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가옥 평면도
김기현 가옥 전경
서산의 김기현 가옥
본문의 양이 많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저의 블러그 포토로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seongho0805.
서산은 지금도 충청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도시이지만 과거에도 매우 살기 좋은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택리지에서 충청도를 소개하면서 "산천이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에 가까운 남쪽에 있어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살면서 이 도에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으로 삼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 풍속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만하다. <중략> 가야산의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고 하는데 <중략>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여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라고 하였다.
택리지에서 말한 내포 열 고을 중 하나가 이곳 서산이다. 김기현가옥은 서산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음암면 유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한다리 경주 김씨세거지 慶州金氏勢居地"라고 써있듯이 경주 김씨는 누대로 이곳에서 살아왔다. 경주 김씨가 이곳에 입향한 것은 15대조인 김연金堧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세를 일으키게 된 것은 13대 조인 단구자丹丘子 김적金積 때부터이고 그 후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37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집안이 되었다고 한다.
김기현 가옥은 매우 흥미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선 외관상으로 집의 좌향은 남동동향을 하고 있는데 대문은 북북동향을 하고 있다. 또한 대문이 담의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옆문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또한 문도 다른 집과는 달리 행랑채가 없이 달랑 한 칸의 대문만 설치되어 있으며 지붕도 우진각으로 되어있어 다른 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대문을 북쪽에 설치하면 '집안에 액운이 낀다.'고 하기 때문에 북쪽에 대문을 두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불길하다고 하는 북쪽으로 대문을 설치한 것은 풍수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주인의 설명에 의하면 물길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김기현선생은 행랑채 중 가운데 있는 한 칸의 초석이 다른 곳 보다 높다고 하면서 아마도 이곳에 원래의 문의 위치였던 것 같다고 하였다.
어쨌든 대문이 북쪽에 나고 보니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의 뒷면을 보게된다. 마치 뒷문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사랑채는 안채의 좌향과는 달리 남쪽을 향하게 되어있어 안채와 평행이 되도록 배치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향을 고려하여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칸(김기현 선생의 말씀으로는 차양칸의 기둥은 참죽나무라고 한다.)이 설치되어 있다. 이러한 차양칸은 창덕궁 연경당, 강릉 선교장의 사랑채인 열화당, 그리고 전남 녹우당의 사랑채 등 모두 4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 곳에 차양칸이 설치된 모습을 보면 모두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이곳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차양칸을 설치하는 시기에 집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뒤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차양칸도 그렇지만 사랑채나 안채를 보면 지붕 끝에 함석으로 부연을 설치하거나 홈통을 설치해 물을 처리한 것이 보인다. 함석부연을 설치하고 늘어난 만큼 기단의 길이를 늘여놓았다. 이렇게 부연을 설치한 것은 툇마루에 비가 들이치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80년 대 찍은 것으로 보이는 문화재청싸이트의 사진을 보면 사랑채 후면 차양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다. 불확실하지만 나무판으로 만들고 위를 함석으로 덮은 것처럼 보인다. 나무판 끝 부분에는 기둥을 세워 고정하였다. 그러므로 꽤 오래 전부터 이러한 차양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기단과 사랑채 앞의 차양칸의 기단도 모두 설치된 차양이나 차양칸에 알맞게 되어있는 것으로 같은 시기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김기현 가옥 사랑채
안채는 완전한 ㅁ자 형태의 집이다. 이러한 것은 충청도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구조이다. 대 여섯 곳 정도가 ㅁ자 형태를 하고 있다. 충청도에서 보이는 ㅁ자 구조는 자연환경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경상도지역과는 달리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유별의 생활을 목표로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이 뒤에 있다보니 안채로 들어가는 길은 사랑채의 뒷면을 보게 된다. 그렇다보니 다른 집의 중문을 들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옆에는 중문과 직각으로 뒷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김기현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담만 있었던 것인데 후에 생겼다고 한다. 이제 생활이 변화되고 보니 남녀유별의 관념보다는 생활의 편리를 우선하였던 것이다.
