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여름답사기(해인사,산청 등) - 1
2006년 08년 11일 (금/맑음)
해인사 장경판전(문화재청자료)
여름휴가동안 지리산 주변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지리산으로 답사를 가기로 하자 집사람이 그간 몇 차례 찾아뵈었던 정온선생댁을 들러가자 한다. 그간 정온선생에 들러 음식도 배우고하여 친분을 쌓아 두었던 터라 종부께서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꼭 들러달라는 말씀이 있었다. 첫날 정온선생댁이 있는 거창을 들러가기로 하고 나니 가야산의 해인사가 보고 싶어졌다. 해인사와 주변에 있는 절터를 찾아보기로 하고 여정을 잡았다.
전날에 만들어 놓은 정온선생댁에 드릴 떡을 가지고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였다. 아직 휴가철이 한창이지만 고속도로는 그리 막히지 않았다. 아침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해결하고 점심은 해인사 앞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해인사의 관계자들과 잘 아는 친구를 통하여 안내해줄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렇게 소개받은 것은 장경판전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소개받은 사람과 연락하여 보니 지금 장경판전를 수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목조희랑대사상(木造希朗大師像/보물제 999호)이 소장되어 있는 성보박물관도 휴관 중이라서 보려고 했던 유물도 볼 수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인연이 닿지 않은가 보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대로 신경을 쓴 답사인데 아쉽게 되었다.
우선 좋은 식당을 소개하여달라고 하니 자신이 잘 가는 식당을 예약하였다고 한다. 해인사에 도착하여 식사부터 하였다. 해인사 아래 관광단지 내에 위치한 삼일식당(055-932-7254)은 해인사 스님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고 한다. 식사는 산채정식으로 하였다. 여러 나물과 갈치구이, 그리고 된장찌개가 나왔다. 무엇보다도 된장찌개의 맛이 일품이었다. 다른 어느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된장찌개이다. 해인사를 들렀을 때 꼭 한번 맛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 식당은 최완수가 쓴 명찰순례 해인사편에서도 스님들이 최완수 일행에게 식사대접을 한 음식점으로 소개되어 있으니 믿을 만 할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해인사로 들어갔다. 우선 장경판전로 향하였다. 몇 차례 왔었지만 장경판전 내부를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어쨌든 장경판전을 보려하는 것은 현대과학을 비웃듯이 수 백년간 잘 보존되어 있는 장경판전의 비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함이다.
대장경이 이곳에 보관된 시기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 丙辰일/ 《대장경》 목판을 강화 선원사에서 운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용산강에 거둥하다. 丙辰 幸龍山江《大藏經》板, 輸自江華 禪源寺(인터넷 조선왕조실록/태조 7년 5월 10일)"라고 기록되어 있고 정종실록 1월 9일 기록에 해인사에서 경판을 찍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 7년(1398년)에 한양을 경유하여 해인사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 보관이 결정된 것은 아마도 고려 때부터 이미 해인사가 중요한 문서보관시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사를 보면 명종실록을 해인사에 보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사 세가 권 22 14년 9월 기록 참조) 그러므로 이 곳에는 어느 정도 문서보관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택리지에서도 나와있듯이 가야산이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였기 때문일 것이다.(택리지/을유문화사/182쪽 참조)
어쨌든 실록의 기록만으로도 이 곳에서 600년이 넘게 잘 보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박물관을 설계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박물관의 자료를 보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계를 24시간 작동한다.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가구류나 서책류와 같이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진 것은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여 보존환경이 다른 것보다 훨씬 정교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곳에는 아무러한 기계장치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되고 있다.
