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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산청 답사 자료 부록 2 - # 書院에 대하여

깜보입니다 2007. 11. 25. 23:40
# 書院에 대하여
서원이란 명칭은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集賢殿書院'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현을 받들어 모시고 어울려 공부하던 본격적인 서원은 송나라 때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대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이들은 지방 곳곳에 사사로이 글방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 역량이 커지자 나라에서는 서원이란 이름을 내려 장려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수양서원, 석고서원, 백록동서원, 악록서원 등의 활동이 주목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朱子가 강론을 하던 白鹿洞書院이 유명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1542년(중종 37년) 풍기 군수 周世鵬이 고려 말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安珦의 옛 집터에 사당을 짓고 제사 지내며 선비의 자제들을 교육하면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白雲洞書院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서원이란 명칭은 세종 때에 이미 쓰이고 있었다. 그 예로 전라도 김제의 정곤, 광주의 최보민, 평안도의 강우량 등이 사사로이 서원을 세워 생도를 교육한 공로로 포상을 받았고, 경상도 단성에는 道川書院, 성주에는 川谷書院, 전라도 부안에는 道洞書院이 세워져 각기 문익점, 김굉필, 김구를 제사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서원은 後進敎育과 先賢奉祀의 두 기능을 아울러 지닌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원의 시초로는 백운동 서원을 일컫는다.

1. 설립 배경
1) 관학의 부진
조선 시대 관학 교육 제도는 대략 세종 때 완비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이때부터 이미 관학은 출세의 도구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교관의 질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특히 세조의 집정으로 양식있는 선비들이 관학 교육에의 참여를 기피하게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관학의 부진은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러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 장소로 사용하였고 학자들의 독서를 금하기조차 하였다. 이런 관학의 극도의 퇴락 속에 생겨난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2) 사림의 성장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은 성리학에 관심이 많아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王道政治를 희구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비리와 부정에 젖어 있던 훈구 세력과 대립되어 결국 몇차에 걸친 사화에서 심한 타격을 입자 세력을 키우기 위한 궁극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

향촌에서 성장한 사림들은 향촌에 뿌리를 내리고자 社倉制의 실시, 留鄕所의 復立, 鄕約의 전국적 시행 등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 의도를 간파한 훈구 세력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자 사림들은 세력 결집을 위한 새로운 장으로서 서원을 구상하였다. 서원은 명목상은 어디까지나 교육 시설이었으므로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사림들은 서원을 통해 학연을 돈독히 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3) 학풍의 변화
고려말 성리학이 수입됨으로써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말 선초의 성리학은 사회 혼란을 개혁하고 또한 새로운 왕조 건설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사변적인 면보다는 명분론·의리론으로 대변되는 현실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사림의 대두와 더불어 주자에 대한 숭배열이 고조되고 있었다. 사림의 주자 숭배는 훈구 세력에 도전하기 위한 이념적 무장으로서도 불가피하였다. 주자 숭배는 주자의 저서인 <小學> 정신의 실천으로 이어졌으며 교육 활동에도 곧바로 구현되었으니 '白鹿洞學規'가 그대로 답습되었다. 당시 사림들 사이에는 백록동서원을 흠모하는 자가 많아 마침내 주세붕에 의해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을 세우게 되었다. 서원에서의 공부나 가르침도 주자의 학문 체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으니 서원을 중심으로 주자 성리학이 꽃피게 된 것이다.

2. 서원의 역할
1) 공부하는 곳
서원은 그 연원이 사설 교육 기관에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것도 그들의 큰 뜻을 배우고 따르고자 함에 있었다고 할 때 서원 설립의 기본 의도는 배움의 장을 마련함에 있었다.

향촌에서 나름대로 공부하던 선비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참여를 시도했으나 사화로 큰 타격을 입자 산간 전야로 몸을 피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며 뜻이 맞는 동료들과 자주 강학회를 가지면서 후진을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서경덕. 이언적, 이황, 조식, 김인후, 기대승, 성혼, 이이 등 명망이 높았던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향촌의 유생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많은 사림들이 그들을 찾아와 배움을 청하게 되니 자연히 명망이 높은 선비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배움의 장으로서 각광을 받게되었다.
각 서원의 학칙이라 할 수 있는 원규에 의하면 서원의 교육 목표는 法聖賢과 養吏에 있었다. 이를 위해 서원의 원생들은 소학부터 읽기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등의 순서로 배웠다. 이렇게 하여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 서원에 따라서는 가례, 심경, 근사록, 사기 등을 읽어 뜻을 넓히게 하였다. 한편 서원은 정계에서 밀려난 선비들의 재기의 장소로, 붕당의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정계에 진출을 위해서는 그 관문인 과거 교육 또한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다. 이황도 국가에서 현인을 얻는 것은 서원에서라고 하였듯이 관리의 양성, 곧 養吏도 서원의 중요한 교육 목표의 하나였다.

