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 흥국사 답사기
20006년 8월 12일 토(맑음/비)
사진은 저의 블러그 http://blog.naver.com/seongho0805 의 포토로그 참조하십시요.
늦잠을 자고 보니 아침 답사의 출발이 늦었다. 오늘을 여수의 흥국사와 순천 송광사를 들러보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숙소에서 여수까지는 약 60km이다. 약 한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떠난 길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순천시내를 지나야 했고 가는 곳곳이 공사 중이어서 예상 밖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말았다.
여수 흥국사에는 보물 제396호인 흥국사대웅전(興國寺大雄殿)을 비롯하여 보물 제563호인 흥국사홍교(興國寺虹橋), 보물 제571호 좌수영대첩비(左水營大捷碑), 보물 제578호 흥국사대웅전후불탱(興國寺大雄殿後佛幀), 보물 제1331호 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興國寺盧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332호 흥국사수월관음도(興國寺水月觀音圖), 보물 제1333호 흥국사십육나한도(興國寺十六羅漢圖),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흥국사원통전(興國寺圓通殿) 등이 있다.
여수 흥국사의 명칭은 사적기에 의하며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한다."는 뜻으로 나라의 번영을 비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숙종 17년(1691년)에 작성된 사적기에는 1196년 보조 지눌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고 숙종 29년(1703년)에 작성된 중수사적비명에는 1343년에 보조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몽고의 침입으로 폐사된 후 1560년에 이르러 법수(法修)스님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곳의 승려가 임진란에 승군으로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수군에 참여하였다. 정유재란 때 흥국사가 전소되어 인조 2년(1624년) 계특戒特대사에 의하여 법당과 요사가 중건되었다. 인조 17년(1639년) 입구에 있는 홍교를 축조하고 인조 23년(1645년) 산문과 강당인 봉황루를 건립하였다. 현 대웅전은 1690년 법당이 좁아 다시 지은 것이다.(임진란 이후의 조형활동에 대한 연구/110-111쪽)
언급된 창건연대에 대하여 살펴보면 1196년은 보조국사가 거조암에서 결사를 하던 때이고 1343년은 보조국사가 입적한 후 132년 후이므로 기록에 대한 정확성에 의심이 간다. 그러나 보조국사의 이야기가 두 곳 다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보조국사 시절인 1200년대 초 절이 창건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 중건기록에 대하여 한국불교 사찰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기록은 조금 다르다. 명종 14년 1559년에 법수法守스님이 중건하였다고 하며 폐찰의 이유도 고려시대 말 왜구의 침입으로 폐사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흥국사로 들어가는 길은 양쪽에 주차되어 있는 차 때문에 교행이 힘들 정도로 복잡했다. 반대편에서 나오는 차가 있으면 어떻게 할까 걱정될 정도로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예전에 왔을 때가 10월 중순경이었는데 차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생경하였다. 흥국사 계곡은 여수지역의 대표적인 물놀이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워낙 차와 사람이 들끓어 차를 주차시킬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하면서 절로 들어갔다.
흥국사 입구 광장 역시 혼잡하였다. 옆에 있는 홍교가 있는 개울도 사람으로 발디 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워낙 사람으로 혼잡하여 홍교를 둘러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오면서 사진이나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차를 시키려 이곳 저곳을 기웃거렸다. 이 모습을 본 매표소 직원이 다가와서 절만 볼 것이라면 차를 가지고 들어가라고 한다. 차를 가지고 절로 올라가기 절의 경내도 차량으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차비와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다행히도 밖보다는 상대적으로 한산하였다. 워낙 밖이 북새통이다 보니 낫다는 의미이지 복잡하기는 별다름이 없었다. 주차를 하고 보니 절 옆으로 흐르는 냇가에도 사람으로 가득하였다. 이곳이 절인지 유원지인지 모를 정도였다. 천황문 앞쪽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음식뿐만 아니라 곡차까지 팔고 있어 당최 절 같지 않다.
천황문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사람이 적어졌다. 천황문 바로 앞에 강당인 봉황루가 있다. 주변을 살펴보니 새롭게 지어진 성보박물관이 눈에 띄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썰렁하여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전시실로 문이 있어 열어보니 문이 열리는데 안은 컴컴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분이 나서면서 개관한 것이 들어오라고 하면서 전등을 켜기 시작하였다.
