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및 고달사지 답사기(2001년 02월 10일 흐림)
오랜만에 다시 신륵사(神勒寺)를 찾았다. 서울에서 가깝다고 답사에서 항상 천대받는 곳이다. 이러한 신륵사를 다시 찾아보게 되니 기대와 즐거움이 앞선다. 어제는 아이들과 에버랜드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에 여주로 길을 떠났다. 여주로 가는 길은 귀경길과 겹쳐 그리 순탄치 않았다. 평소 때 같으면 한시간 남짓 걸릴 길을 두 시간이나 걸렸다. 신륵사 입구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작년 세계 도자기 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던 것 같았다. 새로이 건물도 만들고 환경도 정비되어 많이 깨끗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 들어가는 길도 널려져있던 가게들도 모두 없어져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새로이 조경도 하여 들어가는 느낌이 산뜻하여진 것은 좋아졌지만 너무도 인위적인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 몹시 우려된다. 신륵사 일주문 앞도 역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지만 일주문을 통해 절로 들어가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계획이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주문이란 절의 영역을 알리는 상징물이자 곧 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한 조경은 이러한 기본 원칙을 싸그리 무시하고 말았다. 이제는 일주문으로 통행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기야 입장권을 사 가지고 가려면 일주문을 거칠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일주문은 일주문인 것이다. 원칙마저 망각한 조경을 계획한 사람의 안목이 의심스럽다. 또한 일주문 옆에 아직 정리된 것은 아니겠지만 창고로 사용되는 가건물이 세워져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하는 행동인지..... 그저 지나가는 객이 무어라고 할 것인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절 안에 매점이 보인다. 예전에도 눈에 거슬려 없애버렸으면 하였지만 아직도 남아있다. 마침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드시는 스님이 계셨다. 글쎄다. 자판기 커피와 스님 아직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스님도 인간인지라 그 취향까지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매점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모습이 보였을까. 더욱이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매점은 절집에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바삐 정리하여 절집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절 이름이 신륵(神勒)이라 한 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설과 그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웠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말의 고삐를 잡았더니 순하여져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사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신륵사는 전탑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벽절( 寺)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륵사가 크게 중창된 것은 이곳에서 이적을 일으키며 돌아가신 나옹 때문이라고 한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고 수많은 사리가 나와 이곳에 부도를 세우면서 크게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세가 위축되었지만 영릉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1469년(예종 1년)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1472년(성종 3년)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으며 다음 해에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보은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사대부들의 풍류의 장소로 전락하였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페허화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년)에 중건되었다. 이후 몇 차례 중건되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신륵사(神勒寺)는 다른 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절로서 강 옆에 바로 있는 절은 거의 없다. 내가 다녀본 기억으로는 이 신륵사가 유일하다. 신륵사 입구에는 이 곳이 예전에 유명한 조포(潮浦)나루였고 조운창이 있었다는 유허비가 있다. 한강변을 끼고는 많은 절터가 있다. 이러한 절터는 예전의 조운과 무관하지 않다. 조운선을 운영하고 또 조운로를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 절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한 흔적이 거돈사니 법천사 등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절은 흔적만 남아있고 이렇게 온전히 남아있는 절은 이 신륵사가 유일한 것 같다. 신륵사하면 보제존자 나옹이 생각나는 절이다. 보제존자의 사리탑과 탑비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옹이 이곳에서 열반한 곳이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새로운 절이다.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그래서 봉미산 신륵사라고 불리운다. 사실 신륵사의 뒷산은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엇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산 이름을 이렇게 봉황의 꼬리라고 붙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산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서 절의 명칭을 붙일 때 00산 00사로 부르게 되었는가가 궁금하여진다. 삼국시대에 만하여도 우리가 알고있는 절들은 대부분 도심 내에 있었기 때문에 00산 00사라고 하지는 아니하였을 터 00사라고 불렸을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선종이 들어온 후 구산선문이 확립된 후 자신의 출신을 밝히기 위하여 현재와 같은 명칭이 붙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전탑(보물 226호)으로 향하였다.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안내문에는 다층 전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층을 세어보면 6층이 분명하고 그 윗 부분은 노반이 분명하다. 이렇게 짝수로 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의 탑에서는 그리 쉽게 예를 찾기 힘들다. 예라고 한다면 '경천사지 10층석탑'과 '원각사지 10층석탑'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원나라의 장인이 와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원각사탑은 경천사지탑을 모방한 것인 만큼 우리의 전형으로 보기가 힘든 탑이다. 신륵사 내에 있는 전탑의 중수비에 의하면 탑을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崇禎紀元之再丙午中秋日立). 중수의 기록 등을 볼 때 나는 이러한 짝수의 탑이 된 것은 다시 중수하는 과정에서 층수가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예는 분황사의 탑에서 볼 수 있는데 분황사탑은 그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또한 탑신에는 당초문이 있는 벽돌이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것은 원래의 것이고 당초문이 없는 것은 추후에 중수하면서 교체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탑의 4면의 괴임돌 중 2곳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쪽의 것은 유(酉)이고 동쪽의 것은 묘(卯)라는 글씨는 명확하게 보였다. 남쪽의 것과 북쪽의 것은 마모되거나 돌이 없어져 글이 보이지는 않지만 글이 사방을 명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므로 마모가 심한 남쪽의 글은 오(午)이며 돌이 없어져 버린 북쪽에는 자(子)라는 글이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러한 글을 새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을 표기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는 이 탑이 풍수설에 의하여 비보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방향의 표기 등을 볼 때 조운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과 신앙적인 위안도 주기 위함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탑의 답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를 찾았다. 이색이 발원하여 나옹의 문도와 만들었다는 대장각의 이력을 써놓은 비이다. 대장각비기는 1380년에 만들어 진 비로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기타의 책에 조선시대의 석비의 전형이 된 비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 양식의 변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보다 바로 일년 전에 만들어진 1379년(우왕 5년)에 만들어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를 보면 이미 이러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지붕돌이 대장각기비보다 정치하게 만들어진 것과 기단부분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의 형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민왕시절(1377년)에 만들어진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 참조)를 보면 나옹의 탑비와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광통보제선사비는 측면에 비신을 감싸는 돌이 없고 지붕돌이 간략화되어 대장각기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서보면 고려 중기인 1132년(인종 10년)에 만들어진 선봉사 대각국사비(僊鳳寺 大覺國師碑:보물 제251호)을 보면 귀부가 없이 비좌와 이수만이 있고, 1185년(명종 15년)에 만들어진 서봉사 현오국사탑비(瑞峰寺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와 묘향산 보현사비(1141년:북한문화재와 문화유적 참조)를 보면 이미 귀부와 이수가 없는 탑비나 비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양식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 이어서 광통보제선사비가 만들어지고 대장각기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예는 이보다 조금 뒤에 만들어진 보물 제 14호로 지정된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 眞覺國師圓照塔碑)에서도 보이고 있다. 결국 조선시대의 비의 변천은 이미 이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양식 계승의 과정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옆에 있는 비의 해석문을 보면서 눈에 띄는 것이 대장각을 2층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층의 집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집은 중층의 집이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집은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여 준다. 고려시대의 불화를 보면 중층의 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이곳에서도 기록에서나마 다시 찾아볼 수 있어 반가웠다.
