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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연, 문화 그리고 집 - 01

깜보입니다 2006. 10. 18. 10:33
글을 시작하면서

무작정 시작한 나의 우리 문화의 탐구는 잡식성이었다. 이러한 것이 나의 직업과 맞물려 한옥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심이 깊어지는 동안 나에게 하나의 의심이 들기 시작하였다. 왜 집을 단순히 양식이나 조금 더 나간다면 단순한 사회구조의 틀 속에서 보는 것일까 하는 점이었다. 살고 있는 집은 생활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생활과 동떨어진 집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부자는 부자의 집이 가난한자는 가난한자의 집이 있는 것은 그들의 생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을 이해하는 것은 곧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며,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자연환경과 문화환경 그리고 생활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고 집을 보면 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옥이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지금의 생활과 과거의 생활이 너무도 차이가 나서 이제 한옥이 우리의 집으로 느껴지기에는 '너무도 먼 당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울의 유명한 북촌마을이 버림받게 된 이유는 지금의 생활을 담기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50년대 이전에 태어난 분들에게는 한옥을 이해하는데 그리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스라한 향수까지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한옥에서 생활이 과거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 한옥은 그저 문화재요 유물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옥을 이해할 수도 나가서는 매력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생활을 담고있는 집'으로서의 한옥으로 다시 찾아보는 것이다. '생활로서의 집'으로 한옥을 보는 것은 단순히 집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문화환경과 자연환경을 이해하면 집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조선시대의 집은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집은 현재 남아있는 유구가 없어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의 집은 조선시대의 집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온돌이 있는 집과 없는 집의 차이이며,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의 문화와 남녀유별문화의 차이이며, 불교가 국교이던 시절과 유교가 통치이념의 있었던 시절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차를 타고 다니는 현재의 사람들에게는 차고가 필요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마굿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차이는 집의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단적으로 차는 휘발류로 가지만 말에게는 건초가 필요하다. 그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폭도 전혀 다르게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차이를 이해할 때만이 제대로 집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여지는 변화가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생활과 집에 어떻게 반영되는 것인지를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앞서의 예에서처럼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여 변화에서 나오는 현상을 상상하여본다면 과거를 보는 즐거움이 몇 배는 배가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를 보는 것은 다른 문화에도 적용된다. 서로 다른 삶을 살게되는 배경이 바로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문화환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되면 문화간에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이 내가 집을 배우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산물이다. 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활사 공부가 필수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글은 학문적 논리를 추구하는 글은 아님을 밝혀둔다. 내 자신이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도 아니고 또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디자인을 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감각적인 글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떠한 면에서는 사물을 보는데 논리적인 것보다는 감각적으로 보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글도 그러한 관점에서 쓰려고 한다. 가끔은 논리적으로 비약되는 부분도 있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제시된 예들은 생활을 하면서 보고들은 것이거나 일부는 나의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자료의 출처가 다양한데 이것은 현재 문화의 다양성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의 자료는 정확한 출처를 밝히기 힘든 것도 있음을 밝혀둔다. 이러한 문제는 학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쓴 글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읽어 주기 바라며 혹시 읽다가 잘못이해하고 있는 부분이나 자료의 오류가 있는 경우는 가차없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다음의 주제로 진행된다.

1. 집이란 무엇인가.

2. 과거 이해하기 : 과연 전통은 존재하는가

3. 집은 문화유기체이다.

