랬다. 망하기 100여 년 전인 834년(흥덕왕 9년) “백성들이 앞다퉈 사치와 호화를 즐기며 외제명품을 숭상한다”면서 유명한 사치금지법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880년(헌강왕 6년) 월상루에 올라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이냐”면서 신하들과 ‘깔깔’ 거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나 안으로 곪고 있던 신라는 7년 뒤인 진성여왕(887~897) 때부터 급전직하했고, 50년도 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생각도 든다. 끝까지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외쳤다면 과연 백제를 대표하는 예술품들을 창작해낼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그 시대 백성들을 피곤하게 만든 만리장성이나 진시황릉 같은 유적이 지금와서는 후손들이 자랑하는 유산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마침 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 15일부터 내년 5월30일까지 기획전시관에서 ‘백제 산수문전’ 특별전을 열고 있다. ‘무늬 전돌세트’와 함께 백제예술의 투톱인 ‘백제금동대향로’와 함께 전시되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국립부여박물관 홈페이지의 예약자에 한해 시간당 15명씩 6회에 걸쳐 관람할 수 있다.

<참고자료>

이내옥, ‘백제 문양전 연구’, <미술자료> 72권 73호, 국립중앙박물관, 2005

안휘준, <청출어람의 한국미술>, 사회평론, 2010

김성구, <백제의 와전기술>, 주류성, 2004

홍사준, ‘백제 왕흥사지 반출유물’, <고고미술> 92, 한국미술사학회, 1968년

조원교, ‘부여 외리출토 백제 문양전에 관한 연구“, <미술자료> 제74호, 국립중앙박물관, 2008

문봉식, ‘부여 외리출토 문양전에 대한 일고’, 한남대석사논문, 2008

박대남, ‘부여 규암면 외리출토 백제문양전 고찰’, <신라사학보> 14권 14호, 신라사학회, 2008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