안채는 매우 튼실하게 지어진 집이다. 19세기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는 이 집은 당시의 목재 사정으로 감안할 때 매우 잘 지어진 집이다. 목재를 넉넉하게 사용하여 지었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매우 안정되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사랑채도 마찬가지이다. 정읍의 김동수 가옥(1784년)보다도 늦게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사용이 넉넉한 것으로 보아 집을 지을 당시 재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임을 느끼게 한다. 안채의 기둥은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다른 집의 대들보로 쓰일 만한 목재로 만들어졌다고 할만큼 넉넉하다. 사랑채의 기둥은 안채보다는 작지만 다른 집에 비하면 넉넉하게 사용한 편이다.
안채의 마당은 4칸 * 3칸의 규모로서 작지 않은 규모이다. 마당가운데 우물이 있는데 이렇게 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는 집은 그리 많지 않다. 기억에 나는 집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마당에 우물을 만들지 않는 것은 수맥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김기현선생의 말씀으로는 이곳이 워낙 물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최근 자기가 안채 뒤에 새로 도랑을 정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곳이므로 우물이 있는 것은 오히려 물을 한 곳으로 모으려는 목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우물에도 펌프를 설치하여 물이 일정한 양이 넘으면 자동적으로 물을 퍼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물에 물이 넘칠 정도로 물이 많다고 한다. 우물의 위치는 조금 과거의 위치에서 조금 변경되었다고 한다.
안채 전경
김기현가옥은 언제 개조했는가에 그리고 언제 초창인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가는 집이다. 우선 안채는 한번 개조한 것은 분명하다. 제일 큰 변화는 안방과 대청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김기현 선생 말씀에 의하면 '예전에는 안채의 안방과 대청 모두가 천장이 있었는데 2001년 수리를 하면서 천장을 걷어냈다.'는 것이다. 안방과 대청이 종도리를 구성하는 방법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방의 종도리는 장혀를 이중으로 설치하고 아래 장혀를 행공으로 받쳤는데 매우 화려하게 초각이 되어있었다. 반면에 현재 대청으로 사용하고 있는 부분의 종도리는 단지 장혀로만 받치게되어 있다. 일반적인 사례와는 달리 구조체의 격이 반자를 하여 볼 수 없는 안방 쪽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들보의 구성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채는 방이 두 칸 규모이고 앞에 반 칸의 퇴가 있는 전퇴집이다. 현재 대청으로 쓰이는 곳의 대들보는 고주까지만 설치되어 있다. 퇴칸 부분은 퇴보로 처리되어있다. 그러나 안방의 부분은 퇴보부분까지 한 개의 부재로 되어있다. 또한 안방의 대들보는 잘 다듬어져 있는 반면 대청의 대들보는 상대적으로 덜 다듬어져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유추하여 볼 때 안방의 천장가구는 보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대들보를 퇴칸까지 내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대청을 넓게 사용하기 위하여 쓰는 방법이다.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하여 볼 때 어느 시기인가 안채의 대청과 안방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안방의 행공
대청의 행공 및 대공
그리고 안채의 다른 곳도 개조한 흔적이 있다. 부엌은 모두 6칸인데 다른 집에 비하여 매우 큰 규모이다. 이러한 부엌은 일반 집에 비하면 2-3배 큰 규모이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부엌의 바깥쪽 3칸은 기존 지붕 밑에 눈썹지붕을 설치하고 내어 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면을 보아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평면을 보면 돌출된 부엌부분이 기단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원래의 기단을 그대로 두고 부엌만 증설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으로 변형된 것이다. 즉 원래 안채는 정면 6칸이었던 것을 한 칸을 더 늘려 7칸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안채는 중간에 한차례이상 대대적인 변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경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평면의 상태를 보면 어쩌면 지금 건넌방이었던 쪽이 안방이었을 것이다. 현재 작은 부엌이라는 곳이 예전의 부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매우 큰 규모의 부엌이 필요하게 되자 증축이 가능한 쪽으로 건물을 증축하고 부엌을 넓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건넌방 쪽에는 별당이 있어 건물의 증축이 불가능하므로 반대쪽을 증축하고 주로 사용하는 부엌을 옮긴 것이다. 부엌을 크게 늘렸다는 것은 살림의 규모가 매우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집을 새로 고칠 때 집이 매우 번성하기 시작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엌을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사랑채 앞의 채양칸을 설치한 때도 이때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건물을 개조한 시기는 언제쯤일까. 우선 우리가 고려해 봐야할 것은 양식적인 문제와 재료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다.