이제는 발길을 돌려 절의 중심부로 향하였다. 절의 마당에는 보물 225호로 지정되고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 석탑이다. 대리석 석탑은 앞서 언급한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이 있지만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대리석의 석질은 매우 치밀하고 연하여 정밀한 조각이 가능하다. 그래서 경천사지 석탑을 보면 건물의 형태가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대리석의 성질 때문에 서양에서는 일찍이 조각이 발달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조각이 발달하여 온 것만을 보아도 돌과 조각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리석뿐만 아니라 납석과 같이 석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조각하기가 쉽고 정치한 작업이 가능한 돌이 그리 인기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는 우선 채취할 수 있는 양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러한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철감선사의 부도탑을 보면 그 정치함은 대리석이나 납석으로 조각하였을 때 못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석이나 납석을 다룰 때 보다 수십 배의 공력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강석을 사용하는 것은 그 보존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래 보전되기 위해서는 돌의 강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돌보다 화강석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1472년(성종 3년)에 만들어졌다는 석탑을 보니 이미 한 번 이상 도괴되었던 것을 다시 세운 것 같다. 현재는 7층까지 남아있지만 체감률로 보아서는 9층이었던 것 같다. 석탑에 베풀어진 조각은 '역시 대리석이다'할 정도로 정교하였다. 특히 기단부의 용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러한 석공의 솜씨가 후대로 이어져서 도갑사의 도선수미비를 만들고 최종에는 경복궁의 수많은 석물까지 완성시켰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에 있는 극락보전은 지방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는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이 건물도 임진란 후 다시 중건되었다가 정조 21년(1797년)에 다시 2차 중건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건물은 잘 다듬어진 기단 위에 있어 이 기단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하인방 아래 고맥이 부분이 벽돌로 가려져 있다. 원래의 모습이 이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0년대에 들어와 손쉽게 손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변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내부의 우물마루를 보니 조금 벌어진 틈이 있어 마루널의 두께를 가름하여 볼 수가 있었다. 마룻널의 두께가 최소한 2치(약 5㎝)를 훨씬 넘어 보이는 것이 현재와는 재료의 씀씀이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을 돌아보다 보니 옆으로 들어가는 문에 볏집을 꼬아 만든 끈이 달려있었다. 형태는 절구공이 처럼 생긴 것이 길이 1.2m정도인데 도대체 그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절에서 생활하시는 분에게 여쭈어 보니 문을 열 때, 문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설치하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간결하면서도 그 기능성이 살아있어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 진다. 건물의 뒤로 돌아가 보니 중앙 어칸에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기 힘든 경우이다. 차후에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후면 중앙의 두 기둥이 많이 기울어 졌다. 매우 위태롭게 보인다. 수직도로 볼 때 이미 무게의 중심이 기둥의 중심을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한다. 하루 바삐 손을 쓰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대웅보전의 옆에 있는 조사당(보물 제180호)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조사당은 지공, 나옹, 무악 삼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이 든다.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문이 간다. 조선조 초기의 건물이라고 하면 쇠서가 앙서의 모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후기가 대대적인 중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도 건립시기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의 특징이 '천장 모두를 우물반자를 하여 대들보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너무 안이한 설명이라고 본다. 팔작지붕을 한 건물들은 대부분 우물반자를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특히 선자서까래가 걸리는 부분에는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하는데 이것은 그 부분에 결구가 복잡하여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은 크기가 작아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하는 것이 번거럽기 때문에 전체를 우물반자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한칸 집에는 대들보가 없는 것 이 집의 특징이라고 하였는데 특징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칸집에서 대들보를 세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목구조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보물로 지정된 송광사의 약사전(보물 302호)도 단칸집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안내문을 보니 영문으로 표기한 부분에 특이한 것이 눈에 띠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예전의 표기인 'chosun'이라고 하지 않고 'joseon'이라고 표기하였다. 발음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 같아 보기는 좋았지만 이것이 우리 나라 모든 표기의 원칙으로 정하여진 것을 반영하는 것인지 또는 이곳만의 표현인지는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사당 옆에는 잘 만들어진 부도가 2기가 있다. 1기는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이고 또한기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66년 조사당 뒤쪽에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며 팔각당형부도에서는 사리기가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두 부도는 매우 수준이 높은 부도이지만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부도보다도 더 수준이 낮은 부도도 지방유형문화재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있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가 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지 궁금할 뿐이다. 하루 바삐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앞에 있는 부도는 근세에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만들었다기 보다는 조선조 초기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몸돌이나 지붕돌의 형태를 볼 때 조선 조 초기까지 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로 넘어가지 않는 것은 지붕돌에 있는 문양이 연엽의 문양이어서 절대 고려시대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고 단지 지붕 우동 끝단 하나 건너 새겨져있는 용두의 형상으로 볼 때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악대사의 것과 닮아 그 시대를 추정하여 볼뿐이다. 뒷 쪽에 있는 팔각당형의 부도는 몸돌에 범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만든 솜씨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수작이다. 이 부도는 정확한 팔각당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고려 후기로 넘어오면서 정확한 팔각당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도를 찾아보기 힘든데 이 곳의 부도가 그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이채로웠다. 기회가 되면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리기를 확인하여 시대를 추정하여 보도록 할 것이다.
부도의 답사를 마치고 위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를 보기 위하여 언덕길을 올랐다. 나옹의 부도가 있는 위치가 이미 그의 존재를 확인하여 준다. 신륵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계단(戒壇)형식에 모셔져있는 부도(보물 제228호: 1379년) 그 앞의 석등(보물 제231호) 그리고 탑비(보물 제229호) 모두가 구비된 형식을 갖추어 그의 죽음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대하여 피살설까지 나오지만 보우가 갑작스러운 왕명을 받고 옮겨가는 과정이 기존의 세력과의 알력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회암사의 선각왕사비문에 의하면 유생의 시기로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유생들만이 시기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석종형 부도에서 이러한 계단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곳(용연사, 금산사, 통도사)은 모두가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다른 형식의 부도에서도 실제적으로 이렇게 단을 쌓아 모신 예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보우의 위상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옹의 부도가 휴전선 이남에만 3곳에 있고 영변의 안심사의 석종탑비를 보면 이색이 비문을 써준 비만도 7개소가 되고 기타 나옹이 사용하던 법의와 불구(佛具)를 나누어 안치한 곳만도 9개소가 되는 것을 보아도 당대에서 나옹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하였는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부도의 형식를 놓고 보더라도 석종형의 부도에서 이만큼 정성을 보인 부도는 없다. 형식은 단순하지만 힘있고 선이 정확하게 살아있어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상륜부의 화염형 보주가 자칫 단순하게 느낄 형태에 반전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너무 사치스럽지도 않은 석종형 부도의 수작이다.