불을 킨 분은 박물관을 담당하는 문화유산해설사였다. 그 분의 말씀이 "찾는 사람이 없어 관리비를 아끼려고 불을 꺼둔다."고 하였다. 여름휴가기간이고 토요일이어서 그런대로 절을 찾는 사람이 있었건만 이 곳을 들리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다시 한번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박물관 내부에는 흥국사 전체 모형과 임진란 때 사용되었던 무기 그리고 수군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 그리고 각종 현판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시물 중 가장 관심을 끈 것은 괘불탱화(보물 제1331호/흥국사노사나불괘불탱(興國寺盧舍那佛掛佛幀)였다. 건물 일부를 터서 3층 높이의 공간을 만들고 괘불탱화를 전시하고 있다.
흥국사를 올 때도 괘불탱화를 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괘불탱화를 본 것도 국립박물관에서 뿐이다. 절에서는 사월초파일 등과 같이 많은 사람이 모이는 야외법회가 있을 때 괘불탱화를 야외에 걸고 법석法席을 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때를 맞추어 가서 본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절에 보관되어 있는 괘불을 본 경우는 사진 외에는 없다. 이 괘불탱화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흥국사를 찾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괘불탱화의 크기는 폭이 5.6m이고 높이가 13m이다. 노사나불탱화는 독존탱화로서 1757년 최고 화승으로 꼽히던 의겸 스님과 함께 활동했던 비현 스님이 참여해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림은 모든 불화가 그렇듯이 매우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한 층을 내려가면 탱화를 배알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내려가 보니 화기부분이 말려져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같은 건축을 하는 사람으로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물관 설계의 기본은 전시할 유물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어떠한 유물을 전시할 것인가에 따라 설계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박물관 설계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전시할 유물을 파악하는 것이다. 괘불을 전시하기로 하였다면 가장 먼저 괘불의 크기를 확인하여야 한다. 높이만 13m에 이르는 괘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천장고가 최소한 15m 이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지금 전시된 상황으로 보면 최소한 3m 이상은 더 높아야 제대로 괘불을 전시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그렇게 설계되지 않아 괘불의 아랫부분을 말아서 전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당연히 설계단계에서 검토되어야 했다. 전시장의 층고 문제는 마지막 검토단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검토사항으로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했다. 한마디로 설계자의 실수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에는 발주자인 절에도 책임이 분명하게 있다. 박물관설계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설계자를 선택하는 것과 설계단계에서 핵심사항을 검토하는 것은 분명 절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괘불은 협시없이 본존만을 화면 전체에 꽉 차도록 그리고, 하단 좌우로 보탑을 배치한 단독불화(單獨佛畵) 형식의 괘불이다. 머리에는 화불이 안치된 화관을 쓰고 두 손을 어깨 위까지 들어 좌우로 벌린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렇게 그려진 불상은 삼신불회도 가운데 보신불을 단독으로 그린 보살형 노사나불도라고 한다. 불화의 하단에는 제작 당시 괘불 제작에 참여한 시주 등이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괘불을 보수하면서 기록한 화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괘불을 직접 보니 매우 강렬하고 화려한 필치에 매료되었다.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사진의 색은 많이 약화되어 있어 원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을 느낄 수 없었다. 또한 사진에서는 살아있는 예리한 필치가 죽었기 때문에 형상미를 느낄 수 없었다. 박물관 안에서는 괘불을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보기 때문에 원색과 선의 강렬함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강한 햇빛 아래서 어느 정도 떨어져서 괘불을 보면 지금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느껴질 것이다.
괘불 좌, 우측 벽면에는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수월관음과 나한도의 사진이 원본크기에 가깝게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 수월관음은 대웅전 본존불 뒤쪽에 그려진 벽화이고 나한도는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 괘불을 보는 뜻밖의 행운을 만났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절로 향하였다. 법왕문을 지나 대웅전이 있는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여느 절처럼 한적하였다. 바로 담 밖 물가가 사람들로 북새통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
흥국사 대웅전은 1624년 계특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나 규모가 작아 1690년에 다시 지어졌다. 흥국사 대웅전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 있다. 대웅전은 여러 곳에서 바다에서 나는 게나 거북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대웅전이 반야용선이라는 개념에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건물에 거북이나 게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곳은 미황사에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본 결과 전남지역에서 미황사 외에는 이러한 문양이 건물에 표현된 예는 없는 것 같다. 미황사 대웅전은 영조 29년(1754년)에 지어진 건물로 흥국사 대웅전보다 약 60년 이후에 지어졌으므로 오히려 흥국사 대웅전을 모방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라도 지방 이외의 곳에서는 경북 청도의 대적사에 있다고 한다. 한국건축사/대한건축학회/기문당/472쪽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문화재청자료에 거북문양으로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해양의 영향이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흥국사 대웅전은 반야용선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계단의 소맷돌에도 용머리를 새겨놓았고 기단의 좌우측 끝에도 용(워낙 마모되어 형태를 알기 어렵다.)의 모습을, 그리고 기단에도 거북, 게 등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한국의 건축문화재 9/104쪽, 임진왜란 이후 조영활동에 대한 연구/113쪽) 그러나 본인은 다른 견해가 있다. 여수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흥국사가 어부나 해상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게 등과 같은 바다 생물이 조각된 것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삶고 있는 바다 사람들의 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싶다.