4. 자연환경과 집

5. 기술발전과 집

6. 사회환경과 집

7. 사고변화와 집

8. 사람과 집 :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


1. 집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살고 있다. 조그만 집도 있고 큰집도 있다. 대통령은 관저에서 살고 있고 부자는 수백 평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 반면 돈벌러 서울로 올라온 사람은 1평도 안되는 하숙방에서 살고 있다. 조금만 생각하여 보아도 같은 하늘아래서도 수십 가지의 사는 집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러한 현상이 생기며 과거에는 어떤 이유로 지금과는 다른 집에서 살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탐구하여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람은 집을 짓고 산다. 사람이 집을 짓는 첫 번째 이유는 자연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지고 점점 지식이 발달하여 감에 따라 사람의 집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발전하여 갔던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의 집은 동굴이었을 것이라는 것은 정설이다. 아직은 지상에 집을 지을 만한 능력이 없었을 때 사람들은 자연적인 엄폐물을 이용하여 자기를 지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때에도 나름대로의 질서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소한 굴 제일 안쪽에는 보호할 어린이들이 있거나 또는 권위를 대표하는 사람 또는 존재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가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여 감에 따라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강구되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동굴에서 나와 자신의 보호막을 만들게 된 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집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자연환경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집은 사회가 복잡하게 변화하여 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권력자가 사는 집(궁궐),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집(관아), 물건을 쌓아두는 집(창고), 거래를 하기 위한 집(상점) 등이 생기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박물관, 미술관, 연구소, 사무실, 극장, 음식점 등 다양한 집이 존재하게 되었다. 앞서의 예에서 보듯이 사회가 다변화되면 될수록 목적에 맞는 새로운 집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미래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용도의 집이 많이 생길 것이다. 이렇듯이 집이란 자연으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어 사회가 고도화되면서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집을 통하여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집을 잘 이해하기만 한다면 최소한 그 시대의 사회구조를 얼마간은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각 지역의 전통가옥을 잘 살펴보면 최소한 그 지역의 자연환경은 이해하게 되고 조금 더 살펴보면 사회구조까지도 알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붕의 경사가 급하고 고상주거의 형태의 집에서 살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열대우림기후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지붕의 경사가 급한 집이라고 하여도 집의 벽이 두터우면 눈이 많이 내리는 추운 지방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예는 사막지역에 존재하는 두 가지 주거의 유형을 비교하여 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사막지역에는 크게 두 가지의 주거유형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착민이 주거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유랑민의 주거유형이다. 어떤 집단의 집이 이동이 편리한 천막구조라고 한다면 그 집단은 유랑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벽체가 흙벽으로 두껍고 밖에 창이 없는 집에서 산다면 이곳의 사람들은 정착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에서 보듯이 집은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사회상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 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자연에 대응하는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기술의 발전 역시 사회 변화의 범주로 이해한다면 분명 집은 사회의 제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집을 보기 시작하면 집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려고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좀더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집을 보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였던 과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집을 찾아보는 이유이다.


2. 과거이해하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어떠한 방법으로 과거의 문화를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보기로 하자.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집은 주변의 환경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집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나 또는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해한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다른 시대 또는 다른 환경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은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고파보지 못한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픈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조차 없다면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 태도는 자신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과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기본은 지금과 같은 연대사 중심의 역사가 아닌 생활사 중심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특히 집에 관심이 있다면 생활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다. 집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과거의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명제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전통(傳統)은 있는가

전통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양식(樣式)·의식(意識)·태도 등의 일정한 계통이나 흐름'라고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는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은 불변으로 고수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이란 불변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전통은 '불변의 요소'인가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아니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용어로서 '무상(無常)'이라는 단어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단어로서 우리에게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허무(虛無)'라는 의미가 짙게 배어있지만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가 원래의 뜻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의 무상(無常)이 전통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종교라는 주제만을 놓고 살펴보자 우리 나라의 종교는 삼국시대 이전은 샤머니즘이었고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우리 나라의 대표적 종교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유교가 지배하였고 현재의 대표적 종교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등록된 신도의 숫자로 만 본다면 기독교(가톨릭을 포함)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변화는 단순히 종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건축이라는 문제로 만 본다고 하여도 각 종교를 대표하는 건물이 변화하였다. 샤머니즘의 건물은 지금 유구가 명확하지 않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불교, 유교, 기독교의 대표적 건물의 변화를 보면 절, 대성전 및 사당, 교회로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는 더욱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단편적인 예를 보더라도 우리의 전통이 무엇인가라고 물어볼 때 과연 어느 시대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간다.