우선 양식적인 부분을 보면 일반 집에서는 쓸 수 없었던 문양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안채의 대들보를 받치는 행공도 아름답게 초각이 되어있고 <문화재청 사이트>의 사진을 보면 같은 양식의 행공이 사랑채의 차양에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안채의 수리와 사랑채의 차양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예전에 궁중이나 관아 건물에서 사용되던 행공과 문양이 일반 집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전후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아산에 있는 윤보선생가는 1904년에 지어졌는데 사랑채가 예전 대군과 같은 왕실과 관계된 집에서만 사용되던 물익공을 사용하였다. 그 문양이 이곳 김기현 가옥의 문양과 비슷하다. 그리고 문화재청 싸이트의 사랑채 사진을 보면 사랑채 누마루 하부와 굴뚝에 붉은 벽돌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1892년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이 지어진 이후이다. 앞서 언급한 윤보선생가에서도 벽체와 굴뚝에 붉은벽돌이 사용되었다. 또한 차양칸과 기존지붕이 만나는 곳에 물받이를 설치하였는데 함석으로 되어있다. 주인의 말로는 자신이 어렸을 때도 함석이었다고 한다. 함석은 일제시대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므로 차양칸은 외래 문물이 들어온 이후 세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재료나 양식을 아산 윤보선생가와 비교하여 보면 김기현가옥은 비슷한 시기에 고쳐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책에 소개된 이 집의 평면을 보면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의 전통민가>, <한국의 건축문화재 충남편>이 있다. 세 곳의 평면이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가장 차이를 보이는 곳이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평면이다. <민족문화백과사전>의 평면에서는 현재 사랑채 앞에 돌출되어 있는 마루가 없다. 그러나 김기현선생의 말씀에 의하면 예전에도 있었다고 하며, <문화재청 싸이트>의 사진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기현선생은 지금 돌출된 마루 끝에 설치되어 있는 원형부재가 잘 못 설치되었다고 한다. 예전의 것은 지금처럼 직선부재가 아니라 용이 트림하듯 자연스러운 형태였다고 한다.(이는 <문화재청 싸이트> 사진에서도 일부 확인이 된다./김기현 선생의 말씀으로는 나무도 향나무였다고 한다.) 김기현선생의 증언을 기본으로 하여 도면과 비교하면 퇴칸 앞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차양칸이 설치된 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보면 앞의 차양칸은 후대에 설치된 것이 맞는 것 같다.
김기현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건물은 고성 이씨(일부에서는 태안 이씨 또는 환동 이씨로 불린다고 한다.)가 지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김기현씨는 고성 이씨의 건립 설을 부인한다. 다만 한때 살고 있었을 가능성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다른 성씨가 살던 것을 다시 사들이면서 대대적인 수리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했다면 그 시기는 20세기초였을 것이다.