옆에 있는 탑비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도기의 형식을 보여준다. 아래에 있는 대장각기비와 다른 점은 기단부가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이고 지붕의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어 지붕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지만 처마의 모습은 잘 표현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지금의 형식과는 다른 구성을 하고 있어 잘 관찰하고 연구하여 볼 가치가 있으나 지금의 사정이 허락치 않아 다음을 기약하였다. 석등은 형식에 있어 다른 석등과 차별된다. 우선 화사석이 화강석이 아닌 납석으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후대에 갈아 끼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석등이다. 화사석이 다른 석등과는 달리 조각하기에 한결 손쉬운 납석으로 되어있어 다른 석등과는 달리 고부조로 비천상과 용문양이 조각되어있고, 일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등이 네곳에 창이 있는 반면 이 석등은 8곳에 모두에 창이 뚤려 있다. 또한 화창은 아라비아 풍의 창으로 되어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화창 상부의 조각을 보면 주변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드는데 이 조각은 화창에 설치된 사창(紗窓)시설과 문양의 연계가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돌의 성질에 비하면 이곳에 베풀어진 조각의 솜씨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비천상이나 용의 조각도 정치(精緻)하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석등 대석인 화강석을 다룬 솜씨를 보면 그 수순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당대에서는 보기 힘든 석등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강변에 있는 삼층석탑을 찾았다. 이 탑은 나옹의 다비가 있었던 장소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읍지에는 이곳이 다비를 하였던 곳이고 그 것을 기념하여 만든 석탑이라는 것이 구전하여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과연 이곳에서 다비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당대의 고승의 다비가 있었다면 대규모의 행사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바위가 너무 좁고 바로 옆에 탑이 있는 장소에서 다비를 진행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탑의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층기단부에 복련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은 후기 고려양식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것이 고려말에 만들어진 것일까 하는 점에는 의문이 간다. 하여간 이 탑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를 해보아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삼층석탑의 옆에는 근자에 만들어진 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이름은 강월헌(江月軒)이다. 루각의 이름에 헌(軒)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였다. 나중에 돌아와 선각왕사비문을 읽으면서 이것이 회암사에서 나옹선사가 머무르던 거처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신륵사의 모든 것을 나옹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이렇게 정자에까지 나옹의 흔적은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 충숙왕 7년 - 1376 우왕 2년) 성은 아(牙)씨 속명은 元惠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출가하였다. 그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에 회암사에서 대오하였다. 이때 회암사에서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서 인가를 받고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의 법원사(法源寺)에서 머물렀다. 귀국한 후 여러 절을 돌다가 1361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홍건적 난이 평정된 후인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 등을 하사받으면서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왕명으로 송광사에 있었다. 다시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만나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지공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왕명을 받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다. 나옹은 고려말 정도를 잃어버린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와 근수(勤修), 지혜로서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 선풍이 그에 의해서 새롭게 선양되었다. 그는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종래의 구산선문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염불을 곧 참선이다'라고 한 말은 이후의 선종에 계속 전승되었다. 그는 고려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와 함께 조선불교의 초석을 마련한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왕의 명으로 밀성(현 밀양)의 염원사로 옮기던 중 5월 16일 57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선사는 홍건적난 동안에도 절을 지켰는데 홍건적도 그 위엄에 눌려 물러갔다고 한다. 그의 선법은 현실 참여성격이 강하여 아마도 중앙의 권력과 마찰이 있었던 듯하다.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마치고 낙성법회를 하는 동안 수많은 부녀자들이 회암사를 찾아 급기야 나라에서는 관리를 보내 산문의 왕래를 금하기까지 하다가 결국은 임금이 명을 내려 밀양으로 떠나게 된다.(참고도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답사여행의 길잡이,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륵사의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목아박물관으로 향하였다. 예전이 근처를 답사하였을 때 목아박물관 앞의 식당에서 먹었던 두부가 맛있었던 기억이 생생하였다. 집사람도 동의하였다. 혹시나 없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하였는데 가보니 그 우려대로 음식점이 없어졌다. 어디로 갈까하고 고민하였더니 목아박물관 안에 사찰음식 전문점의 간판이 보였다. 목아박물관을 볼 생각은 없어 매표소에서 식사만 하려한다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하였다. 찾아간 음식점은 초가집의 분위기였다. 내부도 토속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음식의 종류는 산사정식(15,000원), 도토리묵밥(5000), 도토리칼국수(6000), 산채비빔밥(5,000), 장떡(4,000) 등을 하였다. 점심을 정식으로 하기에는 무엇하여 여러 가지 먹어볼 겸하여 도토리묵밥, 도토리칼국수, 산채비빔밥, 장떡을 시켰다. 우선 '장떡'이 먼저 나왔다. '장떡'이란 고추장으로 간을 한 부친개이다. 나도 '장떡'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약간 짜기는 하였지만 매콤하면서도 쌉사름한 맛은 일반의 부친개와 다른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다른 음식이 같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묵밥은 다른 곳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묵밥은 국물이 흥건하여 국물에 말아먹는 느낌이었지만 이곳은 비벼먹는 묵밥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여주셨는데 그것이 좋아 그대로 한다고 하신다. 나도 물에 말아 나오는 묵밥보다는 훨씬 맛이 있어 좋았다. 산채비빔밥도 매우 정갈하고 비빔밥의 핵심인 고추장의 맛도 매우 좋아 오랜만에 잘 어우러진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현우가 먹은 도토리칼국수도 국물에서 매우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맛 자체로 본다면 90점 정도는 쉽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신륵사에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으니 신륵사를 찾는 분은 괜히 신륵사 앞의 관광지의 그렇고 그런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조금 이동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보는 목아박물관의 마당은 그리 좋은 풍광은 아니었다. 들어가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배고픔을 가라앉히고 편한 마음에서 본 풍광은 더욱 편안하지 않았다. 이곳의 정확한 내력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인 불교계통의 문화재를 만드는 장인으로 알고 있고 그가 불교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 개설한 곳이라는 정도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마당의 풍광은 과연 이곳이 진정 한국의 불교문화를 모아 만든 박물관인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우선 집과 조경의 솜씨가 주인의 안목을 의심할 정도였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신을 과시하고자 만든 정원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주인의 집인 듯한 건물도 건축적인 품격을 느낄 수 없고 자료의 배치 또한 원칙이 없이 배치되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함인지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먹으러 들어가면서 웬만하면 둘러보려고도 하였지만 첫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아 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나는 요사이 몇몇의 성공한 작가 또는 장인들이 자신의 부를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곳의 주인도 그러한 사람이 아니길 바라면서 박물관을 나섰다.