2) 先賢을 모시는 곳
조선 후기에 이르면 교육의 기능보다 祠廟의 기능이 더 강조된다. 이는 문중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어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제향되고, 학덕으로 명망이 있는 인물보다는 충절로 이름이 높은 인물들이 배향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원의 기능도 변질되어 서원은 단순한 祠宇까지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해되었다.

조선 왕조는 숭유 정책의 일환으로 국가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사후에 제향하는 祠宇의 설립을 장려하여 도처에 사우가 생겨났다. 그래서 후기에는 문중 또는 향촌의 인물이 기준도 없이 선정되고, 또 별다른 연고도 없는 사람을 빌려 오거나 여러 사람을 동시에 배향하는 경우도 많아져 이로 인해 서원이 남설되고 서원의 격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문중이나 향촌 사림의 결속을 위해서는 서원에서의 선현 봉사가 필요했다. 특히 17세기 이후의 서원은 제향 위주의 성향이 현저해짐에 따라 그 기능이 동일시되어 가문의 권위를 나타내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손이나 문중에서는 다투어 건립하였다.

서원에서는 봄과 가을에 배향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위해서는 엄격한 원임이 편성되어 있었다. 武城書院의 원규에 의하면 院長 1인, 院貳 1인, 講長 4인, 訓長 4인, 齋長 4인, 執綱 4인, 都有司 2인, 副有司 2인, 直月 2인, 直日 2인, 그밖에 色長, 掌議, 有司가 몇 사람 있어서 서원에서의 교육활동과 제사 업무를 관장했다.

3) 향촌 사회의 도서관
서원이란 용어 자체가 서적을 수집, 보관, 보급하는 도서관적 기능에서 비롯되었듯이 처음 백운동서원에서도 주세붕이 원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여 비치하였다. 이황의 건의로 사액을 받으면서 국가에서 4서 5경과 성리대전 등 많은 장서를 하사하였으며 서원 독자적으로도 서적을 수집하여 紹修書院은 107종 1678책을 소장하였다. 그외 옥산서원은 866종 4111책, 도산서원 907종 4338책, 병산서원은 1071종 3039책을 비치하여 원생뿐 아니라 향촌 사림에게도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서원에서는 서적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였다. 임란 이후 서원이나 국가 소장의 서적이 대부분 불탔으나 재정이 악화된 정부로서는 많은 서적을 출판할 수도 사액 서원에 하사할 수도 없었다. 이에 서원은 스스로 서적 편찬에 적극 앞장서 교육용이나 배향된 인물의 문집, 유고 등을 활발하게 간행했다.

3. 서원의 설립 장소
1) 입지 조건
* 세속에서 벗어나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에 위치한 서원 -- 이산서원, 역동서원, 영봉서원

* 절터 또는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는 경우 -- 소수서원, 옥산서원, 노강서원, 임고서원, 청성서원

* 배향하는 선현의 연고지와 관련이 깊은 서원 -- 소수서원, 옥천서원

* 배향된 선현들이 살았을 때 세운 서당이 발전한 경우-- 도산서원, 둔암서원, 덕천서원, 병산서원, 노강서원, 필암서원, 회연서원

2) 지역적 분포
서원은 삼남 지방 그 중에서도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으며, 안동, 상주, 대구, 진주, 나주, 남원, 청주 등에 밀집해 있다. 특히 영남 지방은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정맥을 자부하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자연히 서원도 많이 건립되었다.

안동은 진성 이씨, 의성 김씨, 하회 류씨, 안동 김씨, 안동 권씨 등 명문 거족이 많아 이 일대에 20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었다. 상주도 류성룡, 정경세, 송준길, 손중돈 등의 감화가 있던 곳으로 10여 개의 서원이 있으며, 선산에도 길재와 관계하여 많은 서원이 건립되었다. 진주, 함양, 합천 등지에는 조식이 오건, 최영경, 김우옹, 정인홍, 곽재우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이들과 관계있는 서원이 많이 생겼으며, 대구, 상주, 창녕, 현풍 등지에는 예학의 뿌리를 내린 정구를 모시는 서원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4. 배향 인물
조선 왕조는 숭유 정책의 일환으로 서원의 설립을 지원하면서 향촌 사회를 교화하기 위해서 학덕이 높은 명현을 본받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액의 조건은 배향 인물의 학덕이 크게 뛰어나거나 국가에 공적이 크든지, 아니면 충절과 의리로써 모범이 될 만한 경우에 한정했다.

