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숙종임금 때(1698년)였습니다. 호암(護巖)대사가 관음보살의 시현(示現)을 바라며 선암사 뒷산 봉우리에 있는 큰 바위인 배바위 벼랑에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백일이 지나도록 대사는 관음을 보지 못했는데, 자신의 지성이 부족하고 신심이 약하여 관음보살을 보지 못했다고 여긴 대사는 낙심한 나머지 50척이 넘는 벼랑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이 때 홀연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의 몸을 사뿐히 받아 내리고는 “나를 못 보았다 하여 몸을 버리는 것은 보리심(菩提心)이 아니다.”하고는 사라졌습니다.
^ 원통전은 집 속에 집이 있고 다시 닫집 속에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 어필 현판. 대복전이란 말 뜻과 같이 영험한 장소이다.
^ 관음보살상
^ 집 속의 집을 꾸미는 벽문에 새겨진 모란문양이 왕실과 관련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호암대사는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자기를 받쳐 내린 관음보살을 위하여 원통전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원통전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영험하기로 으뜸이라 기도를 위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원통전은 집 속에 집이 있고 다시 닫집이 있고 그 아래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다른 당우에 비해 특이한 구조입니다.
절 입구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무지개다리인 승선교 역시 이 원통전과 함께 세워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차안과 피안이라 하여 한 번 건너면 다시 건너올 수 없는 세상이라 구별합니다. 이 강을 건너는 일을 도와주는 일 또한 이승의 승려들이 해야 할 아주 중요한 공덕입니다. 그래서 뭇 사람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일 역시 승려들의 울력으로 자주 이뤄졌으며 자연히 그 기술 또한 절집 사람들이 특장이 되었습니다.
^ 승선교 - 원래 있던 다리 위에 누마루집을 지었다.
승선교(昇仙橋)는 선계로 오르는 다리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로 드는 입구에 강선루(降仙樓)가 있는데 이는 선인이 내리는 누마루집이라는 뜻입니다. 무지개다리 한 가운데는 용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있는데 이 다리를 통해 보이는 강선루의 모습은 선암사의 특징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홍예교는 승주에서 낙안을 지나 벌교에 가면 벌교 홍교가 있는데 이 또한 선암사 승려들이 작품이라는 해설입니다.
^ 선암사를 대표하는 그림이 되고 있는 승선교 무지개다리 아래로 잡히는 강선루의 모습.
^ 승선교는 전면 보수작업을 마치고 다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새맛에 비해 고졸한 옛맛은 완전히 사라진 듯.
^ 승선교 아래 한 가운데 용두 조각돌. 이 용두를 빼면 다리가 무너진다는 설명이 있다.
이쯤 해서 한 편의 오래된 시 한 편을 올려놓겠습니다. 사연은 다음번으로 미룹니다.
설 정든 님
주말 연휴 늦게사 들이닥친 서울손이
선암사 사하촌 떠나가리 새도록 주절주절
천 리 넘게 도망친 일탈의 여유와 자유로움 묶어
십년 시집살일지언정 듣도 보도 못한
오백년 매화등걸 고목나무 개화를 함께 보러 가잔다.
한 번도 도망쳐 본 일이 없어
마음만은 도리어 한 해에도 몇 차례 봇짐을 꾸렸어라
못하는 술인데도 두어 잔 받고보니
매화 같이 보러 가자는 말 꾸려 도망치자로 듣기는 웬일
어허라 일나간 남정네야 부끄럽기 짝이없다.
여하튼 오 백년 매화등걸 꽃핀다면 요즘이라
취한 손에 잡힌 손목을 빼며 그러마고 끄덕였다.
마흔 고개 앞두고 꼭이 술탓만은 아닐러라
이마저 봄맞아 설드는 정이라 하랴 허튼소리 한 번 못해본 아낙이라
입은 옷에 운동화만 갈아 신고 앞장서서 오른다.
대웅전 지나 차밭머리에 뒤틀린 아름이 섰거늘
늙어 피우는 꽃세가 곁에 선 젊은 홍매만 하랴
뭣 모르는 손들 지나칠지라도 서울손만은 우러르기 끝이 없다
바람결에 향기 바라랴 하늘 봄빛에 제 색깔 씻으랴
동행한 님 또한 산을 오를까 절을 내릴까 하마터면 마음길 쏠렸을라.
매화 꽃 보고나서 혼자 내려올깝새
차라리 문앞에서 배웅할라요
그러고 말았어야 하고 말고
봄볕은 산자락을 더듬어 철쭉띠를 끌어올리건만
마음 속의 설 정든 님 버려 두고 내리는 발길 속절없다.
- 1999년 4월 3일 저녁, 승주 선암사 입구 초원장 여주인 劉慈淑 씨를 기억함
^ 강선루.
이상 종묘2반 최이해였습니다. 06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