식사를 하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고달사지를 찾아가는 것은 얼마 전 나의 화두로 떠오른 국보 4호의 부도가 과연 누구의 부도인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번으로 고달사지의 답사가 다섯 번째이다. 자주 가본 곳도 늘 새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같은 곳도 또 가보게 된다. 이 번의 고달사지도 부도의 주인을 확인하고자 함도 있지만 새로이 발굴한 부분에 대한 재확인하고자 함도 있다. 고달사지입구로 들어서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8개월 전쯤 이곳에 왔을 때만 없었던 주차장이 초입에 생겼다. 또한 주변에 있었던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지만 정리되지 않아 가뜩이나 흐린 날씨 때문에 더욱 을씨년 한 분위기가 되었다. 차를 안에 있는 절 앞에 주차를 주차시키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황량하지만 정감 어린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를 지나 목적지인 금당으로 향하였다. 금당의 불대좌 앞에서 나침반으로 두 부도의 향을 확인하였다. 두 부도 모두 북서쪽에 있었다. 원종대사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의 부도를 '혜목산 북서쪽 기슭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나침반의 확인 결과는 현재 원종대사부도라고 불리는 부도는 북북서 방향에 위치하였고 국보 4호인 부도는 북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기울어진 곳에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슭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국보 4호인 부도가 더 기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현 국보 4호가 원종대사부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침반으로 부도의 위치를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금당의 주변을 돌아보니 금당의 기단 주변에 돌이 90㎝ 정도의 폭으로 깔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돌의 포장은 주변에 많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건물간에 연결을 위하여 만든 답도(踏道)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포석은 석등 자리와 석탑 자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주변의 건물지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고달사지는 이러한 돌포장 답도로 연결되어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거의 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하나가 이미 달성되었다. 그간 보지 못하였던 것이 다시 눈에 보인 것이다. 답사는 시간을 가지고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나름의 답사의 방법을 제시한다면 여러 곳을 보고, 반복하여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병행하여야 한다. 무조건 많은 시간을 가지고 본다고 하여도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으므로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다. 한 곳을 가더라도 공부를 하고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많이 보지 못하면 비교가 되지 않아 문화의 깊이와 시대적인 구분을 할 수 없어 깊이가 깊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같은 곳이라도 반복하여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답사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 부도 향하기 전에 목 없는 귀부를 찾아보았다. 작지만 최고의 귀부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부도이다. 특히 비좌 옆에 있는 날개의 모습은 최고의 솜씨이다. 거북의 둥 옆에 있는 문양은 고달사지 귀부의 문양과 비슷하여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운다. 나는 이 귀부가 지금 우리가 칭하는 원종대사의 부도와 관계가 있고 지금 원종대사의 부도는 국보 4호인 부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 국보 4호로 향하였다. 국보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을 답사하러 온 부부와 같이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고달사지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를 하여 주었다. 고달사는 고달원(高達院)이라고 불렸으며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함께 삼대선원이었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년)에 창건된 절이다. 경문왕 때(861년-875년) 원감 현욱(圓鑑 玄昱)이 왕의 청으로 이곳에 주석하여 법을 폈으며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가 이곳에 와서 현욱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후 현욱의 제자인 찬유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전후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올라가서 본 고달사지 부도는 늘 그렇듯이 장엄함을 드러내어 보이면서 말없이 서있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정성을 드렸을까 하는 생각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머리 속에 가득한데 속시원하게 대답하여 주는 이는 없다. 부도 기단의 문양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역시 한사람이 만든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솜씨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우측을 담당한 이의 솜씨가 더욱 뛰어난 것임을 느낀다. 고달사지 부도의 용두를 보면 용두를 장식했던 촉의 구멍이 있다. 어떠한 형상의 것을 만들어 놓았을 것인가 상상하여 보았다. 기린의 뿔같은 것 아니면 벼슬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형상이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지만 그리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몇 가지 예로 스켓치를 하여볼 것이다. 다음으로 늘 궁금한 것이 앞에서 있는 석물들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석물은 석등과 배례석 자리로 이해되는 데 그 앞에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 석물은 전혀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일까 상상하여 보아도 짧은 소견으로는 일말의 힌트조차 느낄 수 없다. 아직 공부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래 있는 원종대사부도로 향하였다. 원종대사의 부도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위의 부도에 비하여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부도에서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원종대사부도에서는 그러한 힘을 느낄 수 없다. 전반적으로 섬약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기단부에 있는 용조각 때문인 것 같다. 위에 있는 국보 4호 부도는 귀부가 정면을 바라보고 강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또한 옆에 있는 용 문양도 강하게 용트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하여 원종대사부도의 용은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 정면관을 보이지 않고 측면으로 머리를 돌린 형상을 하고 있어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용의 목이 가늘고 약하게 표현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표정도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문양의 깊이도 두 부도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부도는 구름과 서기(瑞氣)의 문양이 매우 깊어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데 비하여 원종대사의 부도는 그리 깊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석공의 안목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두 부도에서 느끼는 힘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래의 부도도 좌우의 솜씨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용두에서 나오는 서기와 용의 발의 표현을 보면 정면에서 볼 때 좌측의 것이 더욱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다. 우측의 용의 발은 전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데 비하여 좌측의 용의 발은 서기에 가려 조금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우의 용을 비교하여 보면 좌측의 용에서 더욱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어 좌측의 용이 한 수위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래의 용이 '정면을 보지 않고 머리를 돌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다. 단지 돌의 크기가 부족하여 머리를 돌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혹시 위에 있는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나름대로 상상이 머리를 스쳐간다. 위의 부도와 아래의 부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러한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이러한 상상의 답은 차후로 미루고 고달사지를 떠났다.
