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907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나말여초의 운문사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운문사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삼국유사속의 운문사
보양과 이목
승려 보양전에는 고향과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가 실피건데 청도군 사적에는 이러하다.
천복 8년 계묘(태조즉위 제26년임) 정월 일에 청도군 계리심사 대내말 순영과 수문 등의
주첩공문에 보면, 운문산 선원 장생의 남쪽은 아니점이요,동쪽은 가서현이라 하였고
동수삼강전 주인 보양화잔, 원주 현회장로,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장로, 직세 신원선사라고 하였다.
(청도건 도전장전에 준한것)
또 개운 3년 병진의 운문사 선원의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는 장생이 11인데, 아니점 가서현,무현,서북매현[면지촌으로도 되어 있음],북저족문 등이라고 하였다. 또 경인년 진양부첩에는 5도의 안찰사가 각 도의 선교사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년월과 형지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이던 동경장서기 이선이 조사하여 기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풍 6년 신사[대금의 연호로서 고려 의종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 고적비보기에 따르면 청도군의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호적에 옛사람의 소식 및 언전에는 기록하기를, 치사 상호장 김양신, 치사 호장 민육, 호장 동정 윤응전, 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 등의 말이 있다. 그때 태수 이사로, 호장 양신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운운하였는데 다음은 준하지 않았음).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 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았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니, 법삭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처음에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와의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마침 태조가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땅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견성(犬城: 우뚝한 산봉우리가 물가에 있는데 오늘날 세인들이 그 이름을 좋지 않게 여겨서 견성으로 고쳤다고 함)에 모여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서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기를, “대저 개라는 동물은 밤에는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쪽은 지키지만 뒤쪽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았다.
이에 태조가 그 신모(神謀)를 가상하게 여기고 해마다 가까운 현의 조세 50석을 주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기 때문에, 절에 태조와 보양 두 성인의 진용을 안치하여 봉성사라고 이름하였다. 후에 법사가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창건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다. 속전에 말하기를, “석굴사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사(毗虛師)로도 되어 있음]와 형제가 되고, 봉성사,석굴사,운문사 세 절이 봉우리를 맞대고 나란히 있어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세 사람이 신라의 <수이전>을 개작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법사전에 기록하고 견성에 관계된 것을 비허전에 실은 것은 잘못이다. 또 <해동승전>을 지은 자가 그것을 따라 윤문함으로써 보양의 전이 없게 하여 후세 사람이 의혹을 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가.
운문사 홈페이지 참조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907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나말여초의 운문사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고려, 조선시대의 운문사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운문사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삼국유사속의 운문사
보양과 이목
승려 보양전에는 고향과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가 실피건데 청도군 사적에는 이러하다.
천복 8년 계묘(태조즉위 제26년임) 정월 일에 청도군 계리심사 대내말 순영과 수문 등의
주첩공문에 보면, 운문산 선원 장생의 남쪽은 아니점이요,동쪽은 가서현이라 하였고
동수삼강전 주인 보양화잔, 원주 현회장로,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장로, 직세 신원선사라고 하였다.
(청도건 도전장전에 준한것)
또 개운 3년 병진의 운문사 선원의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는 장생이 11인데, 아니점 가서현,무현,서북매현[면지촌으로도 되어 있음],북저족문 등이라고 하였다. 또 경인년 진양부첩에는 5도의 안찰사가 각 도의 선교사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년월과 형지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이던 동경장서기 이선이 조사하여 기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풍 6년 신사[대금의 연호로서 고려 의종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 고적비보기에 따르면 청도군의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호적에 옛사람의 소식 및 언전에는 기록하기를, 치사 상호장 김양신, 치사 호장 민육, 호장 동정 윤응전, 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 등의 말이 있다. 그때 태수 이사로, 호장 양신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운운하였는데 다음은 준하지 않았음).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 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았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니, 법삭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처음에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와의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마침 태조가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땅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견성(犬城: 우뚝한 산봉우리가 물가에 있는데 오늘날 세인들이 그 이름을 좋지 않게 여겨서 견성으로 고쳤다고 함)에 모여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서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기를, “대저 개라는 동물은 밤에는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쪽은 지키지만 뒤쪽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았다.
이에 태조가 그 신모(神謀)를 가상하게 여기고 해마다 가까운 현의 조세 50석을 주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기 때문에, 절에 태조와 보양 두 성인의 진용을 안치하여 봉성사라고 이름하였다. 후에 법사가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창건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다. 속전에 말하기를, “석굴사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사(毗虛師)로도 되어 있음]와 형제가 되고, 봉성사,석굴사,운문사 세 절이 봉우리를 맞대고 나란히 있어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세 사람이 신라의 <수이전>을 개작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법사전에 기록하고 견성에 관계된 것을 비허전에 실은 것은 잘못이다. 또 <해동승전>을 지은 자가 그것을 따라 윤문함으로써 보양의 전이 없게 하여 후세 사람이 의혹을 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가.
운문사 홈페이지 참조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누들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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