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자연, 문화 그리고 집 - 07

깜보입니다 2006. 10. 18. 10:35
7. 생활과 집

집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중에 중요한 부분은 의생활과 식생활 그리고 관혼상제에 관련된 것이다. 이것을 통틀어 가사(家事)라고도 한다. 가사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집의 구조가 많이 변화한다. 반대로 집의 구조에 따라 가사활동의 변화도 가져온다. 조선조나 근대까지는 가사활동의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가사활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의 무분별한 수용과 70년대 이후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사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많은 여성의 사회활동 참여와 생활 방식이 서구적으로 변화한 것에 기인한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집은 생활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진 도구이기 때문에 생활의 변화는 집의 구조에 변화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관혼상제에 관련된 의식이 모두 집에서 이루어진다면 집의 규모는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러한 의식에 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집의 규모는 일상 생활을 영위할 정도가 될 것이다. 4장에서 대청의 발달이 우리 나라의 제례의 문화와 어느 정도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선조의 통치이념이 성리학이 아니고 불교였다고 한다면 조상에 대한 제례의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대청의 발달도 오늘날과 같이 적극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과 집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 음식과 문화

식생활과 집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음식과 문화, 역사환경에 대하여 언급하여 보기로 한다. 음식문화를 보면 그 지역의 문화환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유목민의 음식은 조리방식이나 재료가 매우 단순한 편이다. 이것은 집과 마찬가지로 이동을 하는 생활에 적응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조리의 방법이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문화의 정주(定住)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발효음식이 발달하였다면 그 지역의 문화는 매우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여도 그리 틀린 것은 아니다. 발효음식은 관찰에 의하여 개발된 음식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발효음식으로 술이다. 서구를 포함한 유제품을 많이 먹는 지역에서는 치즈, 요구르트 등과 같은 발효식품이 발달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이러한 것보다는 곡류를 이용한 발효음식이 많이 발전되어 왔다.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은 대표적인 곡류를 이용한 발효음식이다. 발효음식은 적당한 온·습도 조건과 적절한 햇빛, 그리고 장기간의 보관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음식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발효음식은 먹을 수 있을 만큼 부패된 음식이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관찰이 없으면 식용 가능한 상태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세밀한 관찰이 필요한 음식들이다. 그러므로 발효음식이 발달한 것은 이러한 관찰이 가능할 정도로 생활이 안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나라의 음식문화는 발효음식과 젓가락사용, 탕류의 발달로 대별된다. 탕류의 발전에 대하여는 아직 깊게 생각하여보지 못하였지만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서양의 포크나 나이프를 이용하여 음식을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조리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음식은 철저하게 먹는 사람을 배려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야하며 단순히 집어먹는 과정만으로 먹을 수 있게 조리하여야 한다. 따라서 젓가락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더욱 복잡하여 진다. 우리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 - 특히 반가의 음식의 조리과정을 보면 매우 복잡하고 정성이 깃들여 있음을 알게 된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길다는 것은 주변환경이 안정되었다고 보아도 틀린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발효음식과 젓가락문화로 대표되는 우리의 음식문화는 담장과 함께 우리의 사회 문화환경이 매우 안정적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나. 식생활문화와 집

현재의 우리 생활을 살펴보면 조선조의 생활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식생활만을 보더라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가 서구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구의 음식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도 예전과는 많이 변화하였다. 식생활의 변화는 식단이 우리의 것에서 서양의 것으로 변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러 변화 중에서 특히 식사의 양이 특히 예전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조선조 말에 찍은 식탁의 사진을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식사의 양이 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이 먹던 식사의 양이 최근에 몇 십 년 동안 급격히 줄어들었다. 음식의 섭취의 방법이 다양하여졌다는 것과 활동량의 급격한 감소가 이러한 양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추측하여 본다. 그러나 음식양의 변화와 식단의 변화는 식기 및 조리 도구의 변화로 이어져 예전의 부엌 체계에는 맞지 않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기구의 변화는 우선 가구의 변화로 나타나고 결국은 집의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우선 식사의 양의 감소는 그릇 크기의 변화로 이어진다. 조선조나 근대의 우리의 식기는 주로 사기그릇이라고 불리는 도자기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식사의 양이 많아 컷 던 식기는 무게가 만만치 않아 과거의 부엌의 찬장들을 보면 통나무로 든든하게 잘 짜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릇의 무게와 크기 때문에 찬장이 크고 듬직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찬장은 현재의 부엌가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뿐만 아니라 공간을 차지하는 면적도 만만치 않게 된다. 그러나 식사의 양이 줄어드는 요사이는 모든 그릇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식생활의 서구화 때문에 예전에는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접시가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각종 조리 도구들이 추가되어 예전과는 다른 수납을 요구하고 있다. 수납의 방식이 과거의 한옥과는 달리 여러 가지의 식기와 주방기구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한식과 양식 등과 같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다가 부엌의 실내화 및 입식 부엌의 도입으로 '부엌'이 사라지고 '주방'이라는 단어로 불려지는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새로운 부엌시스템이 개발된 것이다.