오랜만에 다시 신륵사(神勒寺)를 찾았다. 서울에서 가깝다고 답사에서 항상 천대받는 곳이다. 이러한 신륵사를 다시 찾아보게 되니 기대와 즐거움이 앞선다. 어제는 아이들과 에버랜드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에 여주로 길을 떠났다. 여주로 가는 길은 귀경길과 겹쳐 그리 순탄치 않았다. 평소 때 같으면 한시간 남짓 걸릴 길을 두 시간이나 걸렸다. 신륵사 입구의 모습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작년 세계 도자기 축제가 이곳에서 열렸던 것 같았다. 새로이 건물도 만들고 환경도 정비되어 많이 깨끗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 들어가는 길도 널려져있던 가게들도 모두 없어져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새로이 조경도 하여 들어가는 느낌이 산뜻하여진 것은 좋아졌지만 너무도 인위적인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앞으로도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 몹시 우려된다. 신륵사 일주문 앞도 역시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지만 일주문을 통해 절로 들어가는 것이 고려되지 않은 계획이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일주문이란 절의 영역을 알리는 상징물이자 곧 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한 조경은 이러한 기본 원칙을 싸그리 무시하고 말았다. 이제는 일주문으로 통행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기야 입장권을 사 가지고 가려면 일주문을 거칠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일주문은 일주문인 것이다. 원칙마저 망각한 조경을 계획한 사람의 안목이 의심스럽다. 또한 일주문 옆에 아직 정리된 것은 아니겠지만 창고로 사용되는 가건물이 세워져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하는 행동인지..... 그저 지나가는 객이 무어라고 할 것인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절 안에 매점이 보인다. 예전에도 눈에 거슬려 없애버렸으면 하였지만 아직도 남아있다. 마침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드시는 스님이 계셨다. 글쎄다. 자판기 커피와 스님 아직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스님도 인간인지라 그 취향까지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매점이 없었더라면 그러한 모습이 보였을까. 더욱이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매점은 절집에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바삐 정리하여 절집다운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였다는 설화가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 절 이름이 신륵(神勒)이라 한 데는 미륵 또는 왕사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를 막았다는 설과 그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웠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말의 고삐를 잡았더니 순하여져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사로 하였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신륵사는 전탑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벽절( 寺)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륵사가 크게 중창된 것은 이곳에서 이적을 일으키며 돌아가신 나옹 때문이라고 한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리고 수많은 사리가 나와 이곳에 부도를 세우면서 크게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세가 위축되었지만 영릉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1469년(예종 1년)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면서 1472년(성종 3년)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으며 다음 해에 대왕대비의 명에 의하여 보은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사대부들의 풍류의 장소로 전락하였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페허화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년)에 중건되었다. 이후 몇 차례 중건되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신륵사(神勒寺)는 다른 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절로서 강 옆에 바로 있는 절은 거의 없다. 내가 다녀본 기억으로는 이 신륵사가 유일하다. 신륵사 입구에는 이 곳이 예전에 유명한 조포(潮浦)나루였고 조운창이 있었다는 유허비가 있다. 한강변을 끼고는 많은 절터가 있다. 이러한 절터는 예전의 조운과 무관하지 않다. 조운선을 운영하고 또 조운로를 확보하기 위한 시설로 절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그러한 흔적이 거돈사니 법천사 등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절은 흔적만 남아있고 이렇게 온전히 남아있는 절은 이 신륵사가 유일한 것 같다. 신륵사하면 보제존자 나옹이 생각나는 절이다. 보제존자의 사리탑과 탑비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옹이 이곳에서 열반한 곳이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새로운 절이다. 신륵사는 봉미산(鳳尾山)에 있다. 그래서 봉미산 신륵사라고 불리운다. 사실 신륵사의 뒷산은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엇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산 이름을 이렇게 봉황의 꼬리라고 붙이지 않았을까. 이러한 산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서 절의 명칭을 붙일 때 00산 00사로 부르게 되었는가가 궁금하여진다. 삼국시대에 만하여도 우리가 알고있는 절들은 대부분 도심 내에 있었기 때문에 00산 00사라고 하지는 아니하였을 터 00사라고 불렸을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선종이 들어온 후 구산선문이 확립된 후 자신의 출신을 밝히기 위하여 현재와 같은 명칭이 붙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우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전탑(보물 226호)으로 향하였다. 늘 같은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안내문에는 다층 전탑으로 기록되어 있다. 층을 세어보면 6층이 분명하고 그 윗 부분은 노반이 분명하다. 이렇게 짝수로 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의 탑에서는 그리 쉽게 예를 찾기 힘들다. 예라고 한다면 '경천사지 10층석탑'과 '원각사지 10층석탑'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원나라의 장인이 와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고 원각사탑은 경천사지탑을 모방한 것인 만큼 우리의 전형으로 보기가 힘든 탑이다. 신륵사 내에 있는 전탑의 중수비에 의하면 탑을 영조 2년(1726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崇禎紀元之再丙午中秋日立). 중수의 기록 등을 볼 때 나는 이러한 짝수의 탑이 된 것은 다시 중수하는 과정에서 층수가 변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예는 분황사의 탑에서 볼 수 있는데 분황사탑은 그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또한 탑신에는 당초문이 있는 벽돌이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이것은 원래의 것이고 당초문이 없는 것은 추후에 중수하면서 교체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탑의 4면의 괴임돌 중 2곳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쪽의 것은 유(酉)이고 동쪽의 것은 묘(卯)라는 글씨는 명확하게 보였다. 남쪽의 것과 북쪽의 것은 마모되거나 돌이 없어져 글이 보이지는 않지만 글이 사방을 명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므로 마모가 심한 남쪽의 글은 오(午)이며 돌이 없어져 버린 북쪽에는 자(子)라는 글이 있었을 것이다. 왜 이러한 글을 새겨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을 표기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는 이 탑이 풍수설에 의하여 비보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방향의 표기 등을 볼 때 조운을 하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과 신앙적인 위안도 주기 위함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탑의 답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를 찾았다. 이색이 발원하여 나옹의 문도와 만들었다는 대장각의 이력을 써놓은 비이다. 대장각비기는 1380년에 만들어 진 비로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기타의 책에 조선시대의 석비의 전형이 된 비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 양식의 변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보다 바로 일년 전에 만들어진 1379년(우왕 5년)에 만들어진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를 보면 이미 이러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지붕돌이 대장각기비보다 정치하게 만들어진 것과 기단부분이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의 형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한 공민왕시절(1377년)에 만들어진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 참조)를 보면 나옹의 탑비와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광통보제선사비는 측면에 비신을 감싸는 돌이 없고 지붕돌이 간략화되어 대장각기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금 더 앞으로 가서보면 고려 중기인 1132년(인종 10년)에 만들어진 선봉사 대각국사비(僊鳳寺 大覺國師碑:보물 제251호)을 보면 귀부가 없이 비좌와 이수만이 있고, 1185년(명종 15년)에 만들어진 서봉사 현오국사탑비(瑞峰寺 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와 묘향산 보현사비(1141년:북한문화재와 문화유적 참조)를 보면 이미 귀부와 이수가 없는 탑비나 비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양식의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 이어서 광통보제선사비가 만들어지고 대장각기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예는 이보다 조금 뒤에 만들어진 보물 제 14호로 지정된 창성사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彰聖寺 眞覺國師圓照塔碑)에서도 보이고 있다. 결국 조선시대의 비의 변천은 이미 이전부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양식 계승의 과정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옆에 있는 비의 해석문을 보면서 눈에 띄는 것이 대장각을 2층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중층의 집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나라의 집은 중층의 집이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집은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여 준다. 고려시대의 불화를 보면 중층의 집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를 이곳에서도 기록에서나마 다시 찾아볼 수 있어 반가웠다.