다른 예를 보면 재산분배의 문제를 보더라도 조선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조선조 중기최소한 17세기까지만 하여도 재산 분배에 있어 남녀 또는 출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이러한 것이 조선조 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점 장자 중심으로 재산 분배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제사의 문제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조선조 중기까지만 하여도 제사 의무대상은 사위까지도 포함되었다. 즉 일가 친척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던 제사가 조선조 중기를 넘어서면서 종손중심의 제사의무로 변화하게 된다. '처삼촌 무덤 벌초하듯 한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이 뜻은 어떤 일을 대충 대충하는 모습을 빗댄 말이다. 이 속담은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위들이 제사를 지낼 때를 빗댄 말로 생각된다. 이렇다 보니 제사의 문제가 남자 쪽의 문제로 정리되고 따라서 재산의 문제도 출가한 여자 쪽에는 분배되지 않는 것으로 정리되었을 것이다. 결국 제사와 재산분배의 관계는 제사의 의무와 관계가 깊다고 할 것이다. 제사에 돈이 많이 들다보니 결국 제사의무를 지는 사람에게 재산의 상속을 집중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재산권과 제사권 상관관계를 단순화시키는 것도 문제는 있다. 재산의 상속문제는 임진란 이후의 경제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 또한 예송론쟁까지 겪은 성리학의 종법에 대한 연구결과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제사제도의 변화와 재산권의 변화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서로간에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재산권의 문제는 단순히 제사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재산이 있다는 것은 권한이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자가 재산을 가지고 시집온다는 것은 일정의 권한을 행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차별의 문제도 조선조 초와 조선조 말과 같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제도에 있어서도 고려시대 나 조선조 초기까지도 장가간다는 의미가 많이 남아있었다. 즉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들어서 아이들이 장성한 후에 본가로 돌아오는 예가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조선조 초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태종이 세자와 인간적 유대가 깊은 외척들을 무자비하게 처벌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여자에게도 재산권이 있는 상황하에서는 일방적인 남녀의 차별은 있을 수 없다. 재산권이 있는 이상은 여성에게도 집안에서 일정한 발언권이 허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재산권을 가진 여인의 발언권이 강하였던 것을 집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는 예가 있다. 조선조의 건물은 아니나 아직은 남녀의 구분이 명확하였던 시절인 1918년에 지어진 경남 함양의 허삼둘 가옥(중요민속자료 207호)을 가보면 기존의 집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집을 볼 수 있다. 바깥 사랑채는 전통의 양식을 가지고 있지만 안채는 이전의 주택개념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 구조가 기본적으로 여성의 취향에 따라 조정된 것임을 한눈에도 알 수 있다. 또한 출입구도 별도로 사랑채를 거치지 않고 안채로 들어갈 수 있어 사랑채의 통제를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집에서의 여자의 권한이 남성의 권한과 동일하거나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 구조가 가능한 것은 이 집의 내력을 보면 이해가 된다. 1918년 윤대흥이라는 사람이 당시 진양(晋陽) 갑부인 허씨 집안으로 장가를 가게 되는데, 윤대흥의 배우자 이름이 허삼둘이었다. 결국 몰락한 명문가의 남자가 돈에 팔려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집의 이름조차 배우자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구한말 성리학적 개념이 얼마간 와해되었다고 하여도 조선조 말의 남녀차별의 개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던 시절 이러한 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재산권에 기초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조선 조 만을 보더라도 생활의 방법에 있어 전반기와 후반기의 차이가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근세에 와서는 더욱 변화가 심하였다. 결국 전통이라는 것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여 가는 것이라는 것이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깊게 생각하여야 할 것은 급격한 변화로 인한 사회적 충격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상의 변화와 문화

'사상(思想)'이라고 하는 거창한 단어를 들고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각이 변하면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며 그에 따라 집에도 변화가 오게된다. 사상의 대표적인 예는 종교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불교에서 유교 그리고 기독교로의 변화는 대표적 종교시설인 절과 대성전 및 서원 그리고 교회로의 변화를 가져 왔다. 종교의 변화로 인한 사회변화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더 살펴보자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불교가 국교이니 만큼 도성 내에 많은 절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도첩제가 생기고 승려의 도성 안 출입이 금지되면서 불교는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것이 금세기에 들어오면서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락되자 다시 도심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가 생긴지가 한 세기가 되어감에도 아직 우리의 머리 속에는 절이라는 것은 산중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도심 내에 있는 절은 생소하게만 느껴지고 있으니 한 번 머리 속에서 고착된 생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된다. 어쨌든 앞서 말한 변화는 수많은 변화 중에서 일부 일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왕은 고귀하다고 하는 생각하여 왕의 모습을 아무나가 보아서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를 그린 그림에서 왕과 왕비를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대통령은 다음 선거에 대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어 자신을 알리는 것에 열심이다. 이러한 차이는 왕이 사는 곳과 대통령이 사는 곳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옛말의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높은 담과 많은 전각들로 왕궁은 폐쇄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청와대는 일반인의 관광코스가 되었으니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이 생각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결과 집을 포함한 생활에 연관된 모든 집기들까지도 변화를 주게 되는 것이다.