다음으로 집 구조의 변화가 우리의 식생활을 변화시킨 예를 살펴보자.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의 보급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우리의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공동주택의 성격 때문에 집단생활에서 오는 서로의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냄새나는 음식을 회피하게 되었고 만들고 관리하기 위해서는 넓은 마당이 필요한 장류가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공동생활에서 소음만큼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냄새이다. 이러한 이유로 청국장과 같이 냄새나는 음식을 아파트에서 해먹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된다. 또한 우리의 음식은 발효음식이 많은데 발효음식은 냄새뿐만 아니라 관리를 위해서는 통풍과 햇빛이 필요한데 아파트에서는 이러한 것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발효음식을 집에서 담가 먹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아파트가 우리의 대표적 주거로 자리잡으면서 이제는 발효음식이 자리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 가정마다 담가서 먹던 장이 사라져 가고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사다 먹고 있다. 맛의 다양함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장을 담가 먹을 수 없게 되면서 장을 담글 때 필요하였던 그릇과 도구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아파트에서는 장독이라는 것이 없어졌으며 가마솥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사회구조의 변화가 주방에 관련된 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예를 한가지 더 살펴보자. 70년대에는 30평 대의 아파트에도 '식모'가 기거하는 방이 부엌 옆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건비의 상승으로 '식모'를 고용할 수 없게 되면서 이러한 방이 사라지게 된다. '식모'는 그 후 '가정부'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변화된다. 식모와는 달리 가정부는 출퇴근을 한다. 현재는 큰 규모의 아파트에도 가정부가 기거하는 방이 없다. 이것은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식모'라는 고용방식이 사라지면서 식사의 방법에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 같으면 식당에서 상차림을 하여 거실로 옮겨 식사를 하던 것이 식사의 준비가 주부의 몫으로 전담이 되면서 주부의 편의를 위해 식탁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과거에 식모의 방으로 사용되었던 부분을 이제는 식탁이 차지하게 되었다. 아파트의 평면에의 변화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70년대의 아파트를 보면 주방의 구조가 지금과 사뭇 다르다. 지금의 주방보다는 작게 만들어져 식탁을 놓을 만한 넓이가 되지 못하였고 옆에 식모방이 붙어있었다. 이러한 것이 70년대 후반부터 주방에 식당의 기능이 들어와 현재의 구조로 변화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그 시대의 삶이 방식을 따라 집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앞으로 식생활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요인 중의 하나는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이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집에서의 가사활동이 지금보다도 더욱 많이 변화할 것이다. 과거 여성이 전담하였던 가사활동을 할 수 없게 됨으로서 식생활의 많은 부분을 시장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예 중 하나가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사람이 점점 줄어간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나면서 김치를 사다 먹는 가정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미 김치 시장이 식료품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이러한 것은 김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치이외에도 많은 밑반찬이 점점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집에서는 부엌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부엌의 중요도가 감소한 대표적인 예가 원룸이나 독신자를 위한 오피스텔이다. 이러한 곳에서는 부엌의 설비를 최소화하고 다른 부분의 면적을 키우는 방식으로 내부를 설계한다. 그간 냉장고는 대형화 추세였다. 그러나 요사이 다시 소형냉장고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소형냉장고가 독신자를 위한 시설로서 각광을 받고 있어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사회의 구조가 변화면서 집의 구조에 영향을 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라. 상제(喪祭)와 집