이제는 발길을 돌려 절의 중심부로 향하였다. 절의 마당에는 보물 225호로 지정되고 우리 나라에서 보기 드문 대리석 석탑이다. 대리석 석탑은 앞서 언급한 경천사지 10층 석탑과 원각사지 10층 석탑 등이 있지만 그리 흔한 것은 아니다. 대리석의 석질은 매우 치밀하고 연하여 정밀한 조각이 가능하다. 그래서 경천사지 석탑을 보면 건물의 형태가 정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대리석의 성질 때문에 서양에서는 일찍이 조각이 발달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조각이 발달하여 온 것만을 보아도 돌과 조각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대리석뿐만 아니라 납석과 같이 석질이 부드러우면서도 조각하기가 쉽고 정치한 작업이 가능한 돌이 그리 인기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는 우선 채취할 수 있는 양에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러한 것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철감선사의 부도탑을 보면 그 정치함은 대리석이나 납석으로 조각하였을 때 못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석이나 납석을 다룰 때 보다 수십 배의 공력이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강석을 사용하는 것은 그 보존성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오래 보전되기 위해서는 돌의 강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른 돌보다 화강석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1472년(성종 3년)에 만들어졌다는 석탑을 보니 이미 한 번 이상 도괴되었던 것을 다시 세운 것 같다. 현재는 7층까지 남아있지만 체감률로 보아서는 9층이었던 것 같다. 석탑에 베풀어진 조각은 '역시 대리석이다'할 정도로 정교하였다. 특히 기단부의 용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이러한 석공의 솜씨가 후대로 이어져서 도갑사의 도선수미비를 만들고 최종에는 경복궁의 수많은 석물까지 완성시켰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뒤에 있는 극락보전은 지방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지정되었다. 신륵사는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이 건물도 임진란 후 다시 중건되었다가 정조 21년(1797년)에 다시 2차 중건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건물은 잘 다듬어진 기단 위에 있어 이 기단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건물을 찬찬히 살펴보니 하인방 아래 고맥이 부분이 벽돌로 가려져 있다. 원래의 모습이 이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0년대에 들어와 손쉽게 손을 본다는 것이 이렇게 변화시켜 버리고 말았다. 내부의 우물마루를 보니 조금 벌어진 틈이 있어 마루널의 두께를 가름하여 볼 수가 있었다. 마룻널의 두께가 최소한 2치(약 5㎝)를 훨씬 넘어 보이는 것이 현재와는 재료의 씀씀이가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을 돌아보다 보니 옆으로 들어가는 문에 볏집을 꼬아 만든 끈이 달려있었다. 형태는 절구공이 처럼 생긴 것이 길이 1.2m정도인데 도대체 그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절에서 생활하시는 분에게 여쭈어 보니 문을 열 때, 문이 벽에 부딪히지 않도록 설치하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간결하면서도 그 기능성이 살아있어 저절로 머리가 끄덕여 진다. 건물의 뒤로 돌아가 보니 중앙 어칸에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보기 힘든 경우이다. 차후에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후면 중앙의 두 기둥이 많이 기울어 졌다. 매우 위태롭게 보인다. 수직도로 볼 때 이미 무게의 중심이 기둥의 중심을 벗어난 듯 보이기도 한다. 하루 바삐 손을 쓰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대웅보전의 옆에 있는 조사당(보물 제180호)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조사당은 지공, 나옹, 무악 삼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이 든다.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보기에는 많은 의문이 간다. 조선조 초기의 건물이라고 하면 쇠서가 앙서의 모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후기가 대대적인 중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도 건립시기에 대하여 여러 의견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의 특징이 '천장 모두를 우물반자를 하여 대들보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너무 안이한 설명이라고 본다. 팔작지붕을 한 건물들은 대부분 우물반자를 한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특히 선자서까래가 걸리는 부분에는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하는데 이것은 그 부분에 결구가 복잡하여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은 크기가 작아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하는 것이 번거럽기 때문에 전체를 우물반자를 한 것이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한칸 집에는 대들보가 없는 것 이 집의 특징이라고 하였는데 특징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칸집에서 대들보를 세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목구조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보물로 지정된 송광사의 약사전(보물 302호)도 단칸집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안내문을 보니 영문으로 표기한 부분에 특이한 것이 눈에 띠었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예전의 표기인 'chosun'이라고 하지 않고 'joseon'이라고 표기하였다. 발음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 같아 보기는 좋았지만 이것이 우리 나라 모든 표기의 원칙으로 정하여진 것을 반영하는 것인지 또는 이곳만의 표현인지는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조사당 옆에는 잘 만들어진 부도가 2기가 있다. 1기는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이고 또한기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66년 조사당 뒤쪽에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며 팔각당형부도에서는 사리기가 발견되어 현재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두 부도는 매우 수준이 높은 부도이지만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부도보다도 더 수준이 낮은 부도도 지방유형문화재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있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도가 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지 궁금할 뿐이다. 하루 바삐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앞에 있는 부도는 근세에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만들었다기 보다는 조선조 초기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몸돌이나 지붕돌의 형태를 볼 때 조선 조 초기까지 올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로 넘어가지 않는 것은 지붕돌에 있는 문양이 연엽의 문양이어서 절대 고려시대로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고 단지 지붕 우동 끝단 하나 건너 새겨져있는 용두의 형상으로 볼 때 양주 회암사에 있는 무악대사의 것과 닮아 그 시대를 추정하여 볼뿐이다. 뒷 쪽에 있는 팔각당형의 부도는 몸돌에 범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만든 솜씨는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수작이다. 이 부도는 정확한 팔각당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고려 후기로 넘어오면서 정확한 팔각당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도를 찾아보기 힘든데 이 곳의 부도가 그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매우 이채로웠다. 기회가 되면 동국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리기를 확인하여 시대를 추정하여 보도록 할 것이다.
부도의 답사를 마치고 위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의 부도를 보기 위하여 언덕길을 올랐다. 나옹의 부도가 있는 위치가 이미 그의 존재를 확인하여 준다. 신륵사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계단(戒壇)형식에 모셔져있는 부도(보물 제228호: 1379년) 그 앞의 석등(보물 제231호) 그리고 탑비(보물 제229호) 모두가 구비된 형식을 갖추어 그의 죽음에 대한 예를 다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대하여 피살설까지 나오지만 보우가 갑작스러운 왕명을 받고 옮겨가는 과정이 기존의 세력과의 알력이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회암사의 선각왕사비문에 의하면 유생의 시기로 갑자기 떠나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유생들만이 시기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석종형 부도에서 이러한 계단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곳(용연사, 금산사, 통도사)은 모두가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다른 형식의 부도에서도 실제적으로 이렇게 단을 쌓아 모신 예가 그리 많지 않다. 그만큼 보우의 위상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옹의 부도가 휴전선 이남에만 3곳에 있고 영변의 안심사의 석종탑비를 보면 이색이 비문을 써준 비만도 7개소가 되고 기타 나옹이 사용하던 법의와 불구(佛具)를 나누어 안치한 곳만도 9개소가 되는 것을 보아도 당대에서 나옹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떠하였는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부도의 형식를 놓고 보더라도 석종형의 부도에서 이만큼 정성을 보인 부도는 없다. 형식은 단순하지만 힘있고 선이 정확하게 살아있어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상륜부의 화염형 보주가 자칫 단순하게 느낄 형태에 반전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너무 사치스럽지도 않은 석종형 부도의 수작이다.