사고의 변화가 우리의 생활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예는 남녀유별이다. 남녀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같은 집에서도 생활하는 공간이 다르게 되고 또한 안채를 남들이 쉽게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평민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양반과 평민의 삶이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평민은 평민들만의 규범이 있게 되고, 그에 따른 집의 구조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조선시대 이전에 사회로 올라가 보자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 나라에 유교가 그리 중요한 사상으로 대두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소개되는 정도라고 하는 정도가 맞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도 과연 남녀유별이니 하는 개념이 존재하였을까. 신라의 토기를 보면 남녀구별을 유난히 강조하는 성리학적 개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적나라하게 성기가 노출되어 있고 성교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국보 195호로 지정된 토우장식장경호(土偶裝飾長頸壺) 계림로30호분출토품을 보면 여러 동물과 주악상과 함께 적나라한 성교장면의 토우가 새겨져 있다. 부장품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조각을 그릇에 베풀어 놓은 사회에서 남녀의 엄격한 구별이 있었을까. 분명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남녀의 엄격한 구분은 유교에서 적자(嫡子)의 구분을 강조하다가 보니 나오는 생각일 뿐이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어떠한가. 집에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떠할 것인가.

불교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불교가 도입된 이래로 불교의식이나 또는 새로운 불교 형식이 도입되면서 건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금당(지금의 대웅전)의 위상과 그에 따른 본존불 위치의 변화이다. 삼국시대 또는 통일신라시대까지만 하여도 금당에는 본존불만 모셔 놓고 일반인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금당에는 일부 승려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일반적인 예배 공간은 아니었다고 한다. 금당은 부처를 모셔 놓은 장소로서 여겨졌고 지금과 같은 예배행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밖에 있는 탑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탑이 부처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불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탑은 곧 부처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배의 방식 때문에 금당에서의 본존불의 위치는 중앙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유구를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까지 절의 유구를 보면 불대좌의 위치가 중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었기 때문에 절에는 탑이 반드시 있다. 영암사지 금당의 건물을 보면 거의 정중앙에 본존불이 위치하고 주변으로 2중으로 기둥이 둘러져있다. 영암사는 최소한 한차례 이상이 중건이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최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유구의 기둥배치를 보면 외부의 기둥열과 본존불 주위의 기둥열 간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아 두 사람이 같이 서있는 것이 힘들어 보인다. 이러한 구성으로는 그 안에서 특별한 행사를 하기가 힘든 구조이다. 또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불상과 불대좌는 같이 조성되어 있다. 불대좌에도 매우 화려한 장식이 있어 불대좌도 맨 처음 제작 당시부터 불상과 함께 조각의 대상으로 고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곡사철조약사여래좌상(국보 제58호)을 보면 불상을 위하여 불대좌가 있는 것인지 불대좌를 위하여 불상이 있는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불대좌가 너무 아름답다. 또한 이 불상을 보면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설치하기 위한 구멍이 있어 불상이 닷집형태의 지붕이 있는 구조에서 모셔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대좌가 화려한 것은 불대좌가 노출되어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하여 만든 때문이다. 이러한 불상의 형태는 불대좌 앞을 가리는 기구가 배치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금당의 기능을 확인하여 주는 증거인 것이다. 또한 금당 안에서의 예배는 탑을 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상을 돌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러한 예배의 방식 때문에 불상의 광배 뒷부분에도 또 다른 불상이 새겨져 있는 예가 있다(만복사지석불입상:보물 43호 ,경주남산미륵곡석불좌상:보물 136호). 이러한 예배의 방식은 유물과 유구를 확인하여 보면 최소한 고려시대까지 이어져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회암사를 보면 탑이 없다. 고려시대로 넘어 오면서 탑이 없는 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예배의 방법과 대상이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이 대상이 탑에서 본존불로 바뀌고 예식의 방법도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당 내에 본존불을 친견할 수 있게 되면서 탑보다는 본존불을 선호하게 되어 탑의 중요성이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절에 탑을 만들지 않게 된 것이다. 탑 양식의 변천을 보면 탑의 중요성이 변화하여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탑은 당당하고 크기도 매우 크다. 그러나 통일 신라 말로 가면 탑의 크기도 작아지고 장식성이 강하여 진다. 고려시대로 가면 다시 탑의 양식이 좀더 다양하여지고 크기가 커지기도 하지만 장식성과 불교 도입 초기의 당당함은 되찾지 못한다. 이러한 탑 양식의 변화는 탑에 대한 중요성의 변화를 보여 준다. 단적으로 크기가 변화한다는 것은 탑에 대한 중요성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배방식의 변화의 모습은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말에 지어진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고려 우왕 2년)이나 조선조 초기(1430년:조선 세종 12년)에 지어진 무위사 극락전을 보면 수미단 위에 본존불이 올라앉는 형식을 갖추고 있고 무량수전의 경우는 완전히 돌아앉아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무위사 극락전의 경우 중앙에서 약간 뒤쪽으로 들어앉아 앞쪽에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무량수전의 경우 예배 의식의 변화 때문에 본존불의 위치가 변화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공간을 확보하려는 의지는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볼 때 최소한 고려시대 후기부터는 금당 안에서 공양을 위한 기구를 배설하는 의식이 집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많은 사람들이 금당 안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조에 들어와 억불 정책으로 야외에서의 대규모의 예불행위가 줄어들고 법당 안에서의 예불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본존불의 위치는 점점 뒤로 물러앉게 되어 조선조 후기의 절의 경우 대웅전의 거의 뒤쪽에 본존불이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이해의 방법

