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구불구불 정겨운 돌담길, 느릿느릿 걸으면 낭만길

깜보입니다 2007. 12. 14. 13:18

구불구불 정겨운 돌담길, 느릿느릿 걸으면 낭만길

세계일보|기사입력 2007-12-14 09:52 기사원문보기


가을걷이를 마친 전북 정읍시 덕천면 상학마을의 요즈음 화젯거리는 단연 동네 돌담의 문화재 등록이다. 문화재청은 이달 초 마을 내 돌담길 2400m를 제366호 근대문화재로 등록했다. 크고 작은 돌로만 겹겹이 쌓아 올린 ‘강담’이 수령 300∼500년의 느티나무·왕버들 3그루, 옛 가옥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전통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옛 담장으로는 16번째인데, 마을 주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봐온 담장이 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고부라진 골목길 운치가 제주도는 저리 가라여”라고 자랑이 여간 아니다.

상학마을 돌담은 이 마을 조상들이 수백년 전 호남평야에 홀로 우뚝 솟은 두승산(斗升山) 자락에 터전을 일구며 끝없이 나오는 돌로 담, 벽, 밭두렁을 쌓아 올리면서 만들어졌다.

돌 틈바구니에 뿌리내린 채 찬바람에 아랑곳 않는 돌이끼와 담쟁이는 1894년 황토현에서 관군을 물리친 동학농민군의 함성, 일제 때 노다지의 부푼 꿈을 안고 마을에 들어섰다가 빈손으로 떠난 뜨내기 일꾼의 한숨, 그리고 1970년대 ‘잘살아보자’며 지붕과 돌담을 헐어낸 자리에 시멘트를 채웠던 새마을운동의 광풍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곳 돌담길 곳곳에는 도시 골목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늑함과 여유로움이 넘친다. 마을회관서 만난 오상환(73) 할아버지는 김장김치를 잘 받았다는 막내딸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에게 돌담길은 어릴 때는 동무들과 해질녘까지 술래잡기, 자치기, 말뚝박기를 했던 공간이었고, 6남매 모두를 도시로 내보낸 지금은 적적한 겨울에 소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장소다. 그는 “정 심심하면 동네 한 바퀴 돌다가 만나는 이웃이랑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고향밖에 더 있겄어?”라고 반문한다. 돌담장 너머 이웃집 처마에 매달린 곶감 몇 접을 매개로 과수 농부 30년의 애환을 풀어내고, 이웃으로부터 대처로 나간 아들딸 걱정을 전해 듣다 보면 오후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마을 돌담길 중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헛간채 고샅길을 집 앞에 둔 창동댁 조귀례(79) 할머니는 돌담을 바람막이 삼아 철 따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는 진달래, 분꽃, 코스모스, 국화를 보며 홀로 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한다. 조 할머니는 “영감이 15년 전쯤 먼저 저세상으로 간 뒤 아들이 계속 도시로 나오라고 하는디, 공기 맑고 경치 좋은 이곳을 내 뭐가 아쉽다고 떠나겄어”라며 “햇살 따뜻한 대청마루에 앉아 꽃구경, 바람구경 하면서 오가는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맛이 솔찬허다”고 자랑이다.

약 1년 전쯤 지역 인터넷신문 ‘정읍통문’을 통해 상학마을 돌담길을 대외에 처음 알린 향토사학자 곽상주씨는 전통 골목길 보존과 복원이 점차 사라져가는 공동체 문화를 되살리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곽씨는 “돌담길 문화재 등록·관리가 시골 관광자원을 개발하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며 “적당한 높이로 미로처럼 얼크러진 전통 골목길을 보고 있노라면 담장을 통해 마을 소식을 주고받으며 공동체 문화를 다졌던 옛 사람들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난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 18곳의 담장·돌담길이 문화재로 지정됐다. 대도시 뒷골목도 새로운 문화공간, 관광자원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높다란 회색빛 시멘트 담장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에겐 이웃과 더불어 살았던 시대의 따뜻한 정서를 일깨워주고, 중장년층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되살리며 공동체 복원의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골목길이다.

정읍=글 송민섭, 사진 김창길 기자 stsong@segye.com