장경판전의 건물은 매우 단순하다. 전면 14칸 측면 2칸의 집일뿐이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창문의 크기가 전·후면이 다르다는 점뿐이다. 단순히 창을 조금 다르게 뚫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한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수 백년이 지나도록 경판이 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나는 이 장경판전이 고려시대 때 강화도 선원사에 지어진 건물을 모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장경판은 1237년에 판각을 시작하여 1248년에 끝난다. 이 이후로는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따라서 이미 강화도에서 150년간을 보관하고 있었다. 고려는 여러 차례 대장경판을 만들어 왔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존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점에 대하여 수많은 실험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판각할 수 있는 수종을 결정하고 나무의 처리 방법을 고안하였다.(이것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판각을 보존할 집을 어떻게 만들 것 인가하는 방법도 같이 고안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해인사 장경판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경판전은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의 공사가 있었다. 해인사로 대장경판을 이전한 후에도 두 차례 장경판전을 지었다. 첫 번째는 세조 3년(1458년)으로 판전 40여 칸을 다시 짓게 하고 두 번째는 성종 12년에서 21년(1490년) 사이에 판전 30칸을 짓고 보안당普眼堂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 후에는 수 차례 화재 시에도 판전을 온전하였기 때문에 새로 짓지는 않았지만 몇 차례 수리는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조에 중건이 어떠한 형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판전이 수다라장 30칸 법보전 30칸 그리고 동·서 사간고가 각 2칸으로서 모두 64칸이 된다. 지금의 칸수로 보면 세조와 성종 때 각 한 동씩 새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측하여보면 강화도에서 이전할 때 지어졌던 건물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세조 때 40여칸을 지었고 그것이 부족하여 다시 성종 때 지었을 것이다.
어쨌든 장경판전을 지을 때 기능적인 문제를 고려한다면 이전의 건물 형식을 무시하고 무조건 새롭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조에 세조나 성종 때의 건물도 이전의 형식을 거의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어쨌든 이러한 장경판전의 형식은 고려시대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재를 보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온·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온·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통풍이다. 바람만 잘 통하여도 웬만한 습기를 잡을 수 있다. 공기가 정체된 곳에는 항상 습도가 높다. 그러므로 건물을 설계할 때 습기를 잡기 위하여 자연환기든 기계 환기 든 환기에 신경을 쓴다. 또한 습기가 사라질 때 기화열로 어느 정도 온도가 낮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대장경판전도 환기에 또한 공기의 흐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창의 형식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대장경판전의 앞의 창은 아래가 크고 위가 작으며 뒤의 창은 아래가 작고 위가 크다. 이것은 더운 공기가 위로 간다는 원리에 의하여 찬공기가 뒤편의 높은 창으로 흘러 나가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앞뒤의 큰 창, 작은 창의 크기가 같지 않다. 즉 일대일 대응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장경판전 앞쪽 창(문화재청자료)
장경판전 뒷쪽 창(문화재청자료)
앞의 창의 크기는 수다라장의 경우 앞면 아래의 창이 2.15*1.0=2,15㎡이고 위의 창이 1.2*0.44=0.528㎡이다. 뒷면 아래창은 1.36*1.2=1.632㎡이고 윗창은 2.4*1.0=2.4㎡ 이다.(답사여행의 길잡이/가야산편) 앞· 뒤 벽면을 비교하여 보면 창의 전체 면적은 뒤쪽이 넓다. 이렇게 창을 만든 것은 앞으로 들어온 바람이 강하게 뒤로 빠지지 않고 부드럽게 흐르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위 아래로 창을 뚫어 놓은 것은 실내에서 공기가 정체되는 부분을 없애기 위한 조치일 것이다.
이렇게 통풍이 잘되면 잠시 목재에 습기가 차게될지라도 날씨가 좋아지면 곧 원상회복이 된다. 이러한 것이 경판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일 것이다. 통풍에 대한 배려는 측면 담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맨 끝 한 칸은 건물로 가려져 있어 통풍이 원활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측면에도 별도의 창을 만들었다. 한구석도 통풍이 원활하지 못한 곳이 없도록 하려는 배려이다.
내가 장경판고를 찾은 날은 외부기온이 35도를 넘는 무더운 날이었다. 그러나 가야산은 상대적으로 그리 덥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늘에 들어서면 그리 더운 것을 느낄 수 없었다. 합천이 38도로 사상 최고의 온도가 되었지만 가야산에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은 더위를 느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오히려 만났을 때 첫인사가 "서울은 무지 덥다면서요."라는 질문이었다. 이처럼 가야산의 숲이 더위를 막아주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우선 천혜의 조건이 아닌가한다.