어쩌면 바다 생물이 새겨져 있는 기단은 바다이고 대웅전은 바다에 떠있는 배를 상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따라서 반야용선처럼 안전하게 항해하기를 바라는 바닷사람들의 원願을 건물에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바다의 생물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이 흥국사가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단뿐만 아니라 괘불지주에도 용의 모양이 새겨져 있으며 석등의 하대석도 거북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한 추정을 하게 된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서 측면의 칸살이 넓어 거의 정사각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내부의 후불탱화가 걸려져있는 고주벽체가 당시 건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앞으로 나와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평면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면으로 계획한 것은 앞에 예불 공간을 확보하고 고주벽체 뒤에 벽화를 그려 넣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뒷벽에는 가부좌를 한 수월관음이 그려져 있다. 흥국사에는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좋은 그림이 많이 있다. 이렇게 그림이 많은 것은 당시 중창을 주도한 스님이 불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 김동욱은 조선 후기에 들어 실내의 예불이 늘어나면서 실내공간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건에 맞추기 위하여 흥국사 대웅전의 평면이 선택되었고 창도 크게 만들어 실내를 밝게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한국건축의 역사/김동욱/기문당/220쪽)
대웅전은 후면에도 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것도 중앙어칸에는 양개문이고 좌우측에는 편개문이 설치되어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 후면의 활용도가 떨어지면서 후면에 문이 설치되는 경우가 적어진다. 그러나 이 곳은 후면에 불화가 있어 참배의 공간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채광과 출입을 위한 별도의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의 답사를 마치고 원통전으로 향하였다. 흥국사 원통전은 선암사 원통전과 함께 사찰건물로는 특이한 양식에 속하는 건물이다. 원통전은 조선 명종 15년(1560)에 지어졌다가 정유재란(1597) 때 소실되었고 이후 인조 2년(1624)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통전은 조선조 말에 다시 고쳐지은 것 같다. 원통전보다 나중에 지어진 대웅전의 공포보다 장식적인 경향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거의 중건수준의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통전의 공포는 매우 특이하였다. 주심포 집이면서도 공포의 짜임은 다포식과 익공식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다. 한마디로 조선말에 기법의 혼란상을 보는 것 같다. 전면과 측면의 공포만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후면의 공포는 간략하게 짜졌다.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재정적 조건이 열악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된다.
원통전은 평면의 형식도 다른 곳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건물이다. 건물 평면이 丁자 형으로서 왕릉 앞에 있는 정자각과 같은 형태이다. 같은 정자각 형태의 건물이 순천의 선암사에도 있지만 평면의 구성은 흥국사의 원통전과 전혀 다르다. 선암사의 원통전은 사각형 평면에 앞에 두 개의 기둥을 돌출시켜 포치형태의 입구를 만들어 丁형태를 만들었지만 이곳은 건물 자체를 丁자로 만들었다. 관음보살이 모셔져있는 전면 3칸 측면 1칸의 기본평면 주위에 삥 둘러 마루가 설치된 퇴칸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앞에는 한칸 규모의 마루를 돌출시켜 완전한 丁자 평면을 만들었다. 이러한 퇴칸은 만일염불회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원래 원통전 앞에는 보광전이 있었고 이곳에서 만일염불회가 열렸는데 염불회는 일반 법당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을 중심으로 탑돌이를 하는 것처럼 돌아가며 기도하였다고 한다.(한국의 건축문화재 9/108쪽) 아마도 사방에 퇴칸을 만들고 툇마루를 돌린 것은 이러한 행사를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원통전을 보고 나오는데 새로 건물을 짓고 있었다. 지붕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다보니 박공부분의 처리가 잘못되었다. 측면 박공 부분에는 내림마루를 설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와 옆면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될 경우 비가 기와 안으로 들이치게되어 지붕내부가 쉽게 상하게 된다. 형태도 중요하지만 집이란 특히 목조건물에서는 물을 잘 처리하여야 한다. 이 집도 빗물 때문에 머지않아 다시 지붕을 고치게 될 것이다. 앞서 박물관처럼 집을 설계하는 건축가의 안목이 문제가 되는 경우이다. 한 장소에서 설계에 대한 문제를 다시 목격하게 되고 보니 흥국사를 관리하는 주지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