정성을 들여 장례를 치른 흔적이 있는가에 따라 인간의 문명의 시작을 판가름한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죽은 자에 대하여 예의를 가진다는 것은 반대로 살아있음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관심은 장례에 대한 특별한 의례로 표현된다. 요사이의 장례를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점점 장례의 절차가 단순화되고 기간도 짧아져 가고 있다. 이것은 생활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생활이 점점 복잡해지고 속도감이 강조되면서 이제 우리는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 추모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장례 절차를 보면 양반의 경우 가례에 의하여 진행되는데 삼년상(만 이년)을 치르고도 돌아가신 분을 4대에 걸쳐 제사를 모시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조 사대부의 생활은 그야말로 제사의 연속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상제가 발전하게 된 것은 조선조가 유교국가를 표방하였기 때문이다. 국가에서도 가묘를 짓는 것을 권장하였고 가묘를 짓지 못할 경우 집안에 위패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제의 강요는 사회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일상사에서 상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이러한 것을 위한 공간들이 필요하게 된다. 나라의 강요에 의하던 아니던 간에 이미 유교가 집안의 덕목으로 자리잡게 되면 모든 생활이 그에 맞추어 변화된다. 가세가 허락하는 집은 별도의 가묘를 모셨고 그렇지 못한 집의 경우는 대청에 자리를 마련하여 위패를 모실 만큼 상제는 일상사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례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이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종교는 생활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인습조차 순식간에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시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장례의 법에서 보면 기독교의 장례제도는 조선시대의 장례제도에 비하여 매우 단순하다. 절차도 간단하고 또한 추모의 의미로 하는 제사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리 복잡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별도의 재실이나 위패를 모시는 장소가 필요가 없다. 기껏해야 집안에 돌아가신 어른의 영정이나 사진을 걸어 놓은 것으로 대체되며 기일에도 가족끼리 모여 가족예배를 들이는 것으로 제사를 대체한다. 또한 사대봉사라는 개념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이전과 같은 음식장만의 번거로움도 없고 대가족이 모이는 번잡함도 없어지고 또한 가묘라는 것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연환경과 사회환경도 장례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외국의 예를 들어보자 티베트에는 조장(鳥葬)이라는 장례법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시신을 잘 다져서 새에게 먹이로 주는 장례법이다. 티베트에서는 이렇게 하면 영혼이 새의 몸을 빌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고 있다. 사람의 시신을 고기다지듯이 잘 다져서 살점 하나도 남김없이 새가 완전히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장법을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장례제도를 종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자연환경의 결과로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불교국가인 티베트에도 매장이나 화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매장이나 화장은 부자나 승려만이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자연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티베트의 자연환경에서는 나무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화장을 할만큼의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는 부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토질이 땅을 파는 것이 쉽지 않아 매장하는 것도 역시 일반인들에게 쉽지 않다. 또한 기후가 우리와 같지 않아 시신이 잘 썩지 않는 것도 조장이라는 특별한 장례제도를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몽골의 유목민은 노인이 움직일 수 없는 경우가 되면 약간의 음식을 남겨두고 떠난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살아 계시면 다시 모신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남아있을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장례법은 우리의 개념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느껴질 수 있고 매정함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면 그리 매정한 것도 아님을 이해하게된다. 유목민은 움직여야만 산다. 그들에게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만이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가 선택한 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선택이 전통으로 남아 독특한 장례법이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자연현상과 문화현상은 장례법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하는 장례 기간은 사회구조의 변화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의 제례의식은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못한 시기의 사회규범이다. 예를 들어 장례의 기간이 2개월로 되어 있는 것도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합한 장례의 기간이다. 장례의 절차를 살펴보면 시신을 집 뒤뜰에 가매장하였다가 장지가 마련되고 나면 다시 모신다. 이것은 장기간의 장례 때문에 발생하는 시신의 부패를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부음을 쉽게 알릴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전국어디에서도 당일에 도착할 수 있고 예전처럼 여유를 가지고 상례를 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아니어서 장례의 일정과 절차가 단순하여 지고 있다.

조선시대는 농업사회를 기반으로 정착된 삶을 살았기 과거에는 귀소본능이 강하여 밖에서 죽는 것은 불행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사고를 당한 경우는 불길하다고 하여 집에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8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에 있던 환자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시기에 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병이나 사고로 사망한 경우다. 그러므로 병원에서 장례를 치른다고 하는 경우는 대부분 좋은 기분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사람이 운명할 때가 되면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거의 비율이 높아 졌기 때문이다. 공동주택에서의 생활은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의 대소사를 치를 경우 주변사람들에게 폐가 되기 때문에 점점 모든 집안의 행사를 집밖의 별도의 장소에서 치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 많았던 함을 파는 전통이 근래에 사라진 것도 소음의 문제가 주변사람들에게 폐를 끼쳤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변화로 예전에는 집에서 치르던 장례가 점점 축소되고 병원의 장례식장이 우리의 대표적인 장례식장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이제는 대부분의 장례가 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혼식을 결혼식장에서 하듯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근본적으로 집 구조의 변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과거에는 농업을 기반으로 집이 지어졌기 때문에 작업을 위한 넓은 마당이 있었다. 이 마당은 단순히 작업공간으로 만 활용된 것은 아니다. 집안의 대소사을 치르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관혼상제가 집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공간이 집에 없었다면 관혼상제가 다른 모습으로 발달되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글쓴이 : 최성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