밖은 더위에 찌들었지만 대장경판고 창문을 통해서 나오는 바람은 서늘하였다. 바깥온도와 최소 4-5도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같이 갔던 분의 말로는 대장경판고의 온도는 24도 정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이러한 온도는 단순히 습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기화열로 낮출 수 있는 온도가 아닌 것 같다. 어떠한 과정으로 이러한 온도가 유지되는 지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내부의 판가(문화재청자료)
땅 속에도 석회, 숯, 소금을 겹겹이 쌓고 다졌는데 이것이 습도를 유지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답사여행의 길잡이/가야산편) 이러한 조치들도 조금은 습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습할 때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 습기를 내뿜는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법보전의 바닥이 시멘트 같은 것으로 깔려져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앞서 말한 석회 등이 생각보다 습기제거에 도움을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땅속으로 90센티미터를 파내려 가면 땅은 결코 얼지 않는다. 건축용어로 땅이 어는 한계를 동결선이라고 한다. 건축에서 기초를 만들 때는 바로 이러한 동결선 아래 설치한다. 이만큼 땅속으로 어느 정도 내려가면 안정화되어 온·습도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서 취한 조치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했을지 몰라도 습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장경판전에 대하여는 주변 분야의 과학자들과 함께 협력하여 보다 면밀한 과학적 관찰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연구에 의하여 장경판전의 비밀이 풀려지면 건축계에 일대의 획기적 발견이 될 것이다. 아직도 모든 건축가들이 유물보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또한 이 유물보전을 위하여 많은 돈을 들이고 있다. 웬만한 박물관은 매년 수억원 이상의 돈이 온습도 조절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장경판전의 항온 항습시스템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해인사 삼층석탑
장경판전의 답사를 마치고 해인사 경내를 돌아보았다. 그간 구광루가 중창된 이래도 해인사에 대한 정을 끊고 살았던 터이고 이번의 답사에서도 더욱 실망한 터이라 감흥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날도 덥고 하여 보는 듯 마는 듯 대충 보고 지나쳤다.
해인사에는 그간 많은 불사가 있어 절의 면모도 많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창불사가 절의 환경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예전의 구광루는 입구에서 보았을 때 우측 두 번째 칸의 하부를 지나는 누하진입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측에는 담장이 쳐있어 영역을 완연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영역에 대한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식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김윤겸이 그린 해인사도에서 보는 구광루의 진입방식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윤겸이 그린 해인사도를 보면 구광루의 우측 두 번째 칸이 앞으로 돌출되어 누마루가 형성되어 있다. 김윤겸의 해인사도를 보면 예전에도 대적광전으로의 진입이 누마루 하부를 통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얼마 전 허물어진 구광루의 진입은 예전의 진입의 전통을 이어 받아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해인사 가람의 상징성에 관하여/이상해/건축역사연구 제 4권 2호/90쪽 그림 5참조)
* 과거의 구광루 사진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인사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원당암 다층석탑(문화재청자료)
해인사에서는 본사 쪽뿐만 아니라 주변의 암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보물 제518호인 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는 원당암(願堂庵)도 그렇고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보물 제 1301호)가 있는 홍제암(보물 제 1300호)가 있는 홍제암 주변도 역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홍제암으로 들어가는 다리도 돌로 호사스럽게 만들었고 예전에 자그마한 암자였던 원당암도 웬만한 절을 능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예전과 같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원당암이 아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고 무지막지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석탑도 예전의 석탑을 찾는 느낌이 아니었다.
사명대사부도
사명대사 석장비
절의 규모가 커졌다는 것으로 무조건 책잡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절의 환경이 더 나빠졌다든지 건축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해인사에서는 불교의 풍취는 사라지고 돈의 냄새만이 느껴지는 환경이 되고 말았다. 자연을 생명과 같이 보전해야할 절에서 앞서서 자연을 파괴하고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건물을 무차별하게 지어나간다는 것은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2002년도에 해인사에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靑銅大佛을 만드는 문제를 놓고 한참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같은 불교 내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이렇게 제일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가 할 일이 아니다. 이미 문화재급의 구광루를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구광루를 짓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용히 자신을 참구해야 할 불교계가 세속의 사람들처럼 화려하고 가시적 성과물에 집착한다는 것은 불교답지 않은 모습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여도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의 구실을 하고 있고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사찰法寶寺刹로 불리는 해인사로서는 종교의 본질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나서서 타에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사명대사 석장비 꼬리(다른 곳에 비하여 꼬리의 길이와 굵기가 장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