옆에 있는 탑비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도기의 형식을 보여준다. 아래에 있는 대장각기비와 다른 점은 기단부가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이고 지붕의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어 지붕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없지만 처마의 모습은 잘 표현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지금의 형식과는 다른 구성을 하고 있어 잘 관찰하고 연구하여 볼 가치가 있으나 지금의 사정이 허락치 않아 다음을 기약하였다. 석등은 형식에 있어 다른 석등과 차별된다. 우선 화사석이 화강석이 아닌 납석으로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후대에 갈아 끼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석등이다. 화사석이 다른 석등과는 달리 조각하기에 한결 손쉬운 납석으로 되어있어 다른 석등과는 달리 고부조로 비천상과 용문양이 조각되어있고, 일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등이 네곳에 창이 있는 반면 이 석등은 8곳에 모두에 창이 뚤려 있다. 또한 화창은 아라비아 풍의 창으로 되어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화창 상부의 조각을 보면 주변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드는데 이 조각은 화창에 설치된 사창(紗窓)시설과 문양의 연계가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돌의 성질에 비하면 이곳에 베풀어진 조각의 솜씨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다. 비천상이나 용의 조각도 정치(精緻)하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석등 대석인 화강석을 다룬 솜씨를 보면 그 수순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당대에서는 보기 힘든 석등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강변에 있는 삼층석탑을 찾았다. 이 탑은 나옹의 다비가 있었던 장소를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읍지에는 이곳이 다비를 하였던 곳이고 그 것을 기념하여 만든 석탑이라는 것이 구전하여 온다고 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과연 이곳에서 다비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당대의 고승의 다비가 있었다면 대규모의 행사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바위가 너무 좁고 바로 옆에 탑이 있는 장소에서 다비를 진행하였는지 의문이 든다. 탑의 양식으로 보면 고려시대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상층기단부에 복련이 조각되어 있는 모습은 후기 고려양식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이것이 고려말에 만들어진 것일까 하는 점에는 의문이 간다. 하여간 이 탑에 대하여도 많은 연구를 해보아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삼층석탑의 옆에는 근자에 만들어진 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이름은 강월헌(江月軒)이다. 루각의 이름에 헌(軒)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였다. 나중에 돌아와 선각왕사비문을 읽으면서 이것이 회암사에서 나옹선사가 머무르던 거처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신륵사의 모든 것을 나옹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이렇게 정자에까지 나옹의 흔적은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 충숙왕 7년 - 1376 우왕 2년) 성은 아(牙)씨 속명은 元惠 21세 때 친구의 죽음으로 출가하였다. 그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에 회암사에서 대오하였다. 이때 회암사에서 있던 일본 승 석옹(石翁)에게서 인가를 받고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의 법원사(法源寺)에서 머물렀다. 귀국한 후 여러 절을 돌다가 1361년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홍건적 난이 평정된 후인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 등을 하사받으면서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 普濟尊者)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왕명으로 송광사에 있었다. 다시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만나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지공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던 중 왕명을 받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였다. 나옹은 고려말 정도를 잃어버린 불교계에 습정균혜(習定均慧)와 근수(勤修), 지혜로서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 철저한 불이사상(不二思想)의 토대 위에서 선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말 선풍이 그에 의해서 새롭게 선양되었다. 그는 지공의 선풍이 공해탈선(空解脫禪)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종래의 구산선문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또한 '염불을 곧 참선이다'라고 한 말은 이후의 선종에 계속 전승되었다. 그는 고려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와 함께 조선불교의 초석을 마련한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왕의 명으로 밀성(현 밀양)의 염원사로 옮기던 중 5월 16일 57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나옹선사는 홍건적난 동안에도 절을 지켰는데 홍건적도 그 위엄에 눌려 물러갔다고 한다. 그의 선법은 현실 참여성격이 강하여 아마도 중앙의 권력과 마찰이 있었던 듯하다.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마치고 낙성법회를 하는 동안 수많은 부녀자들이 회암사를 찾아 급기야 나라에서는 관리를 보내 산문의 왕래를 금하기까지 하다가 결국은 임금이 명을 내려 밀양으로 떠나게 된다.(참고도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답사여행의 길잡이,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륵사의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목아박물관으로 향하였다. 예전이 근처를 답사하였을 때 목아박물관 앞의 식당에서 먹었던 두부가 맛있었던 기억이 생생하였다. 집사람도 동의하였다. 혹시나 없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우려를 하였는데 가보니 그 우려대로 음식점이 없어졌다. 어디로 갈까하고 고민하였더니 목아박물관 안에 사찰음식 전문점의 간판이 보였다. 목아박물관을 볼 생각은 없어 매표소에서 식사만 하려한다고 하니 그냥 들어가라고 하였다. 찾아간 음식점은 초가집의 분위기였다. 내부도 토속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음식의 종류는 산사정식(15,000원), 도토리묵밥(5000), 도토리칼국수(6000), 산채비빔밥(5,000), 장떡(4,000) 등을 하였다. 점심을 정식으로 하기에는 무엇하여 여러 가지 먹어볼 겸하여 도토리묵밥, 도토리칼국수, 산채비빔밥, 장떡을 시켰다. 우선 '장떡'이 먼저 나왔다. '장떡'이란 고추장으로 간을 한 부친개이다. 나도 '장떡'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약간 짜기는 하였지만 매콤하면서도 쌉사름한 맛은 일반의 부친개와 다른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다른 음식이 같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묵밥은 다른 곳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묵밥은 국물이 흥건하여 국물에 말아먹는 느낌이었지만 이곳은 비벼먹는 묵밥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어머님께서 그렇게 하여주셨는데 그것이 좋아 그대로 한다고 하신다. 나도 물에 말아 나오는 묵밥보다는 훨씬 맛이 있어 좋았다. 산채비빔밥도 매우 정갈하고 비빔밥의 핵심인 고추장의 맛도 매우 좋아 오랜만에 잘 어우러진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둘째 현우가 먹은 도토리칼국수도 국물에서 매우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맛 자체로 본다면 90점 정도는 쉽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신륵사에서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으니 신륵사를 찾는 분은 괜히 신륵사 앞의 관광지의 그렇고 그런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조금 이동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보는 목아박물관의 마당은 그리 좋은 풍광은 아니었다. 들어가면서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배고픔을 가라앉히고 편한 마음에서 본 풍광은 더욱 편안하지 않았다. 이곳의 정확한 내력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곳의 주인인 불교계통의 문화재를 만드는 장인으로 알고 있고 그가 불교에 관련된 자료를 모아 개설한 곳이라는 정도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마당의 풍광은 과연 이곳이 진정 한국의 불교문화를 모아 만든 박물관인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 우선 집과 조경의 솜씨가 주인의 안목을 의심할 정도였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신을 과시하고자 만든 정원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느낄 정도였다. 주인의 집인 듯한 건물도 건축적인 품격을 느낄 수 없고 자료의 배치 또한 원칙이 없이 배치되어 무엇을 보여주고자 함인지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먹으러 들어가면서 웬만하면 둘러보려고도 하였지만 첫인상부터 그리 좋지 않아 보는 것을 포기하였다. 나는 요사이 몇몇의 성공한 작가 또는 장인들이 자신의 부를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이곳의 주인도 그러한 사람이 아니길 바라면서 박물관을 나섰다.