붕당 정치의 갈등이 심화되는 17세기 이후로는 서원이 붕당의 후방 기지 역할을 하게 되자 자기 붕당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표적 인물을 배향하였다. 서인 계열에서는 이이, 성혼, 김상헌, 김장생, 송시열, 윤선거, 윤증, 권상하 등을, 남인 계열에서는 이황, 조식, 정구, 정경세, 류성룡, 김성일 등을 서원에 배향하였다. 또 임란과 호란 때 순절한 조헌, 김천일, 고경명, 곽재우, 송상현, 윤집, 오달재, 홍익한 등이나 세조 집정에 반대한 사육신, 생육신도 배향 인물로 주목된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빈도수를 보면 이황, 송시열, 이이, 주자, 조광조, 이언적 등이 여러 차례 배향되는데 이황, 송시열, 이이, 주자는 20여 곳 이상에서 모셔지며 이황은 경상도에서 송시열은 충청도, 이이와 주자는 황해도에서 주로 배향되었다.

그외 문중의 선조를 배향하여 후손이 제사 지내면서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려고 한 경우도 있다. 파주의 파산서원(창녕 성씨), 장성의 고산서원(행주 기씨), 대구의 구암서원(달성 서씨), 안동의 사빈서원(의성 김씨), 평산의 동양서원(평산 신씨와 한산 이씨) 등이 대표적이다.

5. 서원의 시설
공간 구성과 배치는 교육 시설인 齋室과 講堂, 제향 시설인 祠堂으로 나누고 앞쪽에는 교육 시설을 뒤쪽에는 제향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前學後廟)

건물은 검소한 선비 정신에 따라 복잡한 포나 장식을 피하고 익공이나 도리집 등의 간소한 양식으로 화려하지 않게 꾸민 것이 보통이며 단청은 사당에만 사용하였다. 각 건물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중심축이 있어 앞에서부터 정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 순으로 배치하고 강당 전면에 좌우 대칭으로 재실을 두었다. 그리고 제기고, 장판고, 교직사 등을 적절히 배치하였다. 이 건물 배치는 지반에 차이를 두어 주 건물과 부속 건물의 공간 구성을 적절히 하고 담장은 외부와 분별은 되게 하였지만 높지 않게 하거나 그 일부를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여 내부에서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한 것이 서원 건축의 특징이다. 조경 또한 경내에는 철따라 피고 지는 꽃과 낙엽수를 심어 계절에 따른 풍치를 감상하도록 하였고, 경외에는 松, 竹을 심어 푸른 산의 정기와 선비의 기상을 풍기게 하였다.

* 講堂 -- 학문을 토론하는 곳으로 서원 안에서 제일 규모가 크며 넓은 대청 마루와 온돌방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건물 중앙 처마 밑에 현판이 걸려있는데 中正堂(도동서원), 敬義堂(덕천서원), 求仁堂(옥산서원), 立敎堂 (병산서원), 明誠堂(남계서원)이란 현판이 남아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이 일반적이다.

* 齋室 --원생들이 잠자는 곳으로 보통 강당 앞에 대칭으로 자리하고 있다. 강당을 향하여 설 때 오른쪽의 재실을 동재라 하고 왼쪽 것을 서재라 한다. 동재에 기거하는 원생이 서재 원생보다 선배다. 현판에는 養正齋, 輔仁齋(남계서원), 居仁齋, 居義齋(도동서원), 進德齋, 崇義齋(필암서원)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 일반적이다.

* 祠堂 --선현의 위패(또는 영정)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는 곳으로 배향 인물은 보통 1인을 주향으로 시작하나 뒤에 다시 추가로 배향하기도 한다. 명칭은 尙德祠(도산서원), 泰山祠(무성서원), 尊德祠(병산서원), 體仁廟(옥산서원)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 일반적이다.

* 藏板庫--장판각, 장경각, 서고 등으로 부르며 서책이나 이것을 찍어낸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 祭器庫--제향 때 필요한 제수를 마련하고 기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典祠廳이라고도 한다. 제향은 크게 향례와 묘사로 나뉘는데 향례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中丁日(그 달의 일진에서 중간에 있는 丁日)에, 묘사는 음력 3월 10일과 10월 2일에 행한다. 기물은 주로 목기와 죽기를 쓴다.

* 樓閣 --원생들의 휴식이나 여가를 위해 마련한 건물로 누각이 없는 곳도 많으며 정문을 겸한 곳도 있다. 현판에는 無邊樓(옥산서원), 水月樓(도동서원), 晩對樓(병산서원), 絃歌樓(무성서원), 廓然樓(필암서원) 등이 있다.