그러면 과거의 문화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의 대답은 간단하다. 과거의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과거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경험이 다름이 문화를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지만 그러한 노력 조차하지 않으면 과거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당대의 눈으로 과거를 이해하여야 하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 번째 예는 계단과 경사로의 문제이다. 옛 집을 가보면 계단이 현재의 계단보다 오르기 힘들 정도로 높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편하게 하였을까 의아하게 생각한다. 요사이처럼 장애자를 위한 편의시설 때문에 경사로를 만드는 것과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계단의 높이를 낮춘다는 등에 많은 배려를 하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과거의 시설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왜 당시에는 지금의 기준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어느 분의 의견으로는 지금의 사람들보다는 건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도의 높이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계단의 문제는 기단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 나라 건물 특히 대가(大家)의 기단은 높은데 이것은 권위를 내보이기 위함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권위만을 내세우기 위함은 아니다. 우리의 여름은 고온 다습하고 겨울에도 눈이 만만치 않게 온다. 그러한 기후조건에도 불구하고 집을 짓는데 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면과 많이 떨어지는 것이 집을 보전하는데 유리하였다. 이러한 점에다 앞서 말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단을 높여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단을 높이다보니 오르내리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편하게 오르기 위하여 계단을 낮게 만들면 계단이 차지하는 면적이 많아져 집의 효용성을 떨어뜨리게 되므로 계단의 높이를 높이는 것이 오히려 기능적이다. 또한 예전에는 장애자가 거의 없어 장애자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궁리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우리 나라 건물에 경사로 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례의 운조루에는 중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경사로로 되어 있고, 영덕의 충효당과 만괴당은 부엌에서 안방으로 가는 통로가 경사로로 되어 있다. 이는 기능적인 고려로서 물건을 옮기기에 편하도록 기능적으로 배려한 것 일뿐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과거 의술이 발전하지 않았을 시절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장애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의술이 발전함으로서 예전 같으면 사산하였을 애를 살려내는 상황에서 많은 장애자가 나오고 있으며 또한 교통사고 등의 후천적 장애가 급증하면서 장애자가 극소수에서 이제는 고려의 대상이 될 만큼 많아진 것이다. 이러한 장애자의 증가 때문에 건축에서도 장애자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장애자에 대한 배려는 소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도 우리 보다 조금 앞선 최근에서야 이루어지고 있다. 즉 이러한 장애자의 문제도 시대적 상황일 뿐인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한옥에서 소슬대문은 부자집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소슬대문은 부자집이나 권력자의 집의 권위를 보이기 위하여 만든 것일까. 소슬대문은 원래 권위의 상징으로 의도된 문이 아니라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요사이 집의 대문을 보면 대문은 넓으나 높지는 않다. 이렇게 변화한 것은 자동차가 주된 이동수단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같은 개인주택에서 사는 사람이라도 자동차가 없는 집의 문은 이삿짐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문은 그리 넓지 않다. 결국 요사이 개념으로 본다면 넓으면 넓을수록 부자집의 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대문조차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구조가 변한다. 가끔은 한옥이나 기타의 옛 물건을 볼 때 무조건 의미론을 먼저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구는 기능이 우선이다. 단지 그 도구가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백정이 도끼를 들었을 때는 소를 잡는 도끼이지만 무당이 도끼를 들었을 때는 귀신을 쫓는 도끼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상황이 변화하면서 각각의 도구에는 그 의미가 부여되고 그에 걸 맞는 장식이 첨가되는 것이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기능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그것이 가지는 상징성이 부여되는 수순을 밟는다. 소슬대문의 경우도 원래는 기능이 우선되어 말이나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 말을 타고 다닐 정도의 집이라면 권세가 있는 집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상징성이 부가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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