지금도 집은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 김기현선생은 지금도 당신의 손으로 조금씩 고쳐나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김기현선생은 우려를 하고 있다. 혹시나 자신의 손으로 문화유산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을 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것에 개의하지 않는다. 집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집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양이 외부에 설치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 집에 비가 들이치는 것 때문에 설치된 것이다. 부엌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라고 한다면 누구도 살려하지 않을 것이다. 화장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전체의 분위기를 흔들지 않는 한에서 변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불편하여 살지 않게 만드는 것보다는 약간 변형하여 사람이 살게 하는 것이 집을 보존하는데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김기현 가옥의 안방과 사랑방에는 천장이 없다. 김기현선생은 천장이 너무 낮아 답답해서 집을 수리할 때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니 사람의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깊게 느꼈다. 한옥에서 살기가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시설이 불편한 점도 있지만 살아온 생활습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의 집들은 방의 규모가 크다. 방의 규모가 크게 된 것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식생활을 기준으로 설계되기 때문에 침대 등의 가구가 차지하는 면적도 만만치 않다. 이렇다 보니 집이 점점 넓어진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한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이제 은퇴하여 과거 살던 집에서 다시 살려고 할 때 자신이 살던 집이라고 하더라도 한옥이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온돌에도 적용된다. 얼마 전 온돌의 아랫목 윗목을 구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개발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미 집구조가 방 전체를 골고루 이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현재 방을 사용하는 패턴을 보면 방의 구석구석을 골고루 이용한다. 이러한 경우 방바닥의 온도차를 느끼게 되면 사람은 그리 편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며 방바닥의 온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과거의 아랫목 윗목의 구분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어진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졌고 사람의 속성상 편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방바닥 온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방바닥의 온도차이가 있다는 것은 공기의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용하다고 해도 사람에게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것이 적용되는 것은 쉽지 않다. 에어콘이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은 에어콘을 켜고 산다. 방의 온도가 너무 높은 것이 좋지 않다고 해도 온도를 낮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에어콘의 쾌적함과 따뜻함의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에어콘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에어콘을 버리는 것이 웬만한 각오가 아니면 안된다. 바로 이러한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따라서 한옥도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되는 것이며 또한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역사 이래로 집이 고정된 모습을 모여준 적은 없다. 집은 계속해서 변화되어 왔다. 따라서 집이 변화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집을 돌아보고 나니 집수리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다. 그리고 돌아와 문화재청의 사진과 기타 수리 전에 찍은 사진자료와 비교하여 보니 더욱 아쉬움이 크다. 김기현선생도 불만을 토로하였듯이 원형에 대한 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 집을 수리할 때 찾아온 몇 몇 설계자도 김기현선생과 대화가 없었다고 한다. 설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집주인과의 대화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특히 문화재 수리에 있어서 집주인 특히 나이가 많은 집주인일수록 그분들의 증언이 바로 복원에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하지 않은 설계자는 설계의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집의 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첫 번째로 차양칸 부분이다. 사진 자료에 의하면 차양칸 후면 지붕은 사랑채 지붕의 하부로 들어가 있다. 또한 지붕의 물매도 다르다. 수리전의 지붕의 물매는 지금보다 완만했다. 그리고 전면부 지붕과 후면부 지붕의 물매가 차이가 있어 사진상으로는 후면부의 물매가 더 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랑채 처마 아래로 차양을 설치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지금은 지붕의 물매를 전후가 같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물매를 급하게 하여 차양칸 처마끝과 사랑채 처마끝이 조금 떨어져 있고 그 간격을 상자홈통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도리 밑의 장혀를 받치는 행공도 <문화재청 싸이트>나 <한국의 전통가옥>의 사진에 의하면 안채의 것과 같은 형태였는데 지금은 행공 자체가 없어졌다. 그리고 전면 기둥 중간에 쇠철물로 연결되어 있는 상인방도 원래는 없었던 것이다. 상인방은 문화재청 사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높이가 바로 본인과 같이 조금 키가 큰 사람의 머리가 부딪힐 정도의 높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채 후면의 차양도 원래는 목재로 되어 있었고 또한 활주와 같은 기둥으로 받치고 있었던 것을 현재와 같이 함석차양으로 바꾸었다. 또한 사랑채 마루 하부의 벽이 예전에는 벽돌로 되어있었던 것을 돌로 찰쌓기를 하였다.
이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현재 사랑채 도랑을 보면 대문 쪽의 돌(전체 길이의 약 1/8 정도)과 그 이외의 돌이 치석의 방법이나 돌 자체 종류에서 다르다. 왜 같은 도랑에서도 이러한 차이를 보여야만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김기현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도랑의 구조가 지금과 같은 완전히 사각형의 형태가 아니고 사랑채 쪽이 경사진 사다리꼴 모양의 도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전에는 적벽돌로 되어있었던 굴뚝을 기와로 쌓았다. 도대체 왜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였는지 궁금하다. 다른 것은 놔두고라도 앞의 차양칸의 문제는 설사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문화재청의 홈페이지에 있는 사진을 참고하였다면 이러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벽돌벽을 돌로 바꾸거나 벽돌굴뚝을 와편 굴뚝으로 바꾼 것은 아마도 본래의 모습을 찾고자 함일 것이다. 그러나 대대적인 수리로 변화되었다면 이것 또한 역사의 기록일 것이다. 당시의 유행으로 본다면 붉은 벽돌의 사용은 부를 과시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일 예로 40년 전쯤 부자들이 짓는 집에는 외장으로 유백색타일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당시에는 유백색타일을 사용한 집은 곧 부잣집이었다는 관념이 박힐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타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처럼 붉은 벽돌을 사용하는 것도 한때는 부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재의 수리에는 반드시 자문회의가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수리 전 이곳을 한번이라도 찾았던 분이 있었거나 최소한 문화재청 자료를 한번이라도 찾아보았던 자문위원이었다면 앞서의 오류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설계자, 자문위원 그리고 이러한 것을 승인해준 문화재청 모두 자기 책임을 방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집주인인 김기현선생은 일주일에 5일 정도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김기현선생은 자신이 이 집에 대하여 왜 더 일찍 돌아보지 못하였는가 후회한다고 하였다. 최근 한옥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였다.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과 같이 집이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집을 고치는 과정에 대하여서도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일부 설계자는 와서 자신과 이야기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일방적으로 설계를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많다고 한다. 김기현 선생은 자신의 집에 대하여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의 자식들은 한옥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에 집을 한옥을 사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셨다. 이러한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문화유산으로서 자신의 집에 대하여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죽하면 안주인께서 한옥과 연애하고 있다고 하였을까.
추신 : 김기현 가옥 건립연대에 대한 재고찰(再考察)
글을 모두 쓰고 보니 김기현 가옥의 건립연대에 대한 추론에 대하여 스스로 의문이 가게되었다. 앞의 글은 일단 집이 19세기에 처음 지어졌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다 보니 나 스스로도 글을 쓰면서 많은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백지상태에서 추론하여보기로 한다. 추론에 앞서 이 집은 그것이 언제 인가하는 시기에 대한 문제일 뿐, 한차례 이상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집의 건립시기를 알 수 있는 증거는 앞서 언급한 행공의 형식과 문양, 벽돌의 사용, 함석의 사용 등이다. 가구의 결구 상황에 따라 추론은 가능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모든 것을 세밀히 볼 수 없었고 또한 그에 대한 본인의 지식도 일천하니 접어두기로 하고 위의 세 가지 항목으로 추론하여 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세 가지 항목도 시대를 추론하는 충분한 자료가 되므로 시대를 추정하는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인이 집의 건립시기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것은 우선 1900년 초에 집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였다면, 100년도 되지 않은 집, 어쩌면 50년도 되지 않았을 집을 종도리를 포함한 지붕구조 전부를 바꾼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붕구조를 바꾸는 경우는 지붕에 비가 새서 부재가 썩는 경우이다. 반자가 없는 곳의 경우 비가 새면 도리, 서까래 등과 같은 구조부재가 썩기 이전에 확인할 수 있으므로 우선 기와를 교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처리만으로도 비가 새는 것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가 새는 경우 다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서까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서까래를 교체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종도리 판대공 또는 행공까지 바꾸는 경우는 집을 새로 짓는 경우(최근 문화재 보수유지차원에서 교체하는 경우에는 가능하다) 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안채 지붕구조는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언제 이 집이 처음 세워졌을까. 