이밖에 서원의 정문인 外三門, 제향 구역의 정문인 內三門, 원지기들이 거주하는 校直舍 등이 있다.

6. 서원의 경제적 기반
1) 토지
서원의 토지 지급에 대한 <속대전>의 규정에 의하면 서원전은 국가에서 직접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각 서원에서 마련하도록 되어있으며, 사액 서원에 대해서만 3결을 지급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서원은 여러가지 수탈이나 매득을 통하여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였으며 사액받은 면역전 이외에도 특례 또는 가급에 의하여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남계서원의 경우 전답은 18結 16負 9束으로, 그중 永無稅 전답이 1결 2부, 국가 면세지가 3결로 실제로는 14결 14부의 토지가 서원의 확보지였다. 경영 방식은 작인을 통한 경영이 주류를 이루었다.

2) 현물 경제
현물 경제란 국왕 또는 지방관에 의하여 베풀어지는 현물 공여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지방관에 의해서는 서적 외에 서원에서 필요한 일체의 생활용품이 공급되었다. 서원에 대한 현물 공여는 당시 사회의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는데 17세기 말까지는 租, 鹽, 田, 畓, 奴婢 등이 중심이었으나 18세기 중엽부터는 錢으로 대체되며 공여의 주체도 현직 관료 중심에서 문중 인사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후에는 이러한 관의 조치에 의한 현물 공여는 서원의 무한한 경제적 발전을 가져다주었고 한편에서는 국가 재정의 파탄이라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남계서원의 경우를 보면 기부 행위는 중앙 정계의 변동 추이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인다. 즉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경상감사와 함양군수의 경우 당색을 불문하고 현물을 제공하였으며, 진주권, 상주권 외에 전라도 지역에서도 조식의 문인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기부 행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붕당정치가 서·남인으로 재편되자 남인계의 기부는 행해지지 않는다.

3) 노비
초기에는 사액과 동시에 노비 각 1구씩 하사되었으나 사실상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구실로 또는 지방관의 조치에 의하여 훨씬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효종 때에는 사액서원에 7인, 非賜額書院에 5인, 祠에는 2인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보유하는 노비 수는 법정 수보다 훨씬 초과하였으며 남계서원만 하더라도 1599-1694년에는 40명을 소유하고 있었다. 서원의 노비 충원은 관의 조치 외에도 서원 자체의 노력에 의한 매득, 출생, 상납, 기부 등으로 이루어졌다.

또 노비의 역할을 하는 院直이 있어 이들은 자손 대대로 세습되며 오로지 서원의 노역에만 종사하였다.

7. 그 이후
서원은 후진 양성과 선현 봉사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성리학을 도입하여 향촌 사회의 교화와 사회 개혁을 부르짖던 사림의 성장과 붕당 정치의 실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붕당 정치가 변질하고 정쟁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서원은 당파의 향촌 사림 포섭에 이용되거나, 정쟁에서 희생된 자파 인물에 대한 신원을 위해서, 또는 17세기 이후 동족 내지 가문 의식이 강화되면서 족적 기반의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남설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서원이 남설되자 질적 저하는 물론 갖가지 사회적 폐단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자 서원에 대한 문제가 1644년(인조 22)부터 제기되어 숙종대에 서원금령이 내려지기도 하다가 영조대에 이르러는 탕평책의 일환으로 1741년(영조 17)에 서원 철폐가 단행되었다. 이리하여 지방관의 책임하에 19개의 서원을 포함하여 173개의 祠院이 훼철되었다. 그후 서원 남설은 크게 둔화되어 거의 정지 상태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민폐를 구실로 1871년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 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소의 사원만 남게되었다. 그중에 서원 명칭을 가진 것은 27개소고, 祠가 20개소다. 이중 11개소는 북한에 소재하여 근황을 알 수 없고 6.25 전쟁으로 소실된 김화의 충렬서원과 철원의 포충사는 그대로 방치되어 현재는 34개소가 존속하고 있다.

이들중 몇몇 서원은 정부의 지원이나 후손의 재정적 보조에 의하여 서원 문고를 보존하고 지방 유림의 詩會나 講會 장소로 활동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관광의 대상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인륜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에서 지방 사회의 전통 문화 보존의 중심체로서, 청소년 수련장이나, 예절 교육의 장으로서, 또는 전통 문화를 전수하는 섬머 스쿨을 개설하든지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박제화된 구경거리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출처 : 나의 문화유산 답사
글쓴이 : 우일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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