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일대기가 별도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조당집(祖堂集)]과 문경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비문,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비문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그의 삶과 사상이 복원된다.
도의의 성은 왕(王)씨이고 호는 원적(元寂)이며 북한군(北漢郡) 출신이다.
78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739-814)에게 불법을 이어받고 도의라고 개명하여 821년(헌덕왕 13)에 귀국하였다.
무려 35년간의 유학이었다.
도의가 당나라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남종(南宗)선의 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북종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은 조계혜능(曹溪慧能:638-713)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安心觀壁)" 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6대조 혜능의 뒤를 이어 8대조인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에 이르면 여기서 더 나아가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임을 외치게 되는데, 이 외침은 곧 마조선사가 있던 지명을 딴 홍주종(洪州宗)의 진면목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가 서당지장인바, 도의선사는 바로 그 서당의 홍주종을 익히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서라벌에 돌아온 도의선사는 스스로 익힌 홍주종의 외침을 부르짖고 돌아다녔다.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변혁사상이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부르짖는 진보적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당시 통일신라의 왕권불교는 왕즉불(王卽佛)의 엄격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곧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이었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따지고 보면 도의선사의 주장은 해괴한 마귀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험한 사상, 불온한 사상이었다.
만약 통일신라에 국가보안법이나 불교보안법이 있었다면 도의는 영락없이 구속. 처형감이었다.
그런 위험이 도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 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은 설악산의 진전사였다.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진전사의 삼층석탑(국보 제122호)은 아주 아담하게 잘생겼다.
귀엽다, 예쁘다고 표현하기에는 단정한 맛이 강하고, 야무지다고 표현하면 부드러운 인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진전사의 삼층석탑에는 앞 시대에 볼 수 없던 돋을새김 장식이 들어 있다.
기단 아래쪽 천의(天衣)자락을 흩날리는 화불(化佛)이 사방으로 각각 두 분씩 모두 여덟 분, 기단 위쪽에는 팔부중상 여덟 분이 사방으로 각각 두분씩, 그리고 1층 탑신(塔身)에 사방불(四方佛) 네 분이 각 면마다 한 분씩 돋을 새김 되어 있다.
조각솜씨는 통일신라시대의 문화역량을 조금도 의심치 못하게 하는 정교성과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조각이 화려한 느낌을 주거나 로코코적인 장식취미로 빠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아담한 분위기에 친근감과 친절성을 더해주는 조형효과를 낳고 있다.
기왕 따져본 김에 진전사 석탑을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해보면 8세기중엽 중대신라의 문화와 9세기 하대신라의 문화가 어떻게 다르고,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를 밝히는 단서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진전사탑은 석가탑의 전통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기단이 상하 2단으로 되어 튼튼한 안정감을 주는 것, 3층의 몸체가 상큼한 상승감을 자아내는데 그 체감률을 보면 높이는 1층이 훤칠하게 높고 2층과 3층은 같은 크기로 낮게 설정했지만 폭은 4대3대2의 비율로 좁아지고 있는 점, 지붕돌[屋蓋石]의 서까래가 5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는 점,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한 장의 돌로 만들어 이었는데 몸돌 네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는 점, 모두가 석가탑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m인데 진전사탑은 5m로 현격히 축소되어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 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지붕돌의 기왓골이 석가탑은 거의 직선인데 진전사탑은 슬쩍 반전하는 맵시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런 미감의 차이를 낳았다.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 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감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는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 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신라 중앙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호족의 새로운 문화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중앙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닌 것이다.
부도의 탄생 그것 또한 위대한 탄생이었다. 도의선사 이전에도 부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문화사적 내지 사상사적 의미는 다른 것이다.
신라시대의 저 유명한 고승들, 원효. 의상. 진표. 자장 등 어느 스님도 그 부도가 남아 있지 않다.
화엄세계의 거대한 논리와 질서 속에서 고승의 죽음이란 그저 죽음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대선사(大禪師)의 죽음은 이제 다르게 생각되었다.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곧 부처와 동격이 된다.
일문일가라고 했으니 그 독립성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일문(一門)을 이끌어온대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의 죽음 못지 않은 것이다.
석가모니의 시신을 다비한 사리를 모시는 것이 곧 탑인바, 이제 성불(成佛)했다고 믿어지는 대선사의 사리도 그만한 예우로 봉안해야만 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절의 권위와 전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제일문인 가지산파의 제1조 도의선사의 부도가 진전사 뒤쪽 산등성에 모셔진 것이었다.
이제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을 진전사에서 처음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창조물의 형태는 다른 나라에서 빌려오든지, 아니면 그 논리에 따라 창출하든지 둘 중 하나이거나 두 방법을 다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모방과 창조 두 가지가 도의선사 부도에 나타나고 있다.
당나라에 전해지는 부도로는 초당사(草堂寺)에 유명한 불경번역승인 구마라집(鳩摩羅什)의 사리탑이 존재한다.
이 사리탑의 구조는 8각당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의선사의 부도는 바로 이와 비슷한 8각당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받침대는 석탑의 기단부를 그대로 원용하였다.
그리하여 2성기단(二成基壇)에 8각당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부도나 탑이나 모두 사리를 장치한 것이니 그 논리가 맞는다.
도의선사 부도 이후,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화상에 이르면 이 부도가 마치 장고의 몸체를 연상케 하는 형태[鼓腹形]의 연꽃받침대에 8각당을 얹은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염거화상의 부도는 이후 하대신라에서 고려초에 이르는 모든 부도의 범본이 된다.
왜 2성기단에서 고복형의 연꽃좌대로 바뀌었을까?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성불한자의 대좌는 연꽃이고, 축소해 말해도 극락환생은 연꽃으로 다시 피어나는 모습이니 적절하다.
조형의 원리로 말한다면 도의선사 부도처럼 2성기단에 8각당을 얹은 것은 아래쪽이 너무 넓어서 비례가 맞지 않는다.
그 어떤 이유였든 결론은 염거화상 부도 형식으로 되었다.
염거화상이 입적한 것이 844년이니 이때에 완성된 것이다.
염거화상의 부도는 지금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모셔져 있다.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에 이르면 우리는 9세기 하대신라의 석조물에서 부도가 지닌 위치를 확연히 확인하게 된다.
9세기 경주의 중앙 귀족문화를 본뜬 석탑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양식인 부도의 건조에는 온갖 정성을 다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실수 없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