우선 초각된 행공을 가지고 유추하여 볼 때 두가지 경우이다. 첫 번째 이 집안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을 시기이거나 아니면 앞서 추정한대로 사회적으로 기강이 해이해진 때인 1900년 전후이다. 첫 번째의 경우를 보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영조 21∼순조 5)이다. 정순왕후는 1759년(영조 35) 왕비에 책봉된 뒤 소생은 없었지만 정치 깊숙히 개입하였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하는 사건에 관여하게 되며 그 뒤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반대인 벽파(僻派)와의 대립에서 벽파를 두둔하였다. 또한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야후 백과사전/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따라서 당시의 법도를 어기고 집을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었을 때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때가 아닐까 한다. 즉 1800년 초에 집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집이 정순왕후 생가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순왕후의 입김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때에 집을 지었다면 19세기에 처음 집을 짓고, 1900년대에 들어서 기능상 필요에 의하여 방의 위치를 바꾸는 큰 수리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순왕후 사망 이후에는 집을 화려하게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기현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안동김씨가 집권을 한 이후에는 권력싸움에서 밀려 가세가 축소되었다고 하니 더욱 국법을 어겨가며 화려하게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집을 1900년 이전에 지었다고 하면 정순왕후가 생존하여 있을 때뿐이다.
다음으로 화려하게 집을 지을 수 있는 경우는 갑오경장 이후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신분상 제약이 혁파되고 나서 이제 집을 마음대로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화려한 물익공을 사용한 아산의 윤보선 생가도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집이다. 1910년에 지어진 괴산의 김기응가옥에도 예전에 궁궐에서만 할 수 있었던 꽃담에 만들어졌다. 또한 붉은 벽돌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1900년 초에는 재력이 있으면 누구든지 화려한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붉은 벽돌의 사용이 부자집의 유행이었을 것이다. 김기현 가옥도 이때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문화재청 싸이트의 사진을 보면 사랑채의 굴뚝과 사랑채 대청 하부가 벽돌로 되어 있다. 또한 김기현 선생의 말씀으로는 안채의 뒷편의 굴뚝도 모두 벽돌로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1900년도에 처음 집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시기에는 일반 주택에서도 벽돌을 사용하는 예가 많이 있다. 앞서 말한 윤보선 생가 말고도 윤보선 생가 주변에 지어진 윤씨 일가친척의 집에도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벽돌을 사용하는 것은 부자집에 있어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기현 가옥은 아예 이 시기에 처음 지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잠시 초창의 모습으로 사용하다. 일제시대 중반에 이르러 가세가 확장되면서 부엌의 규모가 늘릴 필요가 있어 부엌의 위치가 변하고 이에 따라 대청과 안방의 위치가 변화되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혹시 김기현 선생의 아버님이나 할아버님 또는 증조부까지의 가계를 살펴 어느 분이 크게 부를 쌓았는지를 알게되면 안채의 개조시기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이 확인되면 초창의 시기도 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 수리할 때 벽돌굴뚝을 현재의 기와굴뚝으로 고쳤다. 만일 이 집이 1900년경에 지어진 것이거나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이라면 굴뚝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고쳐놓은 것은 또 다른 역사왜곡이다. 안채에 설치된 행공의 문제는 천장 속에 가려져 설계당시는 몰랐다하더라도 최소한 수리하는 때에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행공의 문제는 건축연대를 추정하고 집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논의도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을 조금 더 심도있게 논의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초창시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것을 알려면 상량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김기현선생의 말씀으로는 수리할 때 상량문을 열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의 추정은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대청과 안방의 위치는 변화되었고 그 원인이 부엌의 확장 때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사이트
택리지/이중환 저/이익성 역/을유문화사
서산의 문화 제17호/서산향토문화연구회
한국의 전통민가/주남철/아르케
한국의 건축문화재 5 (충남)/이왕기/기문당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야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