식사를 하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고달사지를 찾아가는 것은 얼마 전 나의 화두로 떠오른 국보 4호의 부도가 과연 누구의 부도인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번으로 고달사지의 답사가 다섯 번째이다. 자주 가본 곳도 늘 새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같은 곳도 또 가보게 된다. 이 번의 고달사지도 부도의 주인을 확인하고자 함도 있지만 새로이 발굴한 부분에 대한 재확인하고자 함도 있다. 고달사지입구로 들어서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8개월 전쯤 이곳에 왔을 때만 없었던 주차장이 초입에 생겼다. 또한 주변에 있었던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지만 정리되지 않아 가뜩이나 흐린 날씨 때문에 더욱 을씨년 한 분위기가 되었다. 차를 안에 있는 절 앞에 주차를 주차시키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황량하지만 정감 어린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를 지나 목적지인 금당으로 향하였다. 금당의 불대좌 앞에서 나침반으로 두 부도의 향을 확인하였다. 두 부도 모두 북서쪽에 있었다. 원종대사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의 부도를 '혜목산 북서쪽 기슭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나침반의 확인 결과는 현재 원종대사부도라고 불리는 부도는 북북서 방향에 위치하였고 국보 4호인 부도는 북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기울어진 곳에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슭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국보 4호인 부도가 더 기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현 국보 4호가 원종대사부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침반으로 부도의 위치를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금당의 주변을 돌아보니 금당의 기단 주변에 돌이 90㎝ 정도의 폭으로 깔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돌의 포장은 주변에 많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건물간에 연결을 위하여 만든 답도(踏道)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포석은 석등 자리와 석탑 자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주변의 건물지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고달사지는 이러한 돌포장 답도로 연결되어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거의 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하나가 이미 달성되었다. 그간 보지 못하였던 것이 다시 눈에 보인 것이다. 답사는 시간을 가지고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나름의 답사의 방법을 제시한다면 여러 곳을 보고, 반복하여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병행하여야 한다. 무조건 많은 시간을 가지고 본다고 하여도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으므로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다. 한 곳을 가더라도 공부를 하고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많이 보지 못하면 비교가 되지 않아 문화의 깊이와 시대적인 구분을 할 수 없어 깊이가 깊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같은 곳이라도 반복하여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답사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 부도 향하기 전에 목 없는 귀부를 찾아보았다. 작지만 최고의 귀부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부도이다. 특히 비좌 옆에 있는 날개의 모습은 최고의 솜씨이다. 거북의 둥 옆에 있는 문양은 고달사지 귀부의 문양과 비슷하여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운다. 나는 이 귀부가 지금 우리가 칭하는 원종대사의 부도와 관계가 있고 지금 원종대사의 부도는 국보 4호인 부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 국보 4호로 향하였다. 국보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을 답사하러 온 부부와 같이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고달사지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를 하여 주었다. 고달사는 고달원(高達院)이라고 불렸으며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함께 삼대선원이었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년)에 창건된 절이다. 경문왕 때(861년-875년) 원감 현욱(圓鑑 玄昱)이 왕의 청으로 이곳에 주석하여 법을 폈으며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가 이곳에 와서 현욱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후 현욱의 제자인 찬유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전후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올라가서 본 고달사지 부도는 늘 그렇듯이 장엄함을 드러내어 보이면서 말없이 서있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정성을 드렸을까 하는 생각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머리 속에 가득한데 속시원하게 대답하여 주는 이는 없다. 부도 기단의 문양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역시 한사람이 만든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솜씨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우측을 담당한 이의 솜씨가 더욱 뛰어난 것임을 느낀다. 고달사지 부도의 용두를 보면 용두를 장식했던 촉의 구멍이 있다. 어떠한 형상의 것을 만들어 놓았을 것인가 상상하여 보았다. 기린의 뿔같은 것 아니면 벼슬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형상이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지만 그리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몇 가지 예로 스켓치를 하여볼 것이다. 다음으로 늘 궁금한 것이 앞에서 있는 석물들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석물은 석등과 배례석 자리로 이해되는 데 그 앞에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 석물은 전혀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일까 상상하여 보아도 짧은 소견으로는 일말의 힌트조차 느낄 수 없다. 아직 공부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래 있는 원종대사부도로 향하였다. 원종대사의 부도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위의 부도에 비하여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부도에서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원종대사부도에서는 그러한 힘을 느낄 수 없다. 전반적으로 섬약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기단부에 있는 용조각 때문인 것 같다. 위에 있는 국보 4호 부도는 귀부가 정면을 바라보고 강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또한 옆에 있는 용 문양도 강하게 용트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하여 원종대사부도의 용은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 정면관을 보이지 않고 측면으로 머리를 돌린 형상을 하고 있어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용의 목이 가늘고 약하게 표현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표정도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문양의 깊이도 두 부도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부도는 구름과 서기(瑞氣)의 문양이 매우 깊어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데 비하여 원종대사의 부도는 그리 깊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석공의 안목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두 부도에서 느끼는 힘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래의 부도도 좌우의 솜씨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용두에서 나오는 서기와 용의 발의 표현을 보면 정면에서 볼 때 좌측의 것이 더욱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다. 우측의 용의 발은 전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데 비하여 좌측의 용의 발은 서기에 가려 조금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우의 용을 비교하여 보면 좌측의 용에서 더욱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어 좌측의 용이 한 수위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래의 용이 '정면을 보지 않고 머리를 돌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다. 단지 돌의 크기가 부족하여 머리를 돌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혹시 위에 있는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나름대로 상상이 머리를 스쳐간다. 위의 부도와 아래의 부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러한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이러한 상상의 답은 차후로 미루고 